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마중쥔 '붉은 방, 흰 방, 검은 방'

clint 2015. 11. 6. 21:21

 

 

 

 

 

세 개의 방, 세 가지 인생
붉은 방에 세들어 사는 네 명의 도로 공들에게 어느 날 한 미혼모 아가씨가 찾아든다. 아이의 아버지 인 리홍씽이라는 이름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를 찾는다. 도시 노동의 권태와 젊은 혈기를 어쩔 줄 몰라 하며 살아가던 건달과도 같은 이 도로공들은 호기심 반 장난 반으로 이 아가씨에게 거짓말을 해대며 그녀를 붙잡아두려고 한다. 34년 인생에 처음으로 연애라는 것을 해보려는 한 동료를 야멸차게 따돌리면서, 이들은 보기에도 그럴듯한 거짓말을 꾸며내 리홍씽은 출장 중이며 돌아오는 대로 아기와 엄마를 위한 결혼식을 거행할 것이라고 둘러댄다. 아슬아슬한 곡예와도 같은 이 거짓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이 아가씨 거팅즈는 자신을 배신한 남자에 대해 진지하고 순박한 애정을 단 순간도 잃지 않으며, 거칠고 부식한 도로공들은 순박과 정결의 화신과도 같은 거팅즈로부터 자신들이 살아오면서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인간미를 느끼게 된다. 비극적 출생과 청년기의 비극적 첫사랑으로 인해 왜곡과 부정의 인생관을 갖게 되어 거짓말과 허풍으로 꽉 찬 인생을 살아온 도로공의 우두머리 허수이푸, 소심하지만 듬직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결혼이 인생 최대의 목표인 장푸꾸이, 허수이푸의 추종자인 똘마니 샤오우즈, 그리고 나이트를 전전하면서도 여자와 한 번도 춤을 추어보지 못하고 구경만 하고 다니는, 계집애라는 별명의 센따마오, 결말에 가서는 뻔히 들통이 나고 말 거짓 혼례식을 준비한다.
흰 방의 주인인 닝나는 자기가 배정받은 청소부일이 부끄러워서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모자를 눌러쓰는 새침데기 아가씨다. 직장을 바꾸는 조건으로 예망이라는 지식인 출신의 아마추어 화가와 거주지를 바꾼다. 채광이 부족한 어둠 속에서 그림을 그려온 예망은 빛이 잘 드는 흰 방에서 열심히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며, 닝나는 이 화가로부터 인간이자 여자로서 인정받기를 원하며 그의 누드모델을 자청한다.
검은 방에는 아이영감이 살고 있다. 나무에 딱 붙어서 나무의 기를 받고, 하루에 이백 번 씩 이빨을 딱딱 마주치는 치아보건체조를 하며, 소변을 볼 때 숨을 끝까지 참아가면서 건강과 장수를 위해 녹색기공을 연마하는 아이 영감은 서태후의 장수 법을 본 따서 들고 다니던 지팡이로부터 젊음을 빨아들이고는 회춘을 느끼며 지팡이를 뜰에 꽂아놓는다. 그러나 늘 사이가 좋지 않은 붉은 방의 세입자 도로공들로부터 놀림과 업신여김을 당하고, 말 안 듣는 노처녀 큰 딸 닝헝으로부터도 따돌림을 당하면서 그의 장수의 비법도 소용이 없는 듯하다. 마침내 붉은 방의 가짜 혼례식이 있던 날 아이영감은 단 하나 믿어왔던 막내딸 닝나가 모델이 된 누드화를 발견하고는 충격으로 죽고 만다. 그가 즉은 뒤 그가 꽂아놓은 지팡이에서는 새싹이 돋는다.

 

 

 

가짜 혼례의 세례와 두 개의 상징, 싹이 튼 지팡이와 조화 화환
이 연극은 혼한 사기극의 구성을 갖는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시작한 연극이,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으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속는 자는 물론이고 속이는 자 내부로부터 마저도 거센 저항을 받으며 진행되던 속임수가 마침내 탄력을 받으면서 속도를 더해가고, 마침내는 속이려던 자 자신도 걷잡을 수 없이 그 속임수 속으로 말려들고 만다. 이 속임수 사기극의 화룡점정을 장식하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시종일관 속던 자가 자신을 속이던 나머지 전체를 속이는 눈물겨운 가짜 연극이다. 닝헝으로부터 사건의 전모를 전해들은 거팅즈는 사기극을 통해 자신을 구원해주려고 하던 정신적 불구자와도 같던 도로공 일당들의 사기극을 완성해주는 감동적인 속임수 연기를 통해서 사기꾼들을 구원한다. 이렇게 하여 이들이 행하는 가짜 결혼식은 이들 모두를 구원하는 정신적 세례식으로 뒤바뀌며, 투박한 무식함과 왜곡된 반항만을 지닌 건달 도로공들은 이 세례를 통해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으며 동화 속의 왕자로 거듭나게 되고, 어수룩하고 순박하기만 하던 이 시골아가씨는 순백의 세례를 베푸는 정결한 여신으로 화한다.
구원을 가져다주는 이 순백의 세례는 붉은 방 식구들만을 위한 건 아니다. 붉은 방, 흰 방, 검은 방의 거주자들은 1980년대 중반 문화대혁명의 종결에 이어지는 개혁개방의 공간을 살아가는 중국인의 다양한 군상을 보여준다. 허수이푸와 닝헝이 공통으로 보여주는 왜곡과 반항은 문화대혁명의 상처로 인한 것이었다. 허수이푸가 시종일관 거침없이 쏟아내는 현란한 수사의 허풍은 기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등 극심한 정치적 격변을 통해 중국공산당이 인민들에게 남발한 말잔치를 그대로 옮긴 것들이었다. 기기묘묘한 정치적 수사와 이데올로기의 속박, 군중의 광기가 극에 치달았던 문화대혁명, 그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말살되는 인간의 존엄성, 한바탕의 폭풍이 몰아친 뒤 찾아온 뜬금없는 개혁과 개방의 물결,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자아 정체성과 방향을 상실하고 표류하는 개혁개방의 신세대는 닝나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따기도 하고 잃기도 하는 마작이란 놀음의 속성처럼 재산을 몰수당했다가 환수 받은 전통 지주 출신의 아이영감은 물론 역사의 발전의 과정에서 사라져버리게 되어있는 전통의 상징이다.
이들 군상들은 한바탕의 속임수 사기극 속에서 서로 속고 속이고. 동상이몽처럼 각자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던 끝에 결국 가짜 혼례식의 세례를 통해 저마다 자신의 참모습을 찾고 거듭나게 된다. 영문도 모르게 걸려있던 조화 화환은 거짓과 상처로 점철된 어제에 안녕을 고해주고, 노인이 무병장수의 도구로 사용하던 지팡이는 노인의 죽음과 동시에 새로운 싹을 틔운다.

 

 

 

 

작가 마중쥔과 그의 연극세계
이 작품의 작가 마중쥔(馬中駿, 1957- )은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인 도로공들이 속한 상하이 건설국 소속의 노동자 작가이다. 그는 문화대혁명이 종결되고 개혁개방의 바람이 일기 시작하던 1979년부터 TV드라마를 통해 창작활동을 시작하였고, 1980년 전국 노동자 문예공연에 출품한 단막극 〈집 밖에 열기가 있어〉, (우리나라에는 계간문예 1992 겨울 호에 오수경 교수의 번역으로 소개됨) 통해 전국의 연극계에 하나의 뜨거운 "열기”를 일으킨다. 이 실험극은 청년들에게 편협과 이기심이라는 음습한 소천지에서 벗어나 생활의 열기를 향해 이상을 추구하고 열정과 애정을 찾을 것을 강력히 호소하며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이상과 열정을 잃어버린 젊은 세대들을 고무한다. 이러한 고무적인 주제에 걸맞게 이 극에서는 대담한 실험정신을 발휘하여 연극계의 갈채를 받는다. 소품에 가까운 이 단막극 안에는 리얼리즘적 인물, 부조리 적이고 표현주의적인 기법, 상징주의 적 비유와 초현실주의 적 줄거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져있다. 짧게는 문화대혁명 내내, 길게는 중국에 서구 연극이 소개된 이래 속박에 가깝도록 연극의 내용과 형식을 압박한 리얼리즘{ 특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천편일률을 박차고 나가 80 년대 중국 연극계에 활기찬 실현과 탐색의 열기를 형성한 것이 바로 이 작품에서 비롯된다.
마중쥔은 연이어 〈길, 1981>, 〈거리에 유행 하는 붉은 치마 1983), 〈붉은 방, 흰 방. 검은 방〉(1985), 〈노풍류진, 1988) 등 굵직굵직한 실험극 걸작을 발표한다. 〈길〉에서는 의식의 흐름을 적극 활용하며 "심리적 논리에 입각한 서사"를 통해 “생활 논리에 입각한 서사” 를 대체하고 “정서 변천에 입각한 구성”을 시도한 다.〈거리에 유행하는 붉은 치마〉는 전형적인 리얼리즘 연극이지만 종래 연극에서 찬양하던 영웅적 모범노동자를 교조적이고 도식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영광 이면의 갈등과 충돌을 부각시킴으로써 진정한 리얼리즘 적 형상화를 실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집 밖에 열기가 있어〉와 〈길〉에서 다소 생경한 방법으로 시도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강제적 접합이 좀 더 세련된 모습으로 표출되는 것이 바로 〈붉은 방, 흰 방, 검은 방〉에서이다. 줄거리와 인물 성격의 변화가 "실(實)"의 묘사에서 "허(虛)"의 묘사로, 리얼리즘에서 상징주의에로 점차 옮겨가는 이 변천과 융합의 방향은 미중쥔이 선택한 연극의 중국화의 출로이다.
이처럼 다양하고 대담한 실험과 탐색의 정신은 마중쥔의 연극세계를 대표한다. 그리고 이 실험정신은 바로 1980년대 중국 연극계의 화두였다. 10년 이내에 보여준 마중쥔의 다양한 실험극이 대변하듯이 1980년대 중국 연극계에서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서구 연극계에 출현한 거의 모든 현대 실험극 기법이 짧은 기간 동안 붓물 터지듯 집중적으로 시도된다. 이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중국의 전통극과 판이하게 다른 서구극(중국에서는 이를 화극이 라고 부른다)이 중국에 소개된 20세기 이래 시종일관 천편일률적으로 연극계를 주도한 리얼리즘 사조가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극단적으로 강화되어 연극 및 영화계를 질식시켰던 숨 막힘에 대한 폭발적 반작용이기도 하다. 연극계에도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개혁과 개방의 물결이 밀어닥친 것이다.

 

 

마중쥔(馬中駿)
1980년대 초기 중국 연극계의 동향을 살펴보면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경파” 연극에 서는 형식과 기법의 개혁 이전에 내용적 개방을 우선시하여 전통적 연극미학을 준수하는 대신 종래 문예계에 존재하던 금기와 성역을 주제적 측면에서 돌파하는 데 주력했다면, 상하이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해파” 연극에서는 주제적 측면보다는 다양한 연극사조와 기법의 실험에 열중하는 경향을 띠었다. 북경인민예술극원의 가오싱젠의 작품이 발표되면서 경파와 해파를 막론하고 전국적으로 실험과 탐색이 본격 시도된다.
마중쥔의 작품〈붉은 방, 흰 방, 검은 방〉은 바로 1980년대 해파 연극의 실험정신을 대표한다. 문화 대혁명의 상처를 부여안아주고, 인간 본연의 순결과 존엄을 강조하며,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되하고 있음에서 이 작품은 주제적으로도 1980년대 중국 문예계의 세 가지 화두 -상혼문학, 인본주의논쟁, 뿌리 찾기, 열기 - 에 닿아있고, 전형적 리얼리즘에 중국 전통의 상징주의 미학을 가미하여 기법적인 측면에서도 1980년대 개혁개방 시기의 실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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