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강백 '물거품'

clint 2025. 12. 3. 12:21

 

 

어느 날 비오는 광장의 물거품을 바라보던 그는 자신이 그녀의 전남편을 
살해할 때 생긴 물거품이 연상되어 그녀에게 사실을 고백한다.
이 사실에 충격을 받은 그녀는 연못이 있는 별장으로 떠나버린다.
'그'는 '나'에게 자신의 아내를 연못에서 데려오도록 부탁한다.
이에 그녀가 거절한다.
그는 자신의 라이벌 정치인이 자신을 전남편의 살해자라고 고발하자 
두려워하며 그녀를 증인으로 채택하여 재판을 벌리려고 한다.
다시 한 번 '나'에게 부탁하여 연못에서 그녀를 데려오도록 한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의 젖을 받아 마시고는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녀는 연못에서 자살로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現남편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될 것이며, 

살아있는 모든 삶은 계속된다.
여기서 존재하는 '그'가 바라보는 시각은 거울의 세계처럼 존재것만 비춰보이고 
없는 것은 철저히 배재해버리는 세계이다. 따라서 죽은 전남편은 없는 것이며, 
현재 존재하는 자신만 사랑하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그녀는 연못의 세계에 살고 있다. 없는 것도 받아주는 완전한 세계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거품'은 우리 시대의 상황을 풍자한 희곡으로 작가 이강백의 독특한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금방 나타났다 사라지는 물거품이 작품 전체에서 인물들의

의식을 지배한다. 물거품은 연극 속에서 주인공이 아내의 전남편을 연못에 빠뜨려

살해한 뒤 물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다 곧 사라지는 것으로 이 연극에서 중층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삶이 곧 이 물거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남편의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기억(물거품)은 현실주의자인 남편에겐 쉽게

사라지는 대상이나 과거의 환영에서 떠날 수 없는 아내에겐 처절한이미지가 된다

연못 깊은 바닥에서 솟아나와 수면에 떠오르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지는 물거품에

인간의 삶을 비유한 지품이라 하겠다.

 

 

 

연극 <물거품>에서는 사실을 안 아내는 그 호숫가로 은둔하여 물거품을 바라보며 그 의미만을 생각한다. 남편은 변호사, 유모, 감시꾼들, 심지어는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아내를 세상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하나 별 소득이 없다. 남편은 아내를 연못에서 끌어내기 위해 자신을 고발한 후, 아내의 선택을 재촉하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오히려 재판을 서두른다. 재판의 증인으로 어떤 진실이건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재판날, 그녀는 스스로 호수에 몸을 던져 물거품이 된다. 現남편의 삶은 계속될 것이다. 
아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현남편과 전남편은 두 개의 세계로 영원한 이율배반으로 우리의 주위를 맴돈다. 사라지고 없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 주장하는 당연한 권리와 정의와 기억의 공간과, 현재에 존재하는 살아있고 채우는 모든 것들의 생명과 번식력과 그 당위성이 갖는 정당성 사이에서 우리는 영원히 방황하는 것이 아닐까? 심연의 깊은 바닥에서 솟아나와 수면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물거품처럼, 우리의 존재나 삶도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이 사실을 일부러 외면하고 이해하지 않으려고 억지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음식을 먹으며 더 잘 산다고 바둥거린다 -그래도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삶과 존재의 법칙이던가? '물거품'은 섬세하다. 인간의 삶 또한 그렇다. 섬세한 사람들만이 인생을 이해한다. 거친 사람들은 결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 그러나 이강백은 여기에 멈추지 않고, 과연 살아있는 것, 보이는 것, 존재하는 것들이 삶인가를 묻고 있다. 소위 이 '현실성' 때문에 우리는 바로 삶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 것이다. 관객에게 다시금 삶의 본질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거울과 연못에게 바친다 - 이강백 작가
<물거품>- 이 연극을 거울과 연못에게 바친다. 거울을 바라보면 마음이 불안하다. 거울은 오직 있는 것만을 비춰보이기 때문이다. 없는 것은 단 하나도 보여주지 않는 것이 거울의 세계이다. 즉, 거울의 세계는 있는 것만을 받아줄 뿐 없는 것은 철저하게 거부한다.
연못을 바라보면 불안했던 마음이 안정된다. 연못은 있는 것과 함께 없는 것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예가 물거품이다. 물거품은 연못의 저 깊은 밑바닥으로부터 솟아나와 수면 위에서 사라진다. 연못의 세계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한몸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거울일까? 아니면 연못일까? 그 질문에 대한 서투른 대답으로 <물거품>을 썼다. 
<물거품>은 옛날에 있었던 한 사건에서 착상을 얻었다. 그 사건은 이렇다. 소나기가 오는 날 지붕 밑에 떨어지는 낙수물이 보글보글 물거품을 만들고 있었다. 그 물거품을 마루에 앉아 바라보던 남편이 소리내어 웃었다. 아내가 궁금해서 그 웃는 이유를 물었다. 남편은 대답했다. "내가 당신의 전남편을 죽였소. 강으로 헤엄치러 가자고 유혹해서 죽였는데, 물속에서 숨이 넘어가며 저런 물거품이 보글보글 생겨나던 꼴이 생각나서 웃었소." 그러자 아내는 남편을 관가에 고발하여 사형을 받게 하고, 자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을 두고 세상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아내의 행위를 열녀라고 칭송하는 사람들과 열녀가 아니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만약에 지금 그와 같은 사건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열녀냐, 아니냐는 유교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대의 판단기준으로서,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지금 우리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없는 것은 없으며, 있는 것만이 있는' 유물주의이다. 우리는 있는 것만을 존재하도록 없는 것은 철저하게 살해해버린 거울의 세계를 만들었다. 우리는 바로 그 세계 속에 살면서, 소나기가 쏟아지는 날은 물거품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웃어대는 사람들이 되었다. 우리가 있는 것의 가치만큼이나 없는 것의 가치에 눈을 뜨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그 살인적인 웃음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결국은 그렇다. 우리는 연못의 수면 위에 잠시동안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물거품이다! 

 

이강백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