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하신또 베나벤테 '이해관계'

clint 2025. 7. 5. 05:42

 

 

떠돌이 사기꾼 잘생긴 레안드로와 지략가 끄리스삔.

여러 곳에서 쫓기다가 빈털터리로 한 마을에 당도한다. 

마을의 부유한 모습을 보고 크게 한몫 잡을 계략을 짜낸 끄리스삔은 

반반한 외모의 레안드로를 밀명을 수행하러 온 귀족으로 둔갑시켜 

마을 사람들을 하나둘 끌어들인다. 

호텔주인과 몰락한 학자, 장군 등이 이들의 언변에 넘어가 

돈과 시와 칼을 갖다 바치고, 
마을엔 점차 이 '신비에 싸인 귀족들'에 대한 소문이 퍼진다.
마을 최고의 부자 뽈리치넬라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끄리스삔은 
뽈리치넬라의 외동딸인 실비아의 교육을 맡은 시레나부인을 찾아가 
레안드로과 실비아의 중매를 서줄 것을 제안하고 거액의 사례를 약속한다. 
그러나 시레나부인이 여는 연회에서 실비아를 만난 레안드로는 

계획과 달리 정말로 사랑에 빠져버리고 마는데...

 

 

 

하신토 베나벤테 Jacinto Benavente, 1866-1954)는 20세기 초 스페인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로 150여 편에 이르는 작품을 무대에 올렸으며 19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낭만주의풍 연극이 성행하던 당시 구시대적인 무대장식을 몰아내고 생기 있는 대화. 세심한 관찰, 자연스러운 장면 전환, 극적인 리듬 유지, 사실적 재현 등을 통해 스페인 연극을 한 차원 근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1907년 상연된 <이해관계(Los intereses creados)>는 베나벤테의 대표작으로 유럽의 전통적인 소극(farce)을 근대적인 형태로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기발함. 반전, 재치, 웃음, 풍자 등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유쾌한 웃음의 이면에 물질주의적 세태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담아내어 스페인 근대 연극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의 다른 작품들이 비평가들의 상반된 평가 - 혁신적 또는 구태 적- 를 받는 반면, 『이해관계』는 거의 모든 비평가들에 의해 20세기 스페인 연극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고 또한 노벨상 수상의 계기가 된 작품이다. 그 덕분에 동시대 극작가인 가르시아 로르카. 바예-인끌란의 작품들과 함께 오늘날까지 스페인 대도시의 극장 무대에 단골 레퍼토리로 공연되고 있다.

 

 

 

『이해관계』는 유럽의 전통적인 소극 장르를 근대적인 형태로 발전시킨 작품이다.
소극 특유의 기발함, 반전, 재치, 웃음, 풍자 등이 돋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박하거나 저속함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 이 작품의 미덕이다. 멀리 그리스와 로마 희극에까지 그 기원을 두고 있는 소극은 스페인에서도 대표적인 민중 장르로서 중세 이래로 확고한 전통을 이어 왔는데 이는 민중의 삶과 물질적 세계를 대변하며 자유로운 광장의 언어를 사용한 덕분이기도 하다. 중세 이후에는 '꼬메디아 델 아르떼' 라고 하는 16세기 이탈리아에서 발전된, 보다 유형화된 소극이 유행하기도 한다. '꼬메디아 델 아르떼'는 '직업적인 연기자들의 코미디'라는 의미로서 직업배우들이 연기하는 즉흥코미디를 말한다. 여기에는 유형화된 인물인 알레낀, 뽈리치넬라, 빤딸로네, 도또레 등이 등장하는데, 『이해관계』에서도 역시 이러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꼬메디아 델 아르떼' 에 등장하는 유형화된 인물들은 『이해관계』의 구체적인 서사 맥락 속에서 강력한 상호 텍스트성의 효과를 자아내고 있고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의 시공을 초월하여 관람할 수 있는 ‘거리두기'의 효과도 만들어 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돋보이는 인물은 단연 끄리스삔이다. 서문에서부터 작자의 분신으로 등장하는 이 인물은 세상을 보는 통찰력과 지략에 있어 다른 등장인물들을 압도하며 시종일관 사건을 계획하고 문제들을 해결해 가는 능동적 주체의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그는 의식의 수준면에서 작자의 바로 밑 층위에 위치하여 자신보다 하위 층위에 위치한 나머지 인물들을 실에 묶인 인형을 다루듯 조종하고 있다. 갤리선 승선, 방랑 생활 등 사회의 밑바닥 경험을 통해 세계의 '하부 구조'를 이해하고 철두철미하게 물질주의적 세계관에 따라 행동하는 이 인물은 스페인 특유의 문학 장르인 '악자 소설'의 주인공과 매우 닮아 있다. 게다가 레안드로와 끄리스삔의 관계처럼 이상주의적 주인과 물질주의적 하인이 대비되는 상황은 『돈키호테』의 설정과 유사한데,『돈키호테』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세계는 다른 한편의 철저한 현실 인식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이해관계』는 형식적으로는 이탈리아 전통의 극형식을 계승한 것이지만, 인물이나 주제 면에서 보자면 스페인 문학의 전통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해관계』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로서 추상성과 이상성에 대해 물질성과 육체성이 부각되는 것은 다분히 카니발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천한 신분의 떠돌이 모험가 레안드로와 끄리스삔이 갑작스럽게 신분상승하는 것은 바흐친이 말한 카니발적 세계의 전복적 원리인 “뒤집고 거꾸로 만드는 논리”로서 상부와 하부가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귀족 행세를 하는 뽈리치넬라가 과거에는 비천한 신분의 인물이었다는 것이 폭로 되 는 것, 현자 행세를 하는 법학박사가 순식간에 돈의 논리에 굴복 하여 자신의 기소장을 스스로 뒤엎는 행위에도 잘 나타난다. 그러나 레안드로가 표상하는 이상주의적 세계관의 우유부단함과 무의지성 그리고 끄리스삔으로 대표되는 물질주의 세계관의 냉혹함과 비인간성으로 인해 작품 전체의 색조는 다분히 회의주의적이고 염세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은 당시 스페인 사회의 주류 지성인 그룹이었던 98세대의 세계관과 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베나벤떼는 98세대의 결성 초기에 이 세대의 멤버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해관계』가 이탈리아 기원의 소극 형식을 차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문학의 전통을 포함 하는 것도 98세대 특유의 국수주의적 집착증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베나벤떼에서 시작된 근대적 형태의 소극은 20세기 초 스페인 연극 혁신의 움직임 속에서 동시대 극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가르시아 로르카, 바예 인끌란 등 많은 작가들이 이러한 소극을 창작하였고 그 영향은 내전 후 미겔 미우라, 하르디엘 뽄 셀라 등의 '해학 연극'외 전통으로까지 이어진다. 또한 근대화된 소극은 스페인 영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이를테면 루이스 베를랑가, 뻬드로 알모도바르 등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꼭두각시 같은 인물들과 그들을 둘러 싼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은 바로 이러한 소극 전통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리얼리즘에서 멀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현실에 대한 비판의 시각을 견지하는 것이 소극 장르의 미덕인데, 「이해관계」는 민중적 전통의 소극 형식을 세련되고 근대적인 형태로 발전시킴으로써 유쾌한 웃음의 이면에 물질주의적 세태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그 근대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평가 덕분에 『이해관계』는 작가에게 노벨상을 안겨 줄 수 있었으며 스페인 근대 연극의 대표작으로 자리 매김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