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냉장고에 갇힌 아빠를 구해달라고 외치는 소녀. 아빠는 정녕 냉장고에 갇힌 것일까?
아니면 소녀의 말처럼 냉장고는 또 다른 지구로 가는 웜홀인 걸까.
소녀와 아빠를 이 황폐한 재개발 지역에 옴짝달싹 못 하도록 내몬 이는 과연 누구일까?
왜, 21세기인 지금에 와서도 제2의 '난쏘공‘들이 쓰여야 하는지.
소녀는 이 지구에서 행복해질 수는 없는 건지. 재개발은 대체 누구를 위한 개발인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처럼 쉽사리 풀리지 않을 일련의 의문들을 던진다.
전성혁의 《열어주세요》는 가장 논란이 많았던 작품이다. 용산 참사의 이야기를 냉장고에 아빠가 갇혀있다고 119에 구조를 요청하는 소녀의 상황으로 풀어가면서, 상징과 현실을 결합하고 세계를 포착하는 능력이 돋보였던 작품이다. 부조리한 상황이지만 굉장한 리얼리티를 기반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띄었다. 현실에 대한 밀착력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소녀와 대학생 용역깡패의 두 인물의 긴장감이 약하고 이야기가 더 진전되지 못하고 멈춰있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뼈대는 잘 잡았지만, 살이 제대로 붙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이야기는 흥미롭게 전개되고 관객을 궁금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작품 자체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극시키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 작품의 가능성이 실제 공연으로 현실화되는 과정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 마지막까지 주저되었지만, 작가의 참신한 상상력에 한표를 던지는데에는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일치되었다.

작가의 글 -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유쾌하게.
저는 늘 배가 고픕니다. 물론 창작에 대한 허기입니다. 처음으로 쓴 희곡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당선 소감을 쓰는 밤입니다. 4년 전 봄, 단편 소설로 등단을 했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니 여전히 가슴 벅차오릅니다. 실로 행복한 순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더 좋은 소설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이 오히려 저를 옥죄며 삶을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행복을 찾아 더 큰 세상의 그림을 보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다행히 장학생으로 선발돼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 뒤 삶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고 그 경험을 토대로 자연히 글 쓰는 것을 보다 즐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해 용산 참사를 겪으며 작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고 갓 등단한 신인 작가로서 주어진 책무를 온전히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남일당 현장에서 철거민들과 함께 묵묵히 시위에 동참하는 선배 작가들을 보며 혼자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재개발은 과연 누구를 위한 개발인가? 앞으로 제2, 제3의 용산 참사가 다시금 일어나지 않을까? 만일 내가 필력이 된다면 그들의 이야기를 좋은 소설로 풀어보는 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역시 작가는 백 마디 말보다 오로지 글로 보여줘야 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쓰면 쓸수록 소설보다는 희곡이 제가 생각한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더 적합할 것 있습니다. 만약 연극으로 무대에 오른다면 좀 더 상징적인 의미로 관객에게 전해지지 않을까해서죠. 그래서 부족한 실력이지만 진심을 다해 적극으로 썼습니다. 그리고 오늘, 당선되었다는 연락을 받았고 공연으로 재탄생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불통인 현실에 대한 의분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작품 속 소녀와 용역 깡패가 또 다른 지구에서 행복하게 잘 살아가기 바랄 뿐입니다. 저는 작가란 직업이 아니라 정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오직 글을 쓰는 동안만 작가는 존재하며 영원불멸합니다. 저는 미학적으로 널리 칭송받는 완벽한 작품보다는 나만이 쓸 수 있는 가장 나다운 글을 쓰고 싶습니다. 세상을 보다 깊게 관찰하고 대신 판단은 조금만 내리며 정성껏 계속해 가설을 쌓아가는 일,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처럼 매일 밤 끝나지 않는 매력적인 이야기로 관객들을 저의 세계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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