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이전에 폴커 브라운은 작품에서 독일 내 문제를 다루면서 독일사회에 존재하는 모순과 그 개선에 관심을 보였다. 반면 통일 이후에는 전체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들춰내면서 인류가 함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독일 통일 이후 브라운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주제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지구 환경 파괴'와 '미래에 다가올 인류의 비극에 대한 경고'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바닷가 뵈멘>은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대부분의 국가가 자본주의화 된 오늘날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사회주의 와해 이후의 현대사회를 진단하고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브라운은 우선 오늘날의 전 세계적인 이슈들을 다루고자 역사적 사건에 관심을 둔다. 현대사회가 도래하기 이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두 체제에 존재했던 모순을 보여 주며 이를 수정하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가 불확실해질 것임을 경고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고 이를 개선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폴커 브라운의 이전 작품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이다. 예컨대 통일 이전에 발표한 <키퍼>에선 동독사회에 만연했던 노동 생산성 저하의 원인에 대해, <위대한 평화>에선 동독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변화 앞의 사회>에선 무기력에 빠진 사회구성원의 일상을 다루었다. 브라운의 이러한 집필경향은 냉전 종식된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브라운은 작품에서 항상 예언자 역할을 하며 현대사회의 모순점들을 보여 주고 관객들로 하여금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 그 방향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미래에 더 나 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역사를 냉엄하게 돌아보고 당시의 모순점들을 수정하길 원한다. 또 이를 위해 각 체제의 대변자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한편 브라운의 작품을 해석할 때는 인물구성에 대한 이해가 큰 도움이 된다. 특정 사회와 이념을 대변하는 인물들의 대화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언급되지만 브라운의 시선은 초국가적인 문제를 향하고 있다.
폴커 브라운은 이 작품에서 '바닷가에 있는 뵈멘' 지역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여기서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에서 '사천'이 허구의 도시인 것처럼 브라운의 <바닷가 뵈멘>에 언급되는 '뵈멘' 역시 작가가 고안한 허구의 지역이다. '뵈멘'은 구체적이고 실재하는 지리학적 장소가 아니다. 하지만 대략 체코의 어느 지역임을 유추해볼 수 있다. 다만 체코는 내륙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실제로는 체코에 바다도, 해변도 없다. 따라서 지리학적 지식을 토대로 이 작품의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거나 연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대신 허구적 장소의 상징성이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이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광범위하고 전 세계적인, 인류사 적 사실들과 위험들이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극 중 시간은 사회주의가 와해된 시점일 것으로 짐작된다. 아마도 20세기 후반일 것이다. 요컨대 독일 통일 직후인 것은 분명하다. 브라운에게 연극이란 다양한 현실주제를 놓고 여러 사람들이 의견을 나누게끔 하는 토론의 무대다. 이러한 이유에서 브라운은 사회주의 와해시점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둘 중 어느 편도 지지하지 않으면서 거대한 두 이념 체제의 대변자들을 비판함으로써 앞으로 인류가 찾아 나서야 할 공동의 삶의 가치를 숙고하게 만든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 수많은 동독국민이 동독을 탈출해 '월요일의 데모'를 펼치며 지배층에 대한 불만을 표출할 때 브라운은 자본주의를 지지하거나 사회주의 유지를 주장하는 입장 모두와 거리를 두었다. 그는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을 원했다. 자본주의 역시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가기에 충분한 시스템이 아님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브라운은 냉전시대가 끝나자 인류 공동의 복지와 발전을 위한 '제3의 사회제도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이런 제안은 작품을 통해 두 체제가 지닌 모순을 들춤으로써 가능했다.
극중인물들 역시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도록 설정되었다. 파벨은 옛 친구들인 러시아인 저널리스트 미하엘과 미국의 사업가 바르돌프를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 뵈멘으로 초대한다. 아들 바츨라프와의 대화에서 그 이유가 드러난다.
서로 화합하지 못했던 이질적인 사회체제에 내재된 모순점들을 보여주기 위해 각 체제를 대변하는 인물들이 구성되었다.
미하일은 프라하의 봄을 무자비하게 제압한 소련과 동일시된다. 바르돌프는 자본주의사회에 만연한 이기심과 비인간성을 상징한다. 이처럼 역사상 지도자를 연상시키는 작명으로 상징성을 띠도록 한 인물구성은 관객이 극중 갈등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다분히 의도적인 작명으로 지난 시절의 이념논쟁과 그 본질에 대해 숙고하게 한 것이다.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작가의 부정적 관점은 1991년 10월 16일 자 작업일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여기서 브라운은 환상으로 변해 버린 사회주의 노선을 비판한다. 동시에 브라운은 바르돌프라는 인물을 통해 자본주의의 '부정적 망상'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브라운은 상징적 인물들의 갈등을 통해 열강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인류가 지향해야 할 사회체제의 방향성에 대해 질문한다. 식사 중에 파벨의 손님인 미하일과 바르돌프는 과거를 곰곰이 곱씹는다. 여기서 두 열강 사이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들의 자기비판이 시작된다.
두 체제의 모순은 첫째로 파벨이 두 손님들을 비난하는 장면, 둘째로 두 손님들의 회상과 후회 장면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여기서 관객들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바닷가 뵈멘>이 세계사회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20세기 후반의 역사적 사건과 연관지어 표현한 현대극이란 사실이다. 작품은 현대의 국가나 사회의 문제가 과거의 모순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문제들이 인물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표현되고 있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인물들의 숙고에서는 지난세계의 정치적, 이념적 논쟁을 통해 두 열강의 부당함이 드러난다. 인물들은 과거와 현재 사건의 암시와 연결된다. 과거의 재현과 언급은 고발만이 목표는 아니다. 극의 결말부에선 더 포괄적인 세계로의 발전과정에 관객이 적극 참여하도록 자극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어제와 오늘의 사회적 문제들은 두 이념의 대변자들이 끝없이 논쟁하는 과정에서 표현된다. 모든 인물은 역사적 인물과 연결되며 세상에 대한 상이한 입장을 대표한다. 각 열강의 입장과 생각들은 인물 구성을 통해 배열(정렬)되고 동시에 비평의 대상이 된다. 이는 브라운의 작품이 보여주는 공통된 특징이다.
특히 이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통일 전 브라운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전형을 보여준다. 브라운의 작품에는 주요역할을 하는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다. 평균 이상의 지성을 지녔거나 환상을 관리할 수 있는 어떠한 주인공도 나오지 않는다. 현재의 모순에 반하는 어떠한 반응도 없다. 작품엔 사회적 제약으로 절망한, 또는 절망하고 있는 복잡한 성격의 인물들 만이 나온다. 황량한 장소 '뵈멘'에서 인물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나열만 하고 있다.
작품에서 파벨은 소련과 미국, 양대국에 희생당한 국가를 상징한다. 두 체제를 모두 비난하며 두 체제가 지녔던 모순들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파벨은 친구 미하일과 바르돌프를 증오하면서도 이들을 집에 초대한다. 그렇게 세계사의 두 상징적인 대변자를 고발한다.
브라운은 미국과 소련을 상징하는 두 인물을 파벨이 고발하게 함으로써 관객들이 세계열강의 부당함을 구체적으로 통찰하도록 자극한다. 이는 두 사람의 자의식화 과정에서도 증대된다.
세 인물 외에 율리아와 천박한 젊은 여자, 아시아 등에 대한 관심도 브라운의 인물구성이 의도한 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율리아는 생존투쟁에 익숙하다. 그녀는 모순 가득한 세상에서 고통 받고 있다. 과거 양대 강국 사이에서 고통 받은 국가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브라운의 작품에서 여성인물은 대체로 자발적으로 사회적모순에 저항하거나 자기보존 욕구에 이끌린다. 율리아는 통일 이후 브라운의 작품에서 대부분 수동적으로 묘사되는 남성 인물들과는 반대되는 인물이다. 두 체제의 모순을 대변하는 남성인물들과 달리 그녀는 정상성을 상징한다. 브라운의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율리아는 진정한 사랑을 원한다. <키퍼>의 마린카, <위대한 평화>의 판폐, <변화 앞의 사회>의 이리나가 바로 그런 인물들이다. 율리아는 또한 자기 보존을 위해 애쓴다. 두 열강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행동 방식은 미하일, 바르돌프와의 관계에서 두드러진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미하일뿐만 아니라 바르돌프와도 성적 관계를 가졌다. 그녀는 남편 파벨에게선 아내로서 어떤 진실한 결혼(혼인) 관계를 발견하지 못한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진실한 사랑을 구하지 못한 율리아는 극 말미에 검은 인물들과의 관계도 유지한다. 이들은 불확실성으로 인해 점차 폭력성이 확대된 제3세계를 암시한다. 바츨라프와 천박한 젊은 여자는 젊은 세대를 상징한다. 천박한 여자는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있고 바츨라프에게 강간당한다. 이 외롭고 고통받는 인물은 한편으론 통일 전 소련의 위성국가들을 연상시킨다. 또한 통일 이후 세계열강에 의해 부당하게 고통받는 동시대인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 밖에도 신구 세대를 통해 과거와 현재문제가 효과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또한 두 세대는 작품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한 예감을 상징하는 아시아(Assia)와 검은 형체(Schwarze)들과도 관련 있다. 아시아와 검은 형체(인물)는 사회적 위기를 유형화한 것이다. 관객들에게 제3세계에서 계속해서 확대되고 있는 폭력성을 예고하거나 통고하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연출을 위한 지문, 예를 들어 검은 형상이 가방을 끌고 몰래 사라진 뒤 아시아가 바르돌프의 여행용 가방을 다시 세워 두는 장면에서 이런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통일 전이나 후에도 브라운은 연극 무대를 관객의 사회 참여 유도를 위한 토론의 장으로 이용한다. 특히 <바닷가 뵈멘>에서는 극의 줄거리 진행보다는 인물들 사이의 논쟁이나 대화 장면에서 동시대의 모순을 관객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개선의 필요성과 방법을 숙고하게 한다. 다만, 통일 전에는 사회모순을 직시하고 알리는 능동적 고발자의 역할이 강조된 인물을 선보여 왔던 것과 달리 통일 후에는 그와 상반되는 인물들을 보여준다. 관객이 차분하게 인물들의 대화에 집중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인물 묘사에서 나타난 변화는 주제 변화로도 이어진다. 통일 전에는 동독 사회에 내재한 불합리한 노동환경이나 불평등의 문제를 지적했다면 통일 이후에는 앞으로 인류에게 닥칠 부정적인 일들을 예견하고 경고한다. 국가 또는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정적인 진행과정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 다양한 세계사적 문제들을 다루는 <바닷가 뵈멘>은 통일 후 브라운의 작품 세계를 잘 반영하고 있다.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이올라 M. 라구소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 (1) | 2023.03.08 |
---|---|
조안나 머레이 스미스 '러브 차일드' (1) | 2023.03.08 |
콤므 드 벨시즈 '너 자신이 되라' (1) | 2023.02.26 |
조 심슨 원작 데이비드 그레이그 작 '터칭 더 보이드' (2) | 2023.02.22 |
알베르 까뮈 원작 하일호 재창작 '까뮈의 페스트 리버스' (1) | 2023.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