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6년 12월 30일 첫 막이 올라간<발라간칙〉은 일대 스캔들을 불러온다. 공연장은 휘파람을 부는 사람, 박수를 치는 사람, 경멸과 분노로 소리치는 사람들로 일대 혼란을 빚었다.<발라간칙〉은 누구보다도 안드레이 벨르이, 쿠즈민 둥 상징주의 시인들에게 큰 충격이었는데, 그것은 메이에르홀드와 알렉산드르 블록이 자신들의 작품 안에서 상징주의의 이상을 조롱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르 블록은<발라간칙〉안에서 당시 상징주의 시인들이 이상으로 삼았던, 삶에 대한 종교적 체험, 예술을 통한 세계의 구원 등 신비적이고 신화적인 사상을 담고 있는 솔로비요프 주의와, 그들의 영원한 여성이자 지혜의 상징인 소피아의 이상, 그리고 서정시 안에 갇혀 버린 상징주의를 모두 거부했다. 즉, 상징주의자들을 의미하는 '신비주의자들'을 등장시켜, 그들이 기다리는 이상적인 구원의 여인을 코메디아 델 아르떼의 광대들의 이야기로 뒤집어 버림으로써, '죽음' 등에 대한 철학적이고 신비적 사색 등을 모두 비웃었던 것이다.
<발라간칙〉은 알렉산드르 블록의 동명의 시 '발라간칙'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상징주의 극장 '횃불(Fakel)'의 설립추진을 위해 동명의 시를 바탕으로 드라마를 창작할 것을 권유한 출코프(G.I.Chulkov)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 작품을 쓴 것이다. 그러나 상징주의 극장설립은 재정적인 이유로 무산되고, 〈발라간칙>은 1906년 4월 '서정적인 장면들(Liricheskiescheny)'이라는 부제와 함께 상징주의 잡지 '횃불(Fakel)'에 발표된다. 그후 '서정적인 드라마들"'이라는 명칭을 달고 다른 두 편의 드라마와 함께 1907년에 〈발라간칙〉은 메이에르홀드의 연출작업 발전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이후 그의 중요한 연극적 이상들이 모두 이 작품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발라간의 에너지와 극적요소들을 통해, 신비와 이상의 철학 안에 침잠해버린 솔로비요프 상징주의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명민한 시인 알렉산드르 블록과의 작업이, 메이에르홀드의 연극관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는 시인이 암시하고 꿈꾸었던 것에서 자신의 이상을 발견하고 발전시켜 나간다. 메이에르홀드는 이 작품을 기점으로 하여, 그가 이전 상징주의 실험에서 했던 많은 원칙들에서 벗어나 '우슬로브니이(uslovniy)연극'을 정립해 나가기 시작했으며, 이후 그의 전 작업에서 중심을 이루는 발라간적 요소및 코메디 델 아르테 적 요소, 분신 모티브, 연극적 환영의 파괴 (흔히 극장주의라고 개념화되는), 그로테스크 미학 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알렉산드르 블록은 〈발라간칙〉의 최종 리허설 직후 메이에르홀드에게 보내는 1906년 12월 22일 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발라간은, 나의 것을 포함하여, 죽어있는 성벽에 구멍을 뚫는 공이가 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발라간은 서로 얼싸안고, 마중을 나가고 있으며, 마치 그에게 자신을 재물로 주는 것처럼. 이 물질의 무섭고도 방탕한 포옹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바보스럽고 둔한 물질은 굴복하게 되고. 그를 신뢰하게 되고, 그 자신이 안기기 위하여 그에게 기어오릅니다. 그 순간에 〈신비의 시각을 울려야만〉 합니다. 물질은 바보 같아지고, 힘을 잃으며 순종하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는 〈 세계를 받아들입니다.〉- 모든 세계, 그의 둔감함과 침체, 죽고 말라버린 색채를 지닌, 그리하여 이렇게 뼈가 앙상하고 늙은 심술궂은 노파에게 숨결을 불어넣고 젊어지게 하기 위해서: 광대와 발라간칙의 포옹 속에서 늙은 세계는 좋아지고. 젊어지게 될 것이며, 세계의 눈은 끝없이 맑아지게 될 것입니다.”출간된다. 알렉산드르 블록은 이 새로이 출간된 작품집 서문에서 메이에르홀드의 공연을 통해 '몽환극<발라간칙〉의 이상적인 상연'을 보았다고 말하며, 작품을 브세볼로드 메이에르홀드에게 헌정한다.

블록에 의하면 발라간은 현실을 묘사하지도 반복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속이고 바보로 만들고, 그리하여 새롭게 재창조한다. 철학이나 문학 안에 갇힌 채 자신들의 신비적이고 공허한 이론으로 인간의 내면적인 모순을 그려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상징주의를 블록은 이 같은 방법으로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극-발라간의 이상은 블록에게 있어 '죽어버리고, 굳어버리고, 적의로 가득한 현실에 대한 승리의 이상 …과 같이 보였으며 '정화의 순간이자 서정적 고독으로 부터의 탈출'이었다. 뒤집고, 격하하고, 모독하고, 익살스러운 대관 뒤에는 반드시 탈관이 따르곤 하는, 발라간, 민중연극, 장터의 유희, 꼭두각시 인형극 등에서 보이는 생생한 카니발 적 성질“'은 옛것을 새롭게 하고 죽은 것을 소생시키는 생성의 미학이 그 핵심이다. 이렇게 볼 때 낡은 문학과 연극으로부터 나와 생명력 넘치는 살아있는 예술 작업을 원했던 블록과 메이에르홀드의 이상에 왜 '발라간'이 필요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꼬메디아 델라르테적인 요소와 가면의 상징은 프랑스의 상징주의자들에게도 자주 보이는 요소들이다. 베들렌느(P.Verlaine), 라포그(J. Laforgue) 등의 시를 비롯하여 앙소르 쟁스 (E.James)의 그림 등에서도 꼬메디아 델라르테와 가면은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즉, '인간 희극의 상징' 혹은 낭만주의적 아이러니‘ 로서의 가면(가면극)이나, 죽음. 성, 무의식 등의 알레고리적 인물, '꿈꾸고 상처받은 시인'의 이미지로서의 삐에로 등을 상징주의 작가들은 작품 안에서 자주 형상화했던 것이다. 상징주의자들에게 보이는 꼬메디아 델라르 테와 가면의 모티브들은 낭만주의자들로부터 계승된 것이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에게서 보이는 이러한 요소들은 유머, 아이러니, 빈정거림 등의 '축소된 웃음'과 '주관적 관념 철학의 언어'로 표현된다. 즉, '웃음은 자신의 유쾌한 가면을 던져버리고 세계 와 인간에 대해 악의에 찬 풍자의 시선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꼬메디 델아르떼를 포함하여 민중적이고 광장적인 축제의 요소들은 낭만주의로 오면서 개인적이고 비극적인 색조를 띠게 된다. 가면의 모티브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것은{가면의 모티브를 말함 - 필자) 가장 복잡하고 가장 다양한 의미를 지닌 민중문화의 모티브이다. 가면은 변화와 체현의 기쁨과 연관되어 있으며. 유쾌한 상대성과, 동일성 및 일의적 의미에 대한 유쾌한 부정과. 자기 자신과의 둔감한 일치에 대한 부정과 연관되어 있다. 가면은 전이, 변신, 자연 경계의 파괴, 조소와 별명(이름을 대신해)과 연관되어 있다. 가면 속에는 삶의 놀이라는 원리가 체현되어 있으며, 그것의 근본에는 고대의 〈의식적-구경거리〉성식의 특징들이었던 현실과 이미지 사이의 독특한 상호관계가 놓여있다. (...) 낭만주의 그로테스크에서의 가면은 민중들이 느끼는 카니발 적 세계감각의 동일성과는 유리되어 있었고, 빈약해지고 있었으며, 가면이 지니고 있는 원래의 본성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련의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있었다. 가면은 무엇인가를 은닉하고, 숨기며, 기만한다는 등등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상징주의 시인들의 작품 안에서 나타나는 가연의 모티브는 낭만주의적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블록의 작품에서도 이 같은 점은 마찬가지인데, 시인이자 고독한 영혼의 상징이라고 할 삐에로라든가 (그의 마지막 독백 - 나는 너무나 슬프다. 그런데 당신들에겐 우스운가?를 상기해야 할 것이다), 세 쌍의 연인들이 등장 하는 가면무도회 장면의 비밀스러움 둥은 그의 작품 안에서 가면의 모티브가 갖는 성격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런데 메이에르홀드에게 있어서 꼬메디아 델아르테적 인물들과 가면은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캐릭터'로서의 의미와, 현실적 열정과 인물들의 경험을 연극화함으로써 모든 실제를 조건적 상황으로 변화시키는 것으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 메이에르홀드는 가면적 인물의 특징에 대해서, 1912년 동명의 논문 '발라간'에서 아를레낀을 예를 들어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아를레낀은 어수룩한 얼뜨기 광대이며, 하인이며 교환한 자이자, 원기 왕성하고 유쾌한 사내이다. 그와 동시에 아를레낀은 사악한 자, 마법사, 악마 같은 힘을 가진 자, 유혹하는 자 등의 이미지를 함께 구축해 놓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오랜 세월 무대 위에 존재해 온 아를레낀이라는 성격 안에 들어있다. 가면적 인물은 이런 식으로 많은 것을 우리에게 연상시킨다. 그는 이 모든 요소를 품은 채 영원한 시간을 존재해 온, 시간을 초월하는 캐릭터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가면을 쓴 배우가 우리 앞에 서면, 우리는 그 즉시 연상을 통해 구성 되는 풍부하고 카멜레온 같은 캐릭터를 보게 된다.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의 나라로 달려가게 만드는 것이 마스크가 아니던가? 마스크는 관객에게 단지 주어진 아를레낀만을 보도록 하지 않는다. 관객들의 기억 속에 있는 모든 아를레낀들을 보게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관객은 이 인물 형상이 지니고 있는 내용과 어느 정도라도 유사점을 지니는 모든 인간들을 본다. 즉, 그가 강조하는 가면은 민중극과 발라간 안에 들어있던 요소 - 가면은 변화와 체현의 기쁨과 연관되어 있으며, 유쾌한 상대성과, 동일성및 일의적 의미에 대한 유쾌한 부정과, 자기자신과의 둔감한 일치에 대한 부정과 연관되어 있다'라고 바흐친이 지적했던 바로 그 점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메이에르홀드가 강조했던 '영원한 연극 캐릭터' 가면적 인물들이 갖는 놀라운 점이 자생생하고 순수한 연극성이다.

<발라간칙〉에는 그러한 성격을 지닌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아를레낀, 꼴롬비나, 삐에로이다. 여기서 그들은 꼬메디아 델라르테에서의 자신들의 전형화 된 성격과 함께 등장한다. 아를레낀은 극 안에서 건장한 젊은이이자 쾌활하고 적극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독백 안에서 삶에 대한 환희와 열정을 열렬히 낭송한다. 아를레낀의 성격은, 그의 옷에 작은 방울이 달려 있어 움직일 때마다 울림으로 하여 그가 갖고 있는 명랑함과 쾌활함이 강조된다. 그런 반면, 그는 마법사와 같은 인물이자 유혹자이기도 하다. 아를레낀이 등장하여 삐에로의 어깨에 손을 얹자 삐에로는 인형처럼 고개를 젖히며 쓰러져버리고 마는데, 이어 그는 삐에로의 약혼녀 꼴롬비나를 유혹하여 데리고 나가버린다. 또한 그는 극의 후반부, 횃불이 이글거리는 가운데 코러스들 사이에서, 마치 코러스의 지휘자와 같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같은 아를레낀의 역할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악마적 이미지를 더한다.
신비주의자들에 의해 '죽음' 의 현현으로 여겨지는 꼴롬비나도 자신의 가면이 가지고 있는 성격을 그대로 갖고 등장한다. 꼴롬비나를 자신의 약혼녀라고 믿는 삐에로에게, 신비주의자들은 제 정신이 아니라며 그를 설득한다. 이에 삐에로는 그만 낙담하여 퇴장하려고 하는데, 그때 꼴롬비나는 그를 잡고 "나는 당신을 남겨두고 가진 않겠어요, 라고 말하여 삐에로와 신비주의자들을 당황시킨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아를레낀이 등장하여 그녀를 유혹하자, 그녀는 쓰러진 삐에로는 아랑곳 않고 아를레낀에게 미소를 보내며 그와 함께 어디론가 가버린다. 꼴롬비나는 꼬메디아 델라르테 안에서 아를레낀과 짝을 이루곤 하는 예쁘고 명랑한 성격의 하녀로 쾌활하고 약삭빠르지만 제멋대로의 바람기가 있는 인물이다. 이 극 안에서 삐에로에게 사랑을 약속 하고서도 바로 다음 순간 건장하고 남성다운 아를레낀에게로 가버리는 것은 그러한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삐에로의 성격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아를레낀과 마찬가지의 신분인, 어수룩하고 순진한 하인 이지만, 아를레낀이 건장하고 쾌활한 반면, 삐에로는 사색적이고 우울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는 오쟁이진 남편, 배신당한 연인, 실연당한 청년의 역할을 도맡아 하는 인물이기도 한데, 그런 까닭에 낭만주의자들 및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에게 특히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아를레낀이 자주 악마적인 힘을 지닌 인물, 성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인물로 여겨지는 것에 비해, 삐에로는 육체보다는 정신적인 면이 강조되는 인물, 우아하고 서정적인 인물, 정직하고 성실한 '영원한 연인'의 모습으로 여겨진다. 그렇기에 상징주의자들에게 있어 그 는 자주 시인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전형적인 성격과 그들 사이의 사랑의 삼각관계 이야기는 극 안의 다른 이야기와 맞물리면서 다른 관점과 다른 차원에서 조망되고,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면서 유희된다. 한편, 가면적 인물이 갖는 특징과 함께 꼬메디아 델라르테와 즉흥극적 요소, 라찌(Lazzi), 그리고 다분히 민종연희적 요소가 강한 카보티나지(Kabotinazj, Cabotinage) 등도 메이에르홀드가 중요하게 생각 한 요소들이었다. 메이에르홀드는 평론가 베누아가 자신의 연극을 평하는 자리에서 비난의 어조로써 언급한 카보티나지륜 오히려 역으로 언급하면서, "카보틴(Cabotin)은 유랑 배우이다. 카보틴은 마임배우, 음유시인, 져글러 등과 유사하다. 카보틴은 놀라운 배우 테크닉을 가진 자이다. 카보틴은 배우의 진정한 예술 전통을 계승하는 자이다.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서구 연극은 그 자신의 번영(17세기 이탈리아와 스페인연극)을 이룰 수 있었다. (...) 그리고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카보틴이 없었다면, 연극도 없었다. 또는 그 반대로, 연극이 연극성의 기본적 법칙들을 거부하기 시작하자마자. 그 순간에 또한 연극은 카보틴적인 것에서 벗어난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즉, 카보티나지의 회복이야 말로 진정한 배우술의 회복이자 연극성의 회복인 것이다.
(발라간칙〉안에서 라찌(Lazzi)는 극의 구성상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무도회의 세쌍의 로맨틱한 장면들에 끼여든 어릿광대의 장난일 것이다. 이 장면에서 어릿광대는 극의 중심스토리와 전혀 무관한, 슬랩스틱식의 장난을 치며 두 연인사이에 끼여든다. 어릿광대는 로맨틱하고 진지한 연인들사이에 끼여들어 눈치없이 장난을 친 대가로 기사의 나무칼에 맞게 되는데, 그때 광대는 붉은 색의 주스를 쏟으며 죽어가면서 관객을 향해 도와달라고 외치게 된다.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은 단순히 생동감 넘치는 즉흥과 웃음장면의 삽입이라는 것외에도, 그때까지 존재했던 극적환영을 깨고 새로운 차원의 현실을 창조하고는 또다시 그것을 다시 전복시킨다, 라고 하는, 환영에 대한 새로운 연극적 철학을 제시한다. 메이에르홀드는 〈발라간칙〉안에서 발라간, 꼬메디아 델라르테, 민중연희 등이 가지고 있는 유희적이고 즉흥적인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우슬로브니이 연극'의 이상을 정립해 나가기 시작 한다.<발라간칙〉을 통해 시인 알렉산드르 블록이 문학적 의미에서의 낡고 침체되고 죽어버린 세계로 부터 해방되고자 했다면, 연출가 메이에르홀드는 연극적 의미에서 생생한 생명력과 살아있는 예술을 향한 출구를 찾은 것이다.
분신 모티브는 메이에르홀드의 연극세계뿐 아니라 알렉산드르 블록의 문학세계에서도 중요한 요소이다. 블록의 시에 있어서 '분신' 의 모티브는 그의 전 창작기에 걸쳐 계속해서 등장하는데, 1903의 시 '분신'에서는 꼬메디 델아르떼 적 인물들과 함께 분신 모티브가 등장하기도 한다. 즉, 이 시 안에서 시적 화자는 광대 옷을 입은 아를레낀이 되어야만 사랑하는 꼴롬비나에게 노래를 지어줄 수 있는 자신의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게 시인은 자신의 분열된 의식, 합일될 수 없는 이상과의 괴리 등을 분신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발라간칙〉에도 그 같은 분신 모티브가 등장한다. 우선 아를레낀과 삐에로는 그 둘이 한 인물의 다른 면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삐에로는 사색적이고 문상가이며 수동적인 인물이다. 그는 인간의 정신적인 면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아를레낀은 쾌활한 행동가이며 적극적인 인물로 인간의 육체적인 면을 의미한다. 이렇기에 삐에로 없는 아를레낀은 불가능하며. 아를레낀 없는 삐에로는 의미가 없다. 이러한 분신 모티브는 무도회 장면에서도 등장한다. 무도회 장면은 여느 가면무도회와 같은, 여러 가지 가면들로 북적거리는 장면인 듯하면서도. 왠지 알 수 없는 신비한 분위기, 그로테스크함이 전체
적인 분위기를 감싸는데, 그것은 무도회에 참가하고 있는 가면들 사이로 이상한 존재들이 부정형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알 수 없는 존재는 연인들의 대화를 통해 신' 임이 암시된다. 첫 번째 쌍의 대화에서 '검은 이'로 나타나는 그 두려운 존재는 두 번째 쌍의 대화에서는 '검은 분신' 으로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분신은 자의식이자 분열된 자아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체는 자신을 객체로 바라보고 거리두기를 할 수 있다. 또한 분신은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수호보-코브린 등의 작가에게서 보이는, 러시아 문학에 있어서 중요한 테마의 하나인 변신(metamorphosis)의 상황이기도 하다.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열된 또 하나의 자아가 생성되는 것이다.
연극<발라간칙〉안에는 연출가 메이에르홀드가 상정해 놓은, 몇 개의 다른 차원의 현실성이 존재했다. 그 하나는 극 안에 존재한 '작은 극장'의 세계로, 그 극장은 자신의 작은 무대, 자신의 커튼, 자신의 프롬프터 박스까지 갖추고 있었다. 완전히 독립된 '극장' 이 극 안에 존재했던 것이다. 그 극장을 지지하고 있는, 일반적으로는 천장의 장신구들과 아치들로 가려져 있어야 하는, 여러 가지 지지대이며, 밧줄이며. 철사 둥은 관객의 눈에 그대로 노출 되어 있었다. 바로 그 작은 극장 안에 신비주의지들 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러나 이 작은 극장은 아를레낀이 콜롬비나를 데리고 나가버리는 순간, 다시 말하면 신비주의자들이 생각했던 이상이 사라져 리는 바로 그 순간, 밧줄로 위로 들어 올려지면서 순식간에 관객들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게 된다.
신비주의자들 역시 관객의 눈앞에서 한 덩어리의 물질로 변화하는 충격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즉, 그 들은 꼴롬비나가 자신들이 기다렸던 '죽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만 그 자리에서 스스르 사라져 버리는데, 그 순간 지금껏 프록코트를 입고 탁자에 앉아있던 인물들은 온데간데없이 그 자리에는 흰 분필로 옷 무늬가 그려진 검은 마분지만 남게 되는 것이다. “어떤 대시에 놀란 신비주의자들이 머리를 떨구자마자, 갑자기 탁자에는 머리도 손도 없는 반신만이 남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 모양을 따라 오려 만들어진 마분지로, 검은 색 위에 분필로 프록코트며, 커프스며, 가슴부분 등을 그려 넣은 것으로 밝혀진다. 배우들의 손은, 마분지로 된 몸통의 둥글게 난 구멍으로 내 놓았던 것이며, 얼굴은 마분지로 된 옷깃의 위에 단지 걸쳐놓았던 것이다.
한편 그 '작은 극장' 의 앞에는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 있었는데, 이곳에 '작가'가 등장하여 진짜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작가'는 시종 자신의 의도와 극의 진행이 전혀 다른 것임에 대해 당황하고 분노한다. “존경하는 관객 여러분! 저는 이 배우가 작가로서의 저의 권리를 끔찍하게 비웃었음을 급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극의 사건은 겨울에 페테르부르크 에서 진행됩니다. 도대체 그는 어디서 창문이니 기타니 하는 것을 끌어들였냐 말입니까? 전 제 드라마를 광대놀이를 위해 쓴 것이 아니란 말 입니다... 여러분께 주장하건대...”, “친애하는 신사숙녀 여러분! 저는 여러분 앞에 깊이 사죄합니다만, 그러나 어떤 책임도 지지 않겠습니다! 저들이 저를 조롱하는군요! 저는 사실적인 희곡을 썼으며, 여러분께 몇 마디 말로 그 요점을 설명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 그러나 •작가'는 번번이 자신의 연설을 마무리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커튼 뒤로부터 누군가의 손이 나와 그를 무대 뒤로 잡아채기 때문이다.
이렇게 극 안에 존재하는, 겹겹으로 이루어진 여러 차원의 세계는 다시 언어에 의해서도 강조된다. 즉, 신비주의자, 삐에로, 아를레낀. 세 쌍의 연인 등 '작은 극장’ 을 중심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의 언어 는 시어로 이루어져 있는데 반해. 작가의 언어만이 유일하게 산문으로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신뢰를 줄 수 있는, 그렇게 하여 관객이 정서적으로 믿고 띠를 수 있는 인물은 아를레낀-꼴롬비나-삐에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 세 인물 사이의 사랑이야기가 관객이 가장 중심으로 생각해야하는 스토리라인이 되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 명의 인물의 인물이야 말로 누구보다도 가장 연극적인 캐릭터이다. 그들은 수세기 동안 내려온 가면들이자 꼭두각시 인형인 것이다. 바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익살과 속임수로 관객을 웃게 만드는, 그리하여 항상 진짜가 아닌 광대 극 속의 인물로서 관객들에게 각인되어 온 이 세 명의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그 세계를 현실로 받아들이기는 힘든 것이다. 실제로 삐에로는 어느 순간 인형과 같은 모습으로 바닥에 쓰러지기도 하고, 아를레낀은 열정적으로 황금의 창으로 도약할 것을 노래하더니 다음 순간 종이로 만든 창을 찢으며 아래로 곤두박질치기도 한다. 꼴롬비나 역시 신비주의자들에게는 먼 나라로부터의 처녀', 죽음 등으로 추앙되더니, 이어 아를레낀과 삐에로에게는 허구의 존재 - '마분지로 만든' 여자 친구로 명명된다. 이렇게 하여 극 안에서 가상은 현실을 뒤집고, 환상은 또 다른 현실에 의해 전복되면서 끊임없이 그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는 관객이고 우리 앞에는 극장이 있다, 라는 점이다.
<발라간칙〉의 사건은 기존의 극적 갈등과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도 특징할 사항이다. 인물들 간의 대화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의 서정시를 나누어 옮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들의 대회는 일반적이고 관습적 의미의 대화라기보다는 무언가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하며 자신들의 공포를 탐닉하는 시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신비의 대상이자 오랜 기다림 끝에 도래하게 될 이상은 삐에로에 의해서 일차적으로 도전을 받고, 아를레낀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모욕 받는다. 신비주의자들에게 '죽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꼴롬비나를 아를레낀이 유혹하여 데리고 나감으로써 그들의 '구원의 이상, 영원한 소피아는 꼬메디 델아르떼적 인물들의 장난스럽고 바보스러운 사랑 이야기 안에서 조롱당한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발라간칙〉은 상징주의자들에게 큰 배신감과 충격을 준 것이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심각함이 익살로 전복되는 세상 - 망토를 두르고 낫을 걸머진 '죽음' 이 마분지로 된 꼭두각시 인형 꼴롬비나로 변하고, 봄빛 찬란한 황금의 창’은 종이처럼 찢겨나 가며, 광대는 죽어가며 피 대신에 붉은 열매 클륙 주스를 쏟고, 장대한 코러스의 횃불은 어린아이들의 불꽃놀이로 변하며. 모든 인물이 순식간에 '민속 박물관의 인형'처럼 변하는 세상 - 그리하여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이 우스꽝스럽고, 뒤둥그러 지고, 왜곡되고, 부자연스러운 세상 - 이것이 알렉산드르 블록과 메이에르홀드가 만들어 놓은<발라간칙〉의 세상이자, 그 안에 담긴 그로테스크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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