외국희곡

송선호 재창작 '어떤 동산'(비울만가)

clint 2026. 2. 26. 18:29

 

 

때는 1980년대 말 경. 서울에서 머지않은 경기도. 비울마을.
아담한 산자락에 한옥 여러 채와 마당, 현대식 2층건물, 주변에 소나무 숲이 있다. 
한식당 '송림원(松林園)'이다. 구관도 있으나 현대식으로 신관으로 개장한 것이다.
여기에 주인인 강사장은 상술이 뛰어나고 처세술도 좋아 예전에 모시던 윤 회장의
이 식당과 근처 토지를 대부분 인수하여 여기에 자리잡은 것이다.
게다가 신도로 개설 등 주위에 개발 호재가 많아 소유한 토지도 들썩일 때다.
그의 아내는 일찍 사별했고 슬하에 외동딸 별이가 있다.
군청 산림계장 영철이 그가 점찍은 사윗감으로 자주 이곳에 온다.
식당에 주방장부터 지배인 격인 태숙, 그리고 송림원 직원들도 많다.
근처에 강사장과 비슷한 연배인 퇴직교수 유석과 강사장과 친분이 많은
철물점 사장인 조경자 여사가 자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다,
이곳에 윤 회장의 손자인 윤산이 친구들과 찾아오고 어렸을 때의 추억이 깃든 
윤산은 모처럼 고향품 같은 이곳에서 감회에 젓는다.
시를 쓰고 음악에도 능한 그를 만난 별이는 자신의 감춰진 꿈을 내비친다.
별이는 체호프의 연극을 보고 배우로서의 꿈을 남몰래 키운 것이다.
피아노를 전공해서 조금 치지만 그걸로 읍내에 피아노학원을 차리라는
아버지의 말대로 해왔지만 연극배우라는 꿈을 처음 보는 남자에게 밝힌 것이다.
다음날 윤산 일행과 같이 산에 올라간 것에 대해 영철은 불안해 술을 마신다.
원래 약한 술을 홧김에 마신 것이다. 그리고 윤산과 별이가 내려왔을 때
낫을 들고 윤산을 죽인다고 행패를 부린다. 그런 영철을 불신하게 되는 별이.
친구들과 하룻밤 더 자고 다음날 일찍 떠나는 윤산 일행.
그를 몰래 포옹하며 보내는 별이.
아침부터 인근 도로공사가 시작되면서... 기대에 부푸는 강사장.
별이의 마음은 멀리 윤산이 떠난 곳으로 가 있다.



작품소개에도 나와 있듯이 체홉의 "갈매기",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벚꽃 동산", 
"이바노프"를 인용한 공연이다. 체홉 작품을 인용했다고는 하지만 러시아 배경이 
아닌 우리나라의 어느 마을에서 벌어지는 얘기로 거의 창작에 가깝다. 
먼저, 체홉작품의 특성을 잘 살려서 우리나라의 상황에 맞게 쓴 글솜씨가 돋보인다. 
원작의 캐릭터와 대사들이 어떻게 반영 되었는지 찾아 보는 재미도 있다. 
체홉 작품의 여러 인물을 합쳐 놓아 100% 일치하지는 않지만 니나는 별이로 
뜨리고린은 산이로 바꿔놓은 캐릭터를 주축으로, 꼬스쨔와 바냐를 섞어 놓은 
성철은 웃음을 주기도 한다. "벚꽃 동산"의 후일담 같은 기초에 여러 작품의
상황이 오버랩 되는 구성이지만 ‘이 작품을 본다는 것은 그 덩어리들과의 만남이다. 

작품을 모두 읽은 사람이라면 그 덩어리가 굉장히 잘 보인다. 

그리고 그것들을 만나는 순간이 매우 즐겁다. 물론 충돌하기도 했다. 

충돌로 인해 등장인물에 대한 또 다른 감정이 잉태됐다. 

타인을 향한 또 다른 시각,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넓이가 깊어지는 순간이다. 

연극 ‘어떤 동산’은 그런 작품이다.



송선호 작,연출 인터뷰 

Q(필자) : 대표님께서는 체홉을 어떤 작가로 생각하시나요?
A (송선호): 저는 체홉을 가장 현대적인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체홉을 가리켜 '리얼리즘 작가'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가장 현대적인 작가이기에 그렇다고 봅니다.

Q: 체홉을 가장 현대적인 작가라고 생각하시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A: 체홉만큼 현대인을 잘 이해한 작가는 없습니다. 아니 사실 비단 현대인뿐만 아니라 어느 때고 인간은 기본적으로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인생은 사실 할 일 없어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특히 현대인은요. 이제는 결코 오이디푸스나 안티고네 같은 일을 겪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류의 사람도 없고요, 체홉 작품은 그련 면에서 현대인들이 공감할 요소가 많습니다.

 Q: 체홉 작품의 어떤 면이 현대인의 공감을 불러올 수 있을까요? 체홉 작품의 특징은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A: 체홉 작품은 주제가 아닌 세부 디테일의 희곡입니다. 체홉은 일상과 일상을 흘려보내는 사람들의 내면을 묘사한 작가입니다. 영화로 치면 우르릉 꽝꽝하는 마블 영화가 아닌 에릭 로메르나 오즈야스지로 감독의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 그런 일상의 미세한 지점을 포착해 내는 것이 리얼리즘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체홉은 같은 리얼리즘 계열의 다른 작가들과도 차별성이 보이는 작가로 입센이 있지요. 하지만 <인형의 집>만 봐도 입센은 주제의식이 강한 편입니다. 고리끼나 스트린드베리같은 다른 리얼리즘 작가들과 비교해 봐도 체홉은 주제의식보다는 디테일 특히, 인물들 간의 언어에 집중한 작가입니다.

Q :생각해보니 스트린드베리 같은 경우도 몇 년 전 정말 크게 유행했던 기억이 납니다. <미스 줄리>같은 경우는 외국 극단이 내한하여 공연까지 했었으니까요.
A: 체홉은 입센이나 스트린드베리 그리고 고리키나 하우프트만과 다른 리얼리즘 작가입니다. 다른 작가들의 작품은 작가가 끈질기에 탐구하여 희곡 안에 심어놓은 명확한 주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연출자가 그 주제만 놓치지 않는다면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 이야기들을 얼마든지 각색하여 공연하는 게 가능합니다. 하지만 체홉의 희곡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주제는 숨겨져 있고 결론은  없습니다.

Q : 그런 체홉의 작품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 건가요?
A : 체홉 작품은 오직 디테일과 정서만이 호흡을 바꾸어가며 희곡의 행간에서 숨 쉬고 있을 뿐입니다. 말(言), 인물들의 말과 대사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에 체헙 작품의 '리얼리즘'을 연출하는 방법입니다.

Q : 체홉 작품의 이해는 작품 속에서 작품에 집중하는 것이군요. 하지만 주제의식도 중요한 것 아닐까요?
A :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오랫동안 답습된 것을 '정통'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리얼리즘'은 그 용어가 주는 뉘앙스 때문인지 연극의 여러 갈래들 중 가장 오래되 정통적인 것이라고 많이들 생각합니다. 연극에서 정통적인 것은 또 그리스 연극이죠. 그러니 고대 그리스 연극은 神에 바치는 제사 같은 것입니다. '리얼리즘 연극'은 인간에 대한 '바라봄'이고요. 그렇기에 인위적이고 억지스러운 주제와 메타포는 오히려 리얼리즘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제가 여태 본 가장 최악의 체홉 공연은몇 년 전 <갈매기>였습니다. 일단 지나친 무대 장치가 눈에 거슬리더군요. 역시나 거대한 무대 장치에 맞게 너무 큰 주제의식과 서사 구도에 진정한 체헙의 매력이 다 죽었던 공연이었습니다.

Q : 대표님께서는 그러면 <어떤 동산>을 각색하실 때 어떤 부분은 중점으로 감안하여 각색하셨는지요?
A: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체홉 작품의 매력은 말(言)입니다. 등장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만큼 연극에서 더 디테일한 요소가 어디 있겠습니까. '한국형 리얼리즘 연극'을 표방했기에 원작의 언어를 어떻게 한국적인 언어로 맛깔나게 살릴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말의 특징 중 하나가 정곡을 한 번에 찌르기보다는 빙빙 돌리고  돌리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말의 특징을 최대한 반영해 대사들을 번역-각색했습니다.

Q: 체홉 작품의 '리얼리즘'은 '디테일'에서 비롯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동산>을 각색하실 때 배우들의 대사 말고 또 어떤 다른 디테일을 신경쓰셨는지요.
A : 연극이니까 당연히 무대 장치를 신경 안 쓸 수 없지요. 다만 체홉 작품인만큼 너무 관객을 압도하는 장치는 아니라는 겁니다. 참고로 제가 <어떤 동산>을 각색할 때 한국적인 리얼리티가 뭐가 있을까 생각을 했고 세 가지를 결론을 냈습니다.
첫째가 아까 말씀드린 한국어 특유의 말의 특징, 빙빙 돌리거나 주절주절 말한다. 둘째가 감정의 공유. 타인 감정에 쉽게 공감하는 정(情). 그리고 셋째가 바로 길(路)입니다. 가장 한국적인 길. 바로 골목길입니다. 버섯이나 고추를 말려놓는 길. 옆에서 지키지 않아도 아무도 훔쳐 가지 않는 그 길. 그래서 술병이 널부러져 있는 캠핑장 컨셉으로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체홉 연극은 이러한 디테일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 체홉의 작품을 어떻게 바라보시고, <벚꽃 동산>을 어떤 기준으로 각색하셨는지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극에서의 '리얼리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좋은 기회였습니다.
A : 감사합니다. 체홉의 작품은 매년 쉽게 연극으로 접할 수 있습니다. 체홉 연극에 많은 관심 가져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송선호 작,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