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페드로 안토니오 데 알라르꼰 '삼각모자'

clint 2015. 11. 4. 22:18

 

 

 

 

 

 

19세기 스페인 사실주의 작가인 알라르꼰의 작품이다. 불발로 끝난 이중 간통을 주제로 하고 있다. 오후와 밤과 새벽으로 구분되어 1805년 어느 하룻밤 동안에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스페인 남부에 있는 한 마을의 방앗간을 무대로 펼쳐진다.
활달하고 정열이 넘치는 스페인 사람들은 누구나 다 이 물레방아간의 전설을 알고 있다. 아주 어린 아이 일 때부터 그들은 이 얘기를 너무나 재미있게 듣고 아슬아슬 땀을 쥐고 막판에는 신나는 웃음을 웃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뚱뚱한 신나는 웃음을 웃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뚱뚱한배의 주인 시장의 머리 위에 얹혀 있을 커다란 “삼각모자”의 허황된 권위를 조소하고 물레방앗간 주인부부의 흐뭇한 사랑에 일찍이 경건해졌을 것이다. "알라르꼰” 의 “삼각모자‘는 바로 그 오랜 전설을 가장 스페인사람 기질에 맞게 풍자적으로 그리고 재미있게 희극 화시킨 작품이다.
스페인의 “안달샤”라는 그리 크지 않은 도시,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 철마다 꽃이 피고 맛있는 과일이 익는 아름다운 마을에 물레방아간이 하나 있다. 그리고 그 방앗간에는 단 두 식구 부부가 살고 있는데 그들의 애정은 말할 나위도 없고 주인인 루카스는 호인에 정직한 사람이고 부인 후라스키이타는 우아하고 아름답고 솜씨 좋고 풍만한 육체를 가진 여자라서 모든 남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다. 특히 이 市에서, 에스파냐에 군림하시는 폐하의 위엄과 권위를 대표하며 그러나 백성들 살림엔 마음이 없고 우스꽝스럽도록 커다란 삼각모자와 눈부신 빨간색 나사외투를 걸치고 다니시는 시장나리께선 유별나게 후라스 키이타에게 마음이 있었으니 …. 시장님은 자신의 세력으로 후라스키이타의 환심을 사보려 하지만 부부의 굳은 사랑은 모든 위험을 이겨내고 오히려 권력배후의 허황됨을 간파하게 된다.

 

 

 

1976년 4월 16일~19일 시민회관 별관에서 민예극장 허규 연출로 공연.
공연 평 - 이상일
극단 민예의 코미디는 표현력이 따르지 못하는 우스운 시추에이션의 설정과 함께 주제 의식을 너무 선명하게 밝힘으로써 오히려 주제가 초라해지는 그런 묘한 관극 체험을 안겨 준다. 관객을 의식한 웃음의 조성은 코미디 연출의 필수적인 과정이겠지만, 그것도 지나치게 의도적인 경우이면 연기 자체가 너무 인위적으로 흘러서 자연스러움이 없어진다. 금년 들어 우리나라 직업극단들의 연극은 모두 억지웃음의 조작에 몰두하였다. 소위 코미디물에 치중하면서 주로 리바이벌에 매달려 있는 실정 아래 리바이벌이라 해서 나쁠 것이 없고, 코미디라 해서 시비될 까닭은 없지만 그 공연 제작물들이 한결같이 텔레비전 코미디의 저속성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연극 드라마의 희극문학이 가지고 있는 정통성은 결코 저속하지 않다. 그런데도 코미디가 저속해 보이는 것은 그 흐름을 이어가는 연기의 표현력이 어설프기 때문이다. 작품세계에서 우러나는 웃음을 중시하지 않고 괴상한 몸짓이나 흉내, 맵시, 걸음걸이, 고함소리 등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경우 그것은 쉽사리 저속해질 가능성을 스스로 안고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희극성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지엽적인 요소 때문에 웃는다고 한다면 그 코미디는 소극화 된 것이다.
대체로 금년 들어 우리나라 연극은 그런 파르스(farce)에 집착해 있고, 코미디와 파르스를 식별조차 못하는 딱한 처지에 빠져 있다. 그만큼 연극이 버림받고 있는 것이다. 정통 연극이 설 땅이 없이 드라마의 세계는 검열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어 버리고 관객들도 연극을 외면한다. 웃음으로써라도 떠나는 관객들을 붙들려는 이 직업극단들의 안간힘은 눈물겹다. 조금이라도 웃음을 선사하려는 연출자나 연기자의 배려에 대해 관객들도 그만큼 웃어 주어야 하는 것이 도리이다. 그리고 웃음은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웃음이다.
극단 민예의<삼각모자>도 그런 테두리 안에서 봐야 할 것이다. 관객에 대한 웃음의 선물, 그리고 주제인 권위주의에 대한 풍자, 이 두 가지는 나란히 설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 두 가지는 갈등을 일으키며 무대 위에서 생경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별로 알려져 있지도 않은 스페인의 작가 알라르콘(Alarcon)이 쓴 소설이 왜 하필이면 각색되어야 했던가는 논의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소설의 희곡적 구성에 대한 평가는 연출가(허규)의 영역이 아니었던 것 같다. 끝부분에 가서 이 코미디의 구성은 가운데쯤에서 간신히 몰아 울린 코믹한 상황의 극적 조성을 철저히 풀어헤쳐 버린다. 마지막 부분은 코미디로 봐서는 사족이었던 것이다.

 


<삼각모자>라는 작품 속에는 땅에 떨어지는 관권의 꼭두각시가 있고, 소박한 부부의 사랑도 있다. 물레방앗간 여편네를 탐내는 사장 나리가 한껏 꾀를 내어 주인을 잡아 가두고 어쩌고 하지만 결국 톡톡히 창피만 당한다는 이런 유사한 이야기는 무슨 거창한 민중의식을 내걸 것도 없고, 단순히 웃고 넘기는 ‘꾀돌이 이야기’의 한 변형일 따름이다. 스페인 민요 ‘시장님과 물레방앗간 주인’의 발라드(담시) 정도라면 그 스토리 성 가운데 이미 민중적인 재치나 해학이 반드시 정치성을 띤 풍자의 모습을 갖추지 않은 서정으로서 원작소설 속에 침전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연극적인 포인트는<삼각모자>의 권위에 대한 허구성의 폭로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민중적인 애환과 그 교활할 정도로 약은꾀의 전개에 기본적인 톤을 두고 그것을 살리는 방향에서의 콘트라스트가 이루어져야 했다.
왜 하필 꼽추노인의 아내는 미녀이고 풍만한 육체의 소유자였겠는가. 그것은 코미디에 있어서 몰리에르 식 사고방식에 입각한 비정상의 웃음의 효과를 위한 것이다. 왜 주역 셋이 모두 꼽추인가. 그들은 웃음을 만들어낼 정상의 이탈자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발라드 양식에서 따낸 소품의 풍자소설이 연극화되었다 해서 갑자기 정치 극이 될 수는 없다. 민요적인 시정을 곁들인 흐뭇한 웃음의 이야기 줄거리에 송도영이 분장한 후라스키이타라는 촌부의 영역이 너무 크게 드러나는데, 그것은 연출의 고삐가 약했거나 송도영의 개성이 강 했거나 로 귀착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무대의 사실성은 소박한 사실주의에 근거를 둔 서정의 미소를 계산하지 않고 너무 큰 홍소를 겨냥한 설정인데, 정치적 풍자를 노린 비정치적 소재와의 갭은 웬만한 연극적 감각이면 캐치할 수 있는 갭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공간, 1976. 4)

 

 

 

Pedro Antonio de Alarcó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