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흉악한 범죄자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진실공방을 벌이며 살아온 50대의 형사 이도석.. 그에게는 묘희라는 이름의 이제 막 성인의 길로 들어선 여대생 딸이 있다. 어느 날 묘희는 불면증 치료를 위해 찾아간 심리상담센터에서, 자신이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지속적인 성추행을 당했으며 그것이 자신이 가진 여러 심리증상의 원인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이를 알게 된 이도석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한편 평소 이도석을 친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던 후배 형사 김인성은 심리 상담치료사인 진영을 찾아가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조사를 진행하는데....
진실을 앞에 두고 서로 다른 태도와 입장의 네 사람이 각자 생각하는 진실이란 무엇일까?
불확실한 기억력! 조작되고 왜곡될 수 있는, 조작하고 왜곡하는 인간의 이기심, 합리적 믿음과
의심, 갈등과 모순. 그리고, 부정은? 부정은 세 가지 중의적 의미를 가진다. 인정하지 않고 거부함, 그릇되고 어긋남, 아버지의 정. 이 세 가지 의미의 부정과 함께 조작된 기억들, 왜곡된 기억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인간 내면의 선과 악 그리고 그 선악의 기준점은 개개인의 생각과 신념에 따라 달라지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아무튼 끝까지 알 수 없는 진실은 무엇일까.
미국의 범죄 심리학자이자 인지과학자인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교수가 쓴 '우리 기억은 진짜 기억일까?' 라는 책이 있다.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이 사후에 주어지는 정보들과 불분명한 진실성을 가진 목격자들의 증언들로 인해 어떻게 주입되고 왜곡될 수 있는가를 여러가지 실제 사례들을 근거로 추적하고 연구한 보고서 형식의 글이다. "부정" 이라는 연극은 이 책에 예시된 사례들을 소재의 근거로 하여, 한국적 인물 창조와 상황 설정을 통해 불분명한 사건의 실재성 (realism) 안에서 각자가 생각하는 진실성을 주장하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인간의 이기심과 갈등, 그리고 자가 당착적인 사회의 구조적 모순 등을 심리 미스터리 적 형식으로 보여주고자 한 작품이다.
작가의 글 - 오재균
현상학이니 구조주의니 하는 포스트모던한 현대철학을 굳이 중얼대지 않아도 인간은 이미 진실이란 것이 하나라는 생각을 버리고 산지 오래된 낡은(?) 종족인지 모릅니다. 하나의 신을 모시고 살면서도 우리는 종파와 계파에 따라 신의 모습과 색깔을 탈색하고 염색해서 도저히 알아 볼 수가 없게 만드는 존재들이니 말이죠. 우리가 믿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도 그 밖의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 밖의 모든 걸 가려버릴 수 있는 위험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여기 실체가 없는 하나의 사건을 두고 현혹된 진실 앞에 마주선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인물은 로고스적 사고로 이를 마주하고 다른 인물은 파토스적 사고로 사건을 해결하려 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인물은 카오스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요. 우리가 이들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 진실의 실체가 어디에 있느냐는 케케묵은 질문이 아니라 그것(현혹된 진실)을 마주하는 인물들의 서로 다른 태도와 입장을 생생히 목격함으로써 내가 서있는 좌표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조차 이미 닳고닳은 오래된 잡담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극중 이도석이 짊어지려 하는 낡은 십자가처럼 말이죠.... 보잘것없는 대본 하나를 믿고 모여준 배우들과 스텝들의 수고로움에 어설픈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보내며 아울러 소중한 시간, 동의하든 안 하든 우리의 생각과 함께 해주시는 관객분들께 또한 애잔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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