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존 웹스터 '하얀 악마'

clint 2015. 10. 29. 07:49

 

 

 

 

 

 

「하얀 악마』의 서문이 어느 정도 불만에 차있다는 점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웹스터는 당대 에 가장 인기 있는 극작가들 중의 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극에 관한 수많은 인쇄물과 재공연 기록은 그의 인기가 상당히 지속적인 것이었음을 증명해준다. 반면 18세기 동안에는 셰익스피어에 대한 관심이 점증하면서 웹스터의 인기는 쇠퇴하게 되고 그의 극도 거의 공연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찰스 램(Charles Lamb), 월리엄 해즐릿(William Hazlitt)과 같은 낭만주의 비평가들이 웹스터의 작품에 나타난 비극적 상상력의 진가를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20세기에 이르는 동안 쟈코비언 시대의 극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웹스터도 새로운 주목을 받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인정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는 학자들이 그의 극 속에 나오는 거의 모든 문구와 개념들의 문학적인 출처를 다 밝혀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극이 기존의 다른 작품들에서 광범위하게 차용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경우가 그랬던 것처럼 웹스터 역시 자신의 작품을 단지 부적합한 차용품들의 혼합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스타일로 독창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웹스터가 극을 썼던 쟈코비언 시대의 극에는 질서 이면에 존재하고 있는 혼돈이 전반적인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 그 혼돈은 질서, 법칙, 우주적 조화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인간의 잠재적 힘에 대한 신뢰에 기반을 둔 그 이전의 엘리자베스 시대의 세계관에 외문을 표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쟈코비언 시대에 영국 사회가 관심을 갖게 된 마키아벨리즘의 부정적 측면 역시 웹스터의 극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 쟈코비언 시대의 극에서 마키아벨리즘은 그 원천이 무엇이든 간에 무신론, 독살, 기만, 위선, 모함 등 모든 종류의 사악한 행위에 무분별하게 적용된 용어로서 철저한 물질주의나 극히 냉소적인 개인주의를 배경으로 하여 마키아벨리적인 악의 힘을 묘사한다. 마키아벨리즘에 대한 높은 관심은 전통적 가치에 대한 믿음의 쇠퇴를 더욱 부채질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회적으로 혼란한 비도덕적 세계를 목적 없이 표류하도록 남겨졌다는 공통적 두려움을 조장했다.

 

 

이런 비관적인 세계관의 영향이 분명한 듯이 보이는 『하얀 악마』는 1612년 로즈 극장에서 초연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으로서 인간 존재를 둘러싼 어둠과 이 세상의 악과 고통에 대한 웹스터의 심오한 의식을 반영한 작품이다. 먼저 이 극의 제목인 “하얀 악마”는 직접적으로는 외면적 모습은 하얗지만 내면은 검은 악마인 비토리아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더 확대해 보면 겉과 실제가 다른 빛의 천사로 변장한 악마들인 대다수 등장인물들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궁정 속에 사는 이 극의 인물들은 거의 모두 겉과 속이 다르다. 그들은 미소를 지으면서 마음속으로는 살인을 계획하고 있다. 웹스터는 특히 많은 동물 이미지들을 사용함으로써 관객의 관심을 끊임없이 인간 행동의 이면에 있는 동물적인 행동이나 습성에 쏠리게 한다. 그는 또한 마법, 환영, 독약, 변장과 관련된 많은 이미지들을 사용한다. 그리고 물론 이것들은 이미지일 뿐만 아니라 극중 행위 속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실제 사건들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비관적인 세계관과 풍부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이 극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에 기반을 둔 것으로 사랑, 살인, 복수에 관한 복합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그리고 여기에서 웹스터의 주된 관심은 플롯과 인물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이 세계에 대한 관점에 있다. 이 극의 플롯은 각자의 배우자에 대한 살인을 공모하고 지휘하는 브라쉬아노 공작과 비토리아 사이의 열정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그리고 이들의 행위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복수를 유발하기 때문에 이 극에는 여러 개의 복수 구조가 있다. 브라쉬아노의 처남 프란체스코는 자신의 누이, 이사벨라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기 위해 브라쉬아노와 비토리아에 대한 살인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몬티첼소는 복수를 위해 친척인 까밀로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만들 준비가 되어 있다. 로도비코는 프란체스코를 위해 일하면서 자신의 자존심을 만족시키는 복수자이며 결국 목숨을 잃는다. 이렇듯 웹스터가 제시하고 있는 세계는 욕망과 살인, 복수가 난무하고 열정적인 감각 이외에는 도덕성이나 그 어떠한 다른 감정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혼돈 속에 있다. 이 타락한 세계의 중심에 비토리아의 오빠이며 브라쉬아노의 서기관인 플라미네오가 있다. 플라미네오는 냉소적이긴 하지만 빈번하게 극중 행위에 대해 평가를 내리기 때문에 희랍 비극의 코러스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철저하게 비도덕적이고 비양심적인 그는 자신의 상관인 브라쉬아노와 누이동생의 매춘 주선뿐만 아니라 살인마저도 서슴없이 감행하는 등 전형적인 마키아벨리 적 인물이다. 그는 어머니에게도 비인간적일 정도로 차갑고 포악하게 대한다. 심지어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동생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기까지 한다. 여성에 대한 태도 역시 냉소 그 자체다. 그는 여성의 수줍음을 욕망의 겉모습일 뿐으로 간주하며 진실한 사랑을 믿지 않는다. 실제로 그가 장쉬를 대하는 마음에는 사랑이 없다. 그는 장쉬를 이용하기 위하여 그녀를 사랑하는 척할 뿐이며 그녀가 자신을 배반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그는 보라쉬아노에게도 여성과 사랑에 대한 자신의 사고방식을 주입시키려 한다. 이러한 행동과 신념을 통해 플라미네오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세속적 성공과 신분 상승뿐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교육을 많이 받은 플라미네오는 신분 상승을 꾀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는 아첨꾼이 되고 또 자신의 주군인 브라쉬아노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어떠한 일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궁정이 주는 보상에 대한 갈망만이 그의 마음속에 철저하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그가 보라쉬아노를 위해, 하고 있는 모든 것은 냉소적인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플라미네오가 궁정의 보상에 대해 갈망 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아무런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것은 마르첼로가 누이를 브라쉬아노에게 팔아 넘겼다고 비난할 때의 폴라미네오의 대답에 잘 반영되어있다. 즉 플라미네오는 군주에게 하는 그 어떠한 봉사도 모두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의 마음속에는 마르첼로의 정직한 군인정신과 자신의 신분 상승을 위한 부정직한 길 사이에 아무런 구분이 없다. 두 길 모두 결과는 가난일 것이며 혹은 로도비코가 이전에 그 비슷한 봉사의 대가로 받은 추방과 같은 것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실패를 예견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피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는 한편으로는 파괴적 교활함을 지닌 악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다른 등장인물들보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본성을 더 많이 깨닫고 있는 통찰력을 소유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통찰력은 브라쉬아노와 비토리아의 결혼, 그리고 그 후의 브라쉬아노의 죽음이 폴라미네오에게 신분상승에 대한 희망을 주면서도 결국 예견된 좌절을 가져올 때 분명히 감지된다. 그리고 이러한 좌절을 통해서 그는 신분상승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에 대한 한 본보기가 된다.

 

 

하지만 플라미네오의 신분상승에 대한 욕망이 좌절되는데서 오는 어리석음은 단순히 징벌 적인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서 신분이 높은 권력을 가진 자들은 모두 오로 지 파괴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권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과는 달리 웹스터는 권력이 더 이상 최고의 인성을 가진 자와 연관될 수 없는 세계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웹스터는 혼돈 속에 놓여 있는 어두운 세계에 관심을 두면서 플라미네오처럼 복합적인 속성을 지닌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플라미네오의 복합적인 속성은 특히 죽음의 순간에 그가 보여주는 자아 인식과 적극적으로 죽음을 수용하는 의연한 자세에 잘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웹스터의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묘사는 비토리아와 브라쉬아노에게서도 나타난다. 극의 초반에 비토리아는 결코 미덕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다. 그녀는 브라쉬아노에게 그의 아내와 자신의 남편을 살해하도록 은밀히 암시하며 간통을 범하려는 부도덕한 여인이다. 웹스터는 이런 사실들을 숨기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 대한 관객의 공감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비토리아는 의지력이 강하고 독립적이며 자기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살기를 선택하는 열정적인 인물의 면모를 갖게 된다. 타락한 궁정이나 교회에 맞선 강하고 두려움 없는 인물로서의 비토리아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3막의 재판 장면에서이다. 하지만 동시에 비토리아가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며 자신을 어둠 속의 다이몬드로 비유할 때에는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궁정은 부패하였고 재판은 협잡으로 가득 차있다. 재판관, 변호사, 검사가 모두 한 통속이고 재판은 죄악을 중명하기보다는 단정해 버리기 위해 진행된다. 따라서 비토리아의 어둠에 대한 비유는 정당하다. 그렇지만 다이아몬드가 찬란히 빛나면서도 순수한 속성을 지닌 보석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녀 자신의 다이아몬드에 대한 비유는 그녀가 저지른 죄악과 관련해서는 합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의 법적, 도덕적인 면과 인간의 양심적인 모든 면에서 가장 추악한 죄를 지은 비토리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순수한 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녀와 브라쉬아노가 갖고 있는 사랑의 가치 때문이다. 브라쉬아노의 사랑에 대한 필사적인 추구는 냉소적인 플라미네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 죽음이라는 마지막 순간에 비토리아의 이름을 다급하게 간절히 외치는 브라쉬아노의 모습에서 웹스터는 다시 한 번 인간 영혼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보여준다. 브라쉬아노는 정부였던 비토리아의 남편과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지만 여전히 한 여자를 위한 깊은 사랑을 할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즉 겉으로 보면 비토리아와 브라쉬아노만큼 위대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한, 그렇게도 타락하고 무자비한 두 사람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비토리아와 브라쉬아노가 많은 범죄를 저지른 후, 그리고 그들의 기대감이 자신들을 완전히 배반한 후에조차도 모든 악과 고통의 원천인 그들의 사랑은 강렬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남아있다. 웹스터는 보라쉬아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비토리아의 절망적인 모습에서도 그녀의 사랑이 진실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비토리아에게서 나타나는 것 역시 여러 자질들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인간의 심오한 모습인 것이다. 이러한 심오함은 비토리아가 죽음의 순간에 폴라미네오처럼 자신의 쇠락에는 자신의 책임이 있음을 느끼는 자아인식에 이르게 되고 동시에 자신은 단지 궁정이라는 타락한 혼돈스런 상황 속의 한 희생자임을 깨닫는데서 그 깊이를 더해간다. 비관적인 세계를 바탕으로 한 이러한 깊이 있는 인물 묘사가 이 극을 쟈코비언 시대의 대표적인 비극으로 손꼽게 하는데 충분한 타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존 웹스터(John Webster, 1580? ~ 1634?)의 생애는 최근에 와서야 그 일부 사실이 밝혀졌을 뿐 대부분 추측에 의한 것이 많다. 웹스터는 런던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마차 제조공 (coachmaker) 일을 했던 그의 아버지는 사업이 매우 번창하여 상인 재봉사 조합 (Merchant Taylors' Company)이라는 유명한 길드에 소속되기도 했다.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은 웹스터는 당시 권위 있는 상인 재봉사 학교(Merchant Taylors' School)에서 교육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학자들은 그의 극에서 느껴지는 탁월한 법률적 지식을 바탕으로 그가 법률 공부를 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웹스터는 1605년 경 사라 피니올(Sara Peniall)과 결혼해서 대가족을 이루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1634년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극작가로서의 웹스터는 런던의 로즈 극장(Rose Theatre)의 경영자였던 필립 헨슬로우 (Philip Henslowe)를 위해 대부분의 극을 썼다. 웹스터가 쓴 약 14편의 극은 토마스 미들턴 (Thomas Middleton), 토마스 데커(Thomas Dekker) 등 여러 작가들과 공동으로 집필된 것이 많다. 사실 웹스터 혼자만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얀 악마』(The White Devil, 1612)와 『말피의 공작부인』(The Duchess Of Malfi, 1613-4) 두 비극뿐이다. 그러나 이두 작 품만으로도 웹스터는 영국 연극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극작가로 인정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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