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폴커 브라운 '힌쩨와 쿤쩨'

clint 2015. 10. 28. 22:31

 

 

 

 

브라운의 두 번째 극작품인 '힌쩨와 쿤쩨' 역시 '키퍼' 와 같은 맥락의 작품이다. 브라운은 '힌쩨와 쿤쩨'에서 보다 강력하게 제시된 역사의 본보기를 얻으려고 애쓰고 있다. 이 작품을 쓰려는 이유 중의 하나는 40년대와 50년대 거의 기적처럼 보이는 업적을 개체들이 어떻게 이루어내었는지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리고 개체가 사회적으로 특별히 유용한 임무를 받고 그렇게 권력과 전권을 얻었을 경우 개체의 힘들은 확대되며 그로 인해 개체는 더 이상 제한된 개인으로만 머물지 않는 인물이 된다는 기이한 일이 일어난다. 이 아이디어가 브라운의 작품에서 드라마적 특색이다.
『힌쩨와 쿤쩨』 드라마의 배경은 전후 페허가 된 1948년경의 구동독이다. 1945년에서 1949년 소련이 점령지역에서 물러날 때까지 만들어진 정책들은 바로 그 후 동독사회주의 건설에 기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당의 슬로건은 "더 많이 생산하고 정당하게 나누고, 더 잘살자!" 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대답은 "우선 잘 먹고 그다음에 일하자" 였다. 이는 하나의 악순환이었다. 그러나 1948년 10월 13일 광부 아돌프 핸네케는 이 악순환을 깨는 실례를 남겼다. 그는 6.3 평방미터라는 규정량 대신에 24.4 평방미터라는 많은 량의 탄을 캐내고 만 것이다. 책임량보다 387 퍼센트가 많은 양이다. 이 성과는 육체적인 노력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개선된 노동 작업 준비와 노동자들의 위대한 행동만이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공산주의의 정치적 확신의 결과였다. 문제는 아돌프 헨네케 가 남다른 체력을 가진 사람도 아닌 보통의 광부라는 사실이다. 건강한 신체가 가져온 결과가 아니라 사회주의에 대한 확신이 가져온 결과였다. 이때부터 아돌프 헨네케처럼 일하자는 슬로건이 생기기 시작했다. 탄광의 광부들은 좋지 않은 반응을 보였으며 헨네케를 규정 파괴자로 몰았다. 그러나 핸네케의 행동은 소련 점령지역에서 '악티비스트 운동' 의 계기가 되었으며 책임량을 올리려는 움직이 있었고 이는 바로 다른 광부들의 임금 삭감과 연관된다. 결국 1953년 6월 사회통일당은 책임량을 10퍼센트 올렸고 이에 1953년 6월 17일 베를린 시위로 번지기까지 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힌쩨는 바로 1948년 노동자의 영웅 아돌프 헨네케를 그 모델로 하고 있다. 이 드라마에서 힌쩨 역시 규정량의 400 퍼센트라는 많은 탄을 캐내고 당은 그를 노동자의 영웅으로 만들지만 다른 광부들에게는 '규정 파괴자, 목을 벨 놈, 팔려간 놈'이 되고 만다.
브라운의 새로운 희곡론에서 말하는 이끄는 자와 이끌리는 자 사이의 모순이 『힌쩨와 쿤쩨』의 테마이다. 이끄는 자인 쿤쩨에 대한 이끌리는 자, 힌쩨의 결속은 모순적인 만남으로, 즉 두 사람의 발전은 백성과 당의 변증법으로, 민주주의와 중앙 집권제의 변증법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심미적인 일면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브라운의 작품을 연대사만으로 유형지을 수 없다. '힌쩨와 쿤쩨'는 두 가지 유형 사이에 특별한 방법으로 서있다. 즉, 연대사에 일치하는 자료를 사용하면서 전승된 문학 전통,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본질적인 기본구성을 빌려 쓰고 있다.
구동독에서 파우스트의 신화는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듯이 그렇게 잘 보관되어 있다.
이 말은 고전주의적 유산으로 가꾸어지고, 악용되는 것을 막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랫동안 문화정책상 보호되어 있던 괴테의 '파우스트'는 더욱 그러하다. 동독의 문화 보호자들은 괴테의 『파우스트』가 긍정적인 주인공을 가진 '낙관적인 비극'으로 이해되기를 원했다. 사회통일당 제1서기 발터 울브리히트는 1962년 3월 28일 '동독의 국민에게' 라는 글에서 ''동독에서 사회주의의 승리와 통일된 평화로운 민주주의적 사회주의 국가로의 전 독일국민의 통일은 파우스트의 3부에서 끝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마지막 장을 동독 국민과 서독 국민이 - 형제처럼 하나가 되어 - 함께 형성할 것이다"라고 피력하면서 파우스트 2부에서 나오는 "자유로운 땅 위의 자유로운 백성"을 바로 동독의 상황으로 보았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동독의 참고문헌 도처에서 "행동하는 애국자”, "사회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 결심한 민주적 지도자”등으로 찬사되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바로 동독 국민의 이상이었다. 이미 1951년 사회통일당 중앙위원회(SED)는 고전주의문학의 수용을 문화정책의 목적으로 표명했다. 「예술과 문학에 있어서 형식주의에 대한 투쟁, 진보적인 독일 문화를 위하여」라는 글에서 "독일 국민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민족적 문화유산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들 독일예술가와 작가들 앞에는 문화유산을 이어받은 하나의 새로운 독일 민주주의적 문화를 발전시키는 과제가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1952년 브레히트의 '파우스트'초고가 베를린 무대에 아이슬러의 오페라 『요한 파우스트』가 포츠담과 베를린 무대에 올려졌을 때 브레히트의 작품은 '새로운 독일' 이라는 신문에서 '고전적인 것의 변조'이며 '올바른 고전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대표작에는 맞지 않다.'라는 평을 받았으며 아이슬러의 『요한 파우스트』역시 '고전주의의 손상'이라는 평을 받았다. 브레히트와 아이슬러가 파우스트를 부정적인 주인공으로 묘사하려고 한 것은 이렇듯 동독 문화관료주의와 대립을 불러 일으켰다. 한 마디로 동독에서 『파우스트』는 손 댈 수없는 고전주의 유산이었으며 절대로 손상되어서는 안되는 부분이었다.

 

 


폴커 브라운이 1968년 '한스 파우스트'을 바이마르무대에 올렸을 때 그 역시 브레히트나 아이슬러와 비슷한 상황에 부딪쳤다. 초연에서 관중과 비평은 이 작품을 거부적으로 받아들였으며 브라운은 말없이 자신의 작품을 철회했고 독일극장은 연출권을 되돌려주었다. "일종의 사회주의적 반 파우스트"를 쓰려는 시도가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개작에 들어갔다. 여러 차례의 손질을 거쳐 마침내 울브리히트의 시대가 끝난 1973년 『힌쩨와 쿤쩨』가 카알-마르크스시타트의 무대에 올려졌 다. 그러나 '힌쩨와 쿤쩨'는 호의적으로는 수용되었지만 이 작품은 중요한 상연이었으며 사회에 대한 개인의 입장이라는 토론으로 이끌었다는 조심스러운 비판을 받았을 뿐이다. 이 작품은 카알 마르크스 시다트에서 1973년에 상연된 뒤 1975년에 출판되었다. 폴커 브라운 자신은 이 드라마의 생성기를 1967년에서 1977년으로 보고 있다.
구동독의 건설기적에 관한 이 드라마에 내재해있는 문제점을 찾으려는 점에서는 괴테와 '파우스트'와의 대조를 불가피하게 하고 있다. 『파우스트』와 대조해보면 등장인물 구성에서 가장 많은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힌쩨를 파우스트에 비유하면 쿤쩨는 메피스토이며 힌쩨의 아내 말리스는 그레첸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인물구성을 지니고 있다. 두 번의 전쟁, 황폐, 대중의 무신경을 체험하면서 미장이 힌쩨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변화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힌쩨에게 불만스러운 상태의 극복을 위한 진정한 길과 방법을 가르쳐주고 함께 한걸음씩 나라를 변화시키려는 사람이 바로 쿤쩨이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계약이 이뤄진다. 여기서 쿤쩨는 이끄는 자이고 힌쩨는 그에게 이끌려 가는 자이다. 브라운의 힌쩨는 괴테의 파우스트 못지않게 불만이 많다. 그러나 이는 자신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불만이다. 힌쩨는 무조건적인 지식욕도 느끼지 않으며 공동체의 버팀목 없이는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조차 깨닫고 있다. 쿤쩨의 설득에 끊임없이 방황하고 망설였던 그였지만 어느 순간 그는 아돌프 헨네케를 무색하게 할 정도의 많은 양의 탄을 캐고 노동자의 영웅이 된다. 그러나 "멈추어라 너는 너무 아름답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파우스트의 메피스토와 비유될 수 있는 쿤쩨는 지옥, 즉 강제수용소 출신이다. 여기서 그는 확신하는 당노동자이며 사회지도자이다. 그는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도시에서 잔해 제거를 위하여 굶주리고 어리석은 백성을 쫓아다니면서 혀가 닮도록 설득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선 더 많은 빵을 요구하고 그는 그런 사람들을 일하도록 몰아붙인다. 힌쩨가 노동자의 영웅이 된 다음 두 사람의 역할은 바뀌고 힌쩨와의 계약이 깨지자 확신하는 당노동자인 쿤쩨 스스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하여 치러야 하는 희생이 너무 크지 않느냐 하는 의문에 사로잡힌다. 드라마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그의 긴 독백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죄책감과 좌절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인물구성에서 가장 큰 변화는 힌쩨의 아내 말리스에게서 가장 뚜렷하다. 말리스 이야기는 괴테의 그레첸 이야기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즉, 힌쩨와의 작별장면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작별장면은 감옥에서가 아니라 정전으로 인해 어두워진 힌쩨의 부엌에서다. 힌쩨가 쿤쩨를 따라 전쟁 후 폐허가 된 도시를 구하기 위해, 잔해 제거를 위해 떠나자 그의 아내 말리스는 결국 혼자 남게 된다. 그녀 역시 잔해 제거하는 일을 하면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분투한다. 그러나 3년 후 힌쩨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그레첸과 유사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녀는 잔해 제거하는 여성에서 실험실의 화학자가 될 때까지 3년동안 자신의 가혹한 삶을 힌쩨에게 이야기하면서 그를 더 이상 남편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 딴 여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충분히 먹지 못해 뱃속에 있는 아이를 잃어버린 그녀는 이제 다시 아이를 원한다. 그것이 힌쩨의 아이든 쿤쩨의 아이든 그녀에게는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녀는 실험실에서의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출산을 포기해야 한다. 그녀에게 출산은 공동체의 일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아이를 희생시키고 위대한 작업 기적을 이룬다. 결국 모성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사회주의 건설 때문에 희생을 당해야 한다. 이점에서 볼 때 말리스의 운명은 역사적인 거리를 간과하지 않더라도 그레첸의 비극 못지않게 비극적이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개인의 희생은 어디까지 가야하는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힌쩨가 3년 뒤 말리스를 찾아왔을 때 그녀는 힌쩨에게 "당신은 민주주의에 대하여 모르는 것 같군" 이라는 말을 한다. 그녀의 질문에 힌쩨는 그레첸 질문이라고 답변한다. 이 그레첸 질문이 이 드라마의 기본 구조이며,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모순을 보여주고 있는 브라운의 핵심적인 테마이다. 브라운은 의식적으로 사회의 개혁을 조직하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동시에 이를 제지하는 지도자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조직의 도구가 되는 노동자들 사이에 얼마나 끔찍한 모순이 이루어지는지 밝히고 있다. 힌쩨의 프로젝트는 "베를린에서 온 결정” 으로 중단되고 게다가 노동자들의 책임량은 점점 늘어난다. 그러나 이 결정은 다른 노동자들에게 묻지도 않고 이루어진 결정이다. 여기에 불가피한 동맹이라는 것이 너무 편중적이지 않느냐 하는 힌쩨의 회의가 생긴다. "그곳에서는 토론이 되지 않았다.”라는 문장 역시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힌쩨는 스스로 한 번도 질문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 이상 자신의 일에 의미를 찾지 못한다. 그는 정체성의 위기를 맞게 되고 과연 그들이 약속한 행복한 삶이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하는 결정적인 회의를 가지게 되면서 쿤쩨와 계약을 해약한다. 그의 절망은 말리스를 잃어버리므로 더욱 첨예화 된다. 사회주의 건설이 개인적인 희생을 정당화하는지? 자기실현은 항상 새로운 과제 때문에 미루어져야만 하는지? 한 세대는 미래의 행복을 위하여 포기되어야 하는지? 여기서 이 비판적인 질문들은 직접 대답되어지지 않고 관객에게 던져진다. 쿤쩨는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힌쩨라는 한 개인의 탓으로 돌린다. 그렇지만 힌쩨를 이 상황으로 몰고 간 것은 개인적인 좌절이기도 하지만 객관적인 모순이기도 하다. 그러나 힌쩨는 끝까지 좌절하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새로운 시작에서 절망은 사라진다. 그렇지만 쿤쩨가 내미는 손을 그는 더 이상 잡지 않으며 지금까지 이끌리는 자였던 힌쩨는 이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끌어 나가려 한다. 이것이 바로 부정 속의 긍정을 말하며, 좌절 속에도 희망을 보여주려는 브라운 문학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그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끊임없는 현실비판을 통해 체제 및 지배구조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 드라마에서는 오랫동안 동독 문학에서 거의 타부 시 되었던 성에 대한 묘사가 직설적으로 또는 상징적으로 그려지고 있어 70년대 동독문학의 새로운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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