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막스 프리쉬 '전기(傳記)-하나의 유희'

clint 2015. 11. 10. 15:19

 

 

 

 

 

작품은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1960년 안토와네트를 만난 어느 날 밤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고, 2부는 그 다음 날부터 시작된다. 1960년이 중심에 위치하며 그 전후를 오가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무대 위에서 실현되는 가장 오래된 전기적 사건은 10세의 로츨러가 등장하는 때이며, 마지막 시간은 1967년 6월의 어느 날, 기록자가 큐어만에게 3주 전에 수술을 받았다고 말하는 시점이다. 작품의 시간 영역은 따라서 이 두 시점 사이에 존재한다. 연극은 그 사이를 왕래하면서 중단과 반복을 수없이 되풀이 하면서 변형된 것들과 변형되지 않은 것들이 서로 뒤섞이면서 진행된다.
전반적으로 연극의 초점은 ‘안토와네트가 없는 전기’에 모아진다. 그 때문에 그들이 처음 만나는 장면의 변경이 새로운 전기 선택의 핵심으로 취급된다. 작품은 1960년 5월 26일 늦은 밤 교수취임 축하파티가 끝난 후 그들이 만나는 장면이 반복되면서 변경이 시도된다. 그러나 계속 중단되면서 반복되는 서투른 피아노 소리와 늘 똑같은 춤을 추는 음악시계 이야기는 결국 반복으로 끝나는 큐어만의 선택을 암시한다. 이러한 시도가 번번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다시 그 사건 이전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변경을 시도한다. 초등학교, 사춘기, 어머니의 죽음, 군대, 다시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에 대한 기억. 10세 때 겨울, 초등학교시절, 로츠라는 별명을 가진 로츨러와 눈덩이에 대한 기억, 체조학교에서 교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놀림을 당함. 그러나 33년 후 1960년에 실제로 교수가 되고, 1927년과 1960년에 있었던 이 두 사건이 시간적인 선후의 구별 없이 대칭적으로 동시에 전개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동시에 그것과 대비되도록 가운을 입은 사람들, 증서를 들고 있는 총장이 같은 장소에 함께 등장한다. 미국에 머무르고 있는 퀴어만은 그 순간 헬렌을 잃게 될까 두려워 유럽에서 외롭게 죽어가고 있는 어머니에게 갈 수 없다. 이 사건들이 서로 뒤섞여서 묘사된다. 장소와 시간의 객관적 흐름이 지양된다. 무대는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유럽의 병원이면서 동시에 큐어만과 헬렌이 있는 미국이다. 다시 1934년 아버지가 등장하면서 17 번째 생일에 사준 자전거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갑자기 로츨러가 실명을 하게 된 눈싸움, 그리고 다시 병석에 누워있는 어머니가 등장한다. 미국의 아들이 어머니에게 보낸 빨간 장미 이야기(나중에 병상에 누워있는 큐어만에게도 미국에 있는 아들 토마스로부터 똑같이 빨간 장미가 배달됨). 1940년 봄 군복무를 위해 유럽으로 돌아온다. 카트린과 만나 결혼. 아들 토마스에 대한 기억과 다시 병석에 누운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대비된다. 간호사, 의사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 그러나 퀴어만은 그 순간 헬렌과 있다. 1940년 4월 14일 아주 우연하게 국경 초소의 초병에게 질문하였기 때문에 유태인 가족을 구하게 됨. 다시 헬렌과 큐어만의 이야기, 헬렌은 자신이 혼혈이기 때문에 결혼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라고 큐어만을 비난한다. 그러나 한편 유태인의 입장에서는 퀴어만은 유태인을 구한 선량한 사람이다. 두 사건이 대칭적으로 묘사된다. 로츨러가 눈덩이에 맞아 왼쪽 눈을 가리고 달아나는 바로 그 순간 어머니의 시신이 운반되어 가고, 결국 헬렌의 보트는 사라진다. 1949년 카트린에게 죽어버리라고 폭언을 했는데 실제로 자살함. 그 결혼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서로 알지만 결혼은 이루어지고 나중에 카트린은 자살한 것이다. 그러나 아들 토마스가 그대로 있기를 원하기 때문에 카트린과의 결혼을 되돌릴 수 없다. 모든 기억들이 동시적으로 의식에 떠오르지만 무엇을 어떻게 변경시킬 것인지 간단히 결정할 수 없다. 그러는 사이 점점 더 많은 과거 기억들이 의식 속에서 뒤섞인다.
1부는 결국 큐어만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첫 장면을 똑같이 반복하면서 끝나고, 2부는 안토와네트를 만난 다음 날 아침부터 시작된다. 과거의 많은 것들이 현재화하면서 변경된 것과 변경되지 않은 것들이 서로 어지럽게 뒤섞인다. 그러나 변경된 것은 극히 사소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큐어만의 죽음이 임박하고, 그에 의한 삶의 변경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기록자는 뜻밖에도 안토와네트에게 선택을 맡긴다. 연극은 다시 7년 전으로 되돌아가 교수취임 축하파티가 끝난 다음의 상황이 반복 시연되고, 안토와네트는 주저 없이 다른 인생을 선택한다. 큐어만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우연을 통해 다시 7년 전으로 돌아가 7년 동안의 ‘안토와네트가 없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1961년 6월 안토와네트와 결혼했던 그날부터 암으로 죽음이 임박해 있는 1967년 6월까지 그에게는 다시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변경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품은 다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 놓으면서 끝난다.

 

 

 

 

 

 

 

『전기: 어떤 유희 Biographie: Ein Spiel』는 이미 그 제목에서부터 이 작품이 얼마나 시연의 특성에 가까이 서 있는가 하는 것을 표현해 주고 있다. 시연 시의 환상적인 경험을 실제 공연 중에서도 유지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는 “실험 상황을 극 이론으로 흡수함으로써 즉 줄거리 자체를 가변적인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가능케 되었다. 가이서(Geisser)가 효과적으로 분석했듯이 이러한 줄거리의 변화가능성, 상대성은 또한 관중들에게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하는 데에도 탁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는 변화를 통해 줄거리 자체가 궁극 성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연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반복이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 있으며, 부분적인 변화를 준 비슷한 상황이 반복됨으로써 시연은 비로소 의미가 있을 것인바, 반복할 수 있다는 전제가 성립해야만 현재 무대 위의 사건은 궁극적, 강요적, 필연적, 일회적인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무대는 자신을 절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반복을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시도해 보는 과정으로 나타나고 있다. 시연의 극은 이제 계기적 시간의 밖에 존재하게 되고, 시간의 반복이 되며 결국 반복의 극으로 귀결되어지고 만다. 『전기: 어떤 유희』가 취리히에서 초연될 당시 발간된 프로그램 책자에서 프리쉬는 이러한 시연, 반복을 연극의 근본이라고까지 선언한 바 있다.
연극은 현실이 허용하지 않는 어떤 것을 허용한다. 이는 즉 반복하는 것, 시연하는 것, 변화시키는 것이다.
막스 프리쉬의 실험적 희곡 '생의 전기 : 하나의 유희' 는 영화에서 본 삶의 수정이라는
테마를 보다 연극적, 실험적으로 드러낸다. 주인공은 자신의 삶 중 한 부분을 고치고자 계속 비디오테이프 되감듯 반복하지만, 상황의 집행자 격인 서기는 이리저리 토를 달며 삶의 수정을 원하는 주인공의 논리적 오류를 짚어낸다. 상황을 바꾸고 싶지만 그것은 완전히 지워지는 것이 아닌, 그 수정의 과정 또한 삶이라는 긴 비디오테이프에 또다시 기록되고 마는 과정인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와 같은 개념이 현실적으로 불가한 상황에서 벌이는 주인공 큐어만의 실험은 그래서 조금은 혼란스럽고 조금은 막막한 과정이다. 악보에 적힌 음악을 연습하는 마냥 자신의 삶을 무대 위에서 다시 실험하고 있는 주인공 큐어만, 흐트러진 시간의 악보 속에 그의 의지는 어떤 결과를 이끌어내게 될까?

 

 

 

 

 

막스 프리쉬의 작가후기
연극에 대하여 상당한 노력을 경주해 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모든 역사의 임의성에 대한 문제는 어떤 도그마 속에서 지양되지도 않은 채 해답을 구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 때문에 이 문제는 나에게 설명을 강요하고 있다. 설명은 해설이다. 그러므로 나의 주제와 내가 실무에서 익혀온 연출학은 동행하지 않는다. 이를 위기라고들 말한다.
이는 또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연극만이 나를 당황하게 하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연극만을 원한다. 그런 경우는 실험 중에 생긴다. 정확히 말하면 초기의 실험에 더욱 그러하다. 최소한 순간에 있어선 무엇인가 일어난다...... 그러나 그건 흔히 말하듯이 한때의 순간이다. 성장하게 되면 맞지 않는 옷을 버리듯이 이런 순간은 연극에 의해서 다시 버려지는 것 같다.』
실험이 매혹적일 수 있는 데 반해 완전한 상연이 때로는 지루한 감을 준다. 과정의 변화가 결정적이고 유일한 틀 내외 과정보다 더 많은 것을 시현한다.
『감명을 주기 위하여 단지 이렇게만 진행될 수 있다는 우화는 고전의 유산으로 우리에게 형식을 강요하는 접합의 연출 학이나 급선회의 연출 학에 만족을 줄 것이다. 그러나 연극적인 공식에 만족을 주는 것처럼 지루한 것은 없다. 이는 이미 우리가 신뢰하지 않는 연극의 규칙일 뿐이다. 그 대신에 우리가 연극에서 인식하고자 하는 것은 실존적 경험이며 바로 이것이 그런 형식을 배제하는 것이다.』 『꼭 이래야 되며 확고하게 실증을 제시하는 고전적인 접합의 연출 학을 배제하는데 과학적 이론까지 도입할 필요는 없다. 어떤 분야에 있어서든 예술이라는 것은 의미를 억지로 종속시킬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오래 진부터 인정되어 온 것이다. 어디에서든 의미를 체험하지는 못한다.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그 반대이다. 어떤 일이 발생한다. 마찬 가지로 가능할 수도 있을 다른 일은 발생치 않는다. 본래 유일한 행위 또는 실수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지막 장에서 보여주는 것은 급선회하여 억지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연의 총화로서 발생하는 것이다. 급선회가 설령 없다고 하더라도 역사가 존재하고 시간이 있음으로 해서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게 설정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이런 우화가 동일한 인물의 설정으로 아주 다른 우화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미 역사가 되어 버린 이것과 다른 파티, 그것이 전기일 수도 있으며 세계사일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연극적 변화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다른 결과를 배제하고 그 자체에 의해 진행되는 결과는 그 과정에 적절치 않은 의미에 종속되고 만다. 이는 바로 그런 허위성으로 지루한 감을 준다. 위장된 것은 의미화의 경향을 가지나 체험을 한 것은 그렇지가 않다』
이런 이유에서 모든 접합의 연출 학을 꾀하면서 무대를 완전히 방치하는 해프닝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도들이 계속되며 극장 자체를 지양한다. 동시에 우리는 접합의 연출 학을 사용치 않고 극장을 이용하여 이러한 시도를 계속할 것이다.
모든 역사의 임의성에 관한 문제는 물론 神과의 문제와 결부된다. 거기에 따른 역사란 다만 이렇게만 진행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 공식화된 결말로서 억지 춘향으로 결말을 제시하여 거기에 종속하려는 연출 학에 대해선 불만인 것이다. 반면에 연극의 매력은 실험하는 과정이며, 실험을 통하여 사건의 변화가 일정한 형식내의 사건 이상의 것을 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가능성에 대한 추구는 변화를 연극적으로 설정하여 기발한 착상을 얻게 되는 것이다. 즉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며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설정이 그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작자가 착상이 떠오르면 작자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도 설정되어질 수가 있다. 여기에선 작품의 테마에 속한 것이 반영되고 있다.
테마를 선택하고자 할 때 어떤 것은 추가하고 어떤 것은 삭제하여 나중에 거기에 수긍이 가게 될 경우 왜 이런 것을 선택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반복적인 경험을 통하여 의심이 생기고 志向한 것에 대한 의구심에 한번 눈을 뜨게 되면 될수록 다시 한 번 시작하여 어떻게 달리 하고픈 지적인 충동이 더욱 활발해진다。
『당신은 도대체 어째서 항상 같은 테마를 선택하십니까?』 라고 작가에게 물을 것이다. 그러면 나도 큐어만처럼 『우리 다시 시작합시다! 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이런 것은 현실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극장에서만 통용될 뿐이다. 연출가란 누구인가? 하늘의 使者는 아니다. 그를 감독이라고 한다면 반복하고 실험하고 변화하는 것이 현실 세계에선 허용되지 않지만, 이런 것이 허용되는 연극의 감독인 것이다. 연극은 모든 것을 제시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학창 시절, 사춘기, 3년간의 군 복무, 캘리포니아의 아름다운 여름, 어머니 임종 시의 불참, 첫 결혼의 실패.......
이런 것을 어떻게 상연할 수 있을까? 또 무엇을 상연할 수 있을까? 곤란한 결혼, 경력, 섭생 등 진부한 일상적인 生活, 무대 위에서 좀 더 흥미있게 전개될 수 있는가? 큐어만의 생애에 해당하지 않는 일까지도 연극을 통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는 가운데 곤란한 결혼, 경력, 정치, 섭생 등이 무대장치를 이용한 자료로서 나타난다. 묘사하고자 하는 행동이 선택이며 동시에 관객은 무대에는 없는 자신이 생각한 자료로서 숙고한다. 그러나 이는 현실처럼 그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객의 의식에 도움을 주는 것은 그럴듯한 현실의 모습이나 모방이 아니고 그 반영인 것이다.
나의 작품은 하나의 시도다. 시도는 실패할 수도 있다. 연극적인 것을 「유흥적인 것」으로 교란하는 연출가가 상연을 한다면 그는 연극적인 것을 다만 스칠 뿐이며 배우를 지도하는 데도 그런 요소를 제거할 것이다. 또 연극적인 것이 분명히 그를 교란하게 할 것이다. 현실의 모방을 통하여 현실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의 시도는 실패하지 않을지 몰라도 상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원치 않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의식을 무시하는 예술, 즉 모방의 연극은 현실의 설명이라는 물음을 언어 리얼리즘, 행동리얼리즘, 장치리얼리즘, 템포리얼리즘, 소도구 리얼리즘 등으로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연극은 특히 우리 젊은 세대에게는 고대그리스의 연극처럼 걸맞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작가 프리쉬는 주인공 퀴어만이 스스로 수정되어야할 부분을 선택하게 하고, 그 결과에 따른 변형된 삶의 모습을 기대하게 하는 철저한 행동과학적 인물, 즉 관찰자적 객관적 인물로 만들어 연극 자체로부터 이탈시킨다. 그래서 퀴어만은 7년간의 결혼생활을 자신의 전기에서 삭제하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 만약 그가 반드시 허락을 받을 수 있다면, 진정 여자와 같이 사는 전기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주인공의 확고한 의지가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무대 위에서 실습을 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그 결과는 그의 의지대로 과연 될 것인지.... 행동 연구학자인 주인공 퀴어만이 자신의 전기, 즉 현시점으로부터 바로 이전에 살아왔던 자신의 과거를 새롭게 변형하여 재현해 보고자하는 일련의 시도들로 구성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