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창극 호남벌의 북소리

clint 2026. 1. 13. 09:09

 

 

1장. 전라 태인현 종성리 마을의 한 노모의 고희연잔치가 벌어지고 마을이 흥겹게 
축연으로 노는데 이 마을의 봉남과 순임도 함께 한다. 어릴 때 부모가 돌아가셔
이 집 저 집에서 키워진 봉남, 양반가문 출신인 순임의 만남이 순탄치 않을 듯하다.
지나가던 남루한 복장의 농부1도 마을 사람이 불러 한 상 받고 술 한잔과 배불리
먹는데... 그가 동학잔류군 소식도 전한다. 일본군과 관군의 합세해 공격해 거의
전멸했고 자신은 간신히 도망나왔다고. 이때 총소리가 들리며 일본군과 관군이
들이닥치자, 농부1은 재빨리 도망가다 잡히고, 임병찬도 등장해 사태를 무마시킨다.
동학군에 우호적인 이 마을 사람은 농부1이 여기 사람이라고 보호해준다.
모두 물러가자 임병찬은 마을 남자 몇을 불러,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무기를 
구입하라고 지시한다.

 

 


2장 어전이다. 고종을 둘러싼 대신들과 일본 외교단은 민비 퇴출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한다. 고종은 거부하고, 얼마 후, 민비는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당한다. 

고종과 태자도 강제 단발을 당하고, 충신들은 모두 격리되고, 

친일세력만 남아 고종을 협박한다. 민영환의 자결소식이 들린다.

 

 


3장 종성리. 임병찬의 준비로 무장한 항일 부대를 만들어 훈련하여 출정준비를 한다.
정병 양성을 한 것이다. 임병찬과 교감이 있던 우국지사 최익현도 종성리의 정보를
알고 때를 기다린다. 봉남과 순임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서로 격려한다. 

관군의 한정위도 일본군의 무력에 대립하다 물러나 임병찬과 서로 정보를 주고 받는다.
이제 이들도 항일노선에 합류한 것이다.

 

 


4장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준비한 임병찬은 첫 봉기에서 일본군에 승전한다.

많은 일본군 무기도 노획한다. 의정부 찬장 최익현의 방문으로 의기를 투합하고

태인군수도 그들의 무기를 지원한다. 게다가 동학군이었던  농민1도 몇몇과 합세한다.

 

 


5장 궁전에서는 친일 대신들이 최익현과 임병찬이 전북 태인에서 구국한다는 구실로

도당을 모아 역모하고 있다고 대책을 결의하여 즉시 해산조칙을 모의한다.
거기에는 고종의 명령으로 해산하거나 잡아들이라는 계락도 들어있다.
6장 순창동헌. 이곳에 있던 의병대와 최익현과 임병찬에게 관군들이 대치하며 해산조칙이 

하달한다. 같은 민족끼리 총칼을 겨눌 수 없기에 의병들을 해산하고 

최익현과 임병찬은 패전 포로로 잡힌다. (본인들만 희생하고 

의병조직은 허위 해산으로 비밀리에 건재하게 된 것이다)

 

 


7장 대마도 위술령. 포로로 끌려간 곳이다. 최익현의 자결하여 충정을 다했고, 

얼마 후, 임병찬은 사면 된다. 다시 오는 도중 농부1을 만난 임병찬은 그가 같은 

고향인 임을 알게 된다. 그의 예사롭지 않은 생각과 행동을 전부터 느꼈던 것이다.
다시 임병찬이 의병조직을 키운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군은 관군과 합세해 

쳐들어온다. 그러나 이번에는 관군들이 대거 빠지고 거의 일본군이라는 소식을 들은 

임병찬은 전 의병들에게 결전을 독려한다. 관군이었던 한정위도 여기에 합류한다. 
그리고 기나긴 정투가 시작된다.

 

 


8장 교전의 휴전속에 임병찬은 봉남과 순임을 불러 북간도로 갈 준비를 지시한다.
가서 혼인하고 거기 독립군에 합류하여 앞으로 대한독립을 위해 싸우라고 당부한다.

곧바로 전투가 시작되고 봉남이 적군의 총앞에 몰리자 농부1이 대신 막아 죽어가는데...

그 농부1이 바로 봉남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동학군 최후의 전사였던 것이다.
물러난 적군이 다시 공격하기 전에 봉남과 순임을 보내는 임병찬. 울며 떠나는 

둘을 보내고 다시 전투가 시작 될 때 막이 내린다.
 



1995년 8월 25일, 창무극 ‘호남벌의 북소리’(국립극장)로 서울나들이를 했다. 태인 출신 

의병장 임병찬의 일대기로, 김승규 대본, 박병도 연출, 류장영 창작곡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을 일으킨 임병찬의 투쟁활동을 판소리와 

여타 민속예술로서 표현해낸 작품이다. 전라도에서 뜻을 펼쳤던 인물의 의기를 그 지역의 

후예들이 재창조해내 서울에서까지 공연한 것이다. 서울과 지방문화의 상호교류라는 

차원에서, 또한 지방의 창극공연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던 공연이었다.

물론 역사적인 사실과 드라마가 합쳐진 내용이지만 누구나 쉽게 느끼고

감동할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임병찬
1888년 호남에 대흉년이 들자 11월에 1,000냥을 내어 구휼주4하고, 이어 3,000냥과 조(租) 70석을 내어 백성을 진휼주5하였으며, 다음 해 징세(徵稅)할 때 1석에 25전의 저리를 받아 백성을 구하였다. 그 결과 1899년 호남의 선비들이 임병찬의 공을 추천하여, 2월에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의 직첩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樂安郡守兼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에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1894년 12월 1일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김개남(金開男)을 고발함으로써 12월 4일 김개남이 처형되었다. 개항기 때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 등을 역임하고 국권 피탈 이후 의병에 가담하여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한 독립운동가이다. 1906년 2월 최익현(崔益鉉)과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같은 해 6월 순창전투에서 최익현과 함께 붙잡혀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 1912년 9월 고종의 밀조(密詔)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도 순무대장(巡撫大將)에 임명되었다. 1914년 2월 독립의군부를 전국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의군부를 만들었다. 같은 해 5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거문도로 유배되었고, 1916년 5월 유배지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임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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