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한길 '임대아파트'

clint 2026. 1. 13. 14:35

 

 

정호는 배우다. 정호의 친구 재생은 시나리오 작가다. 그 사실은 아는 사람만 안다.

정호의 여동생 정현은 과거 재생의 연인이었다. 정현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된다.

재생은 자신에게서 떠나는 정현을 과거에서 붙잡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날 재생은

자신의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영화사 사장의 제안을 받게 된다.

재생은 자신에게서 떠나는 정현을 현재에서 붙잡고 싶다. 재생은 정현과의 과거가

추억만으로 다가설 수 있는 시간이 아니며 현재의 정현이 자신에게서 떠나기 위해

결혼을 선택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하지만 과거는 추억이며 다른 사람을 선택한

정현은 떠나는 사람이다. 재생의 친구 정호는 배우이다. 정호에게 배우는 꿈이며

현실이자 인생을 건 도박이다. 대부분이 그렇듯이 도박에서 따는 놈 없고 꿈만 먹고

살 수 없으며 현실은 냉혹하다. 정호에게 재생의 시나리오가 영화가 된다는 것은

꿈을 현실과 한데 묶을 수 있는 숨죽인 도박사의 희망이다.

정현과 정호, 두 사람이 남매란 사실을 처음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의아해 한다.

정현은 재생의 옛 연인이고 재생은 정현의 첫 사랑이다. 정현은 자신을 밀어내는

재생에게서 떠날 수밖에 없었고 사회적 현실적 자기적 기준에 알맞은 사람을

배우자로 마음으로 선택한다. 이후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재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재생에게 다시 다가서려 하지만 자신을 밀어내는 재생에게서

정현은 똑같은 갈등을 한다. 재생이 자신을 진정 사랑하기에 밀어내는 것인지

스스로를 포기한 나약한 인간인지 그래서 사랑조차 현실이 되어버린 자기를 닮은

사람인지 정현에게 재생은 현실이자 사랑이다.
정수는 정호의 여동생인 정현의 남동생이다. 시로는 정수와 사랑하는 일본 여자다.

한국으로 관광을 왔던 일본인 시로. 정수와의 우연한 만남. 그리고 시로의 귀국.

말도 통하지 않는 시로와 정수의 국제 통화로 현해탄을 건너 둘은 사랑을 키운다.

정수에 대한 그리움에 현해탄을 건너오는 시로. 며칠만에 발표하는 둘의 결혼 약속.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의 사랑. 사랑이라기에 이해도 되는 둘의 사랑.

정수와 시로에게 사랑은 착각이고 환상이며 둘 만의 하나 된 기준일 수 있다.

사랑은 어쩌면 그런 것 일 수 도 있다.       

 

 

 

 

이 극의 공간은 서로 친구 사이인 정호와 재생의 각기 다른 임대아파트다. 
평수도, 구조도, 가구도 똑같은 낡은 두 임대아파트를 교차시키면서 삶의

대체 가능성, 현실과 허구의 이중적 내러티브를 교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극은 사랑과 소통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통속적인 방식으로 그려낸다.

옷가게를 하며 재생을 뒷바라지 해온 정현과 재생의 사랑은 시나리오 내용으로

재생됐을 때는 통속적이 되고 만다. 일부러 정전을 시켜놓고 정현을 아파트로

끌어들이는 재생이나 지나치게 순진성을 연기하는 정현의 모습, 인공유산한

정현에게 미역국을 먹이면서 눈물을 흘리는 재생의 모습은 낯익은

대중예술의 상투성을 모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통속적이다.

현실과 허구가 서로를 거울처럼 모방하는 이중의 내러티브가 뒤섞이다 보니,

관객은 사랑의 순수함과 ‘연기하는 사랑’ 혹은 통속적 서사로 쓰여진

허구(시나리오)를 구별해내지 못하게 된다.  
정수와 일본인 유까의 사랑은 만난 지 얼마 안돼 불같이 타오르는,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이다. 이들은 말은 잘 안 통하지만 마음은 소통한다.

아니, 서로 외국어로 말하고 적게 알아듣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정현과 재생이 서로 너무 많은 말을 하고 너무 많이 서로에

대해 알기 때문에 싸우는 것과 대조적이다.  

 

 


정호의 사랑은 환상 속의 사랑이다. 재생과 정현의 사랑이 현실의 시간들이

쌓여감에 따라 지리멸렬해지고 바래가고 종말을 향해 치닫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정호의 사랑은 애인이 죽어 환상 속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사랑의 정점에

머무른 채 이상화된다. 즉, 사랑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 선영이 죽음으로서, 현실의

치명적인 공격을 받지 않은 그들 사랑은 환상의 아름다운 채색으로인해 이상화된다.

김한길의 <임대아파트>는 일상을 세밀하게 그리면서 현실과 허구가 서로를

모방하는 두 겹의 공간 속에 3쌍의 사랑을 그린다. 이러한 구도는 이미

<춘천 거기>의 반복으로, 작가는 ‘춘천’이라는 공간이 환유시키는 청춘 세대의

초상을 인상적이고 성공적으로 그려낸 바 있다. <임대아파트>역시 재치있는

구성과 유머감각, 삶에 대한 긍정을 인상적으로 보여주지만, 전작의 성공에 기댄

반복이라는 점에서 참신성이 좀 떨어진다. 일상의 극사실적 재현이 단순히 인물들의

사적인 일상의 엿보기 차원에 머문다면 관객에게 던지는 사유의 울림이 부족하다.  

 

 

김한길
“춘천 거기”의 히트로 김한길은 백만원 연극 공통체의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
그는 작가, 배우, 연출, 모든 것이 가능한 멀티플레이어다.
일상의 치밀한 묘사와 거기서 오는 감정, 심리적 변화를 예민하게 잡아내는 그의 감각은

또래의 작가, 연출가에 비해 괄목할만하다.
연출<청국장><자전거><사랑의 피아노><장군슈퍼><춘천거기><슬픔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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