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모노드라마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원제 Marx in Soho)
이 연극은 1995년 워싱턴 D. C에 있는 처치 스트리트 극장(Church Street Theater)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1996년에는 미네소타에 있는 칼턴 칼리지와 맨케이토 주립대학에서 공연되었으며, 1997년에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내슈빌에 있는 브로드웨이 아트센터에서 무대 에 올렸다. 1998년에는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보스턴 대학에서 낭독회도 가졌다.
작가소개
하워드 진은 보스턴 대학 명예교수이다. 고전 반열에 오른 『미국 민중의 역사』를 쓴 저자이며 이 책은 "대부분 역사에서 외면당했던 민중의 관점에서 미국 역사를 쓴 아주 훌륭하고 감동적인 책" (『라이브러리 저널』)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최근에는 활발한 저술 활동과 적극적인 정치적 행동주의로 래던 재단 논픽션 도서상과 유진 V. 댑스 상을 받았다.
진은 많은 책을 쓴 저자이며, 그가 쓴 책으로는 '진 선집', '독립선언', '오만한 제국', 자전적인 글인 '달리는 기차에 중립은 없다' 정치극선집인 '극본'에 수록된 『엠마』등이 있다.
진은 브루클린에서 자라조선소에서 일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공군 폭격수로 복무했다. 스펠만 대학 역사학과 학과장을 지냈고 여기서 인권 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후에 보스턴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 매사추세츠에서 아내인 로즐린과 함께 살고 있으며, 역사와 현대 정치에 관해 폭넓게 강의하고 있다.
작가의 글
나는 열일곱 살 무렵에 '공산당 선언'을 처음 읽었다. 아마 노동자계급이 모여 살던 우리 동네의 젊은 공산주의자들이 읽어보라고 주었을 것이다.
『공산당 선언』은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내가 나의 삶에서 본 모든 것과 아버지의 삶 그리고 1939년 미국이 놓여 있는 상황이 모두 분명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뚜렷하게 설명되고 정확하게 분석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아버지. 오스트리아께서 이민 온 유대인이며 학교라고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밖에 다니지 못한 우리 아버지가 아무리 뼈 빠지게 일해도 아내와 딸린 자식 넷을 부양하기 힘든 것을 익히 보아왔다. 그리고 나는 우리 어머니가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병이 나면 보살피기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도 보며 자랐다. 그러나 나는 이 나리에는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열심히 일하지 않고서도 엄청난 부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체제가 공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극심한 불경기에 시달리고 있던 그 시절. 나의 주위에는 이무런 잘못도 없이 극도로 궁핍한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이 넘쳐흘렀다. 그들은 집세를 낼 돈이 없어 집주인에게서 세간과 함께 길거리로 내쫓겼다. 그리고 법은 이런 집주인들을 보호해주었다. 나는 신문을 통해 이와 같은 일이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책을 무척 좋아했다. 열세 살 때부터 디킨스 소설을 많이 읽었는데, 디킨스의 소설들은 내 안에서 불의에 대한 분노와, 고용주에게 학대받고 법률 체계로 부터도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일깨웠다. 그리고 이제 1939년에는 존 스타인백의 '분노의 포도'를 읽었다. 그러자 디킨스의 소설들을 읽었을 때 느꼈던 분노가 되살아났고, 이번에는 그 분노가 이 나라의 부자와 권력자들에게로 향했다.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당시 마르크스는 서른 살이었고 엥겔스는 스물여덟이었으며 나중에 엥겔스는 '선언'의 주요 저자는 마르크스라고 말했다)는 내가 경험하고 책에서 읽고 있던 것을 말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그것이 19세기 영국이나 불경기에 빠진 미국에서만 일어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상임을 알았다. 그리고 현대 세계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체제는 매우 공고한 것 같지만 실은 영원하지 않다.
자본주의체제는 역사의 한 발전 단계에서 나타난 것이고, 따라서 언젠가는 역사의 무대에서 시라질 것이다. 그러면 그 대신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설 것이었다. 이것은 정말 가슴 설레게 하는 고무적인 생각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선언' 첫머리에서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선언한다. 그래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개인이 아니라 계급으로서 대립해있고, 따라서 이들의 갈등은 개인 간의 사소한 갈등이 아니라 아주 기념비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고 『선언』에서는 노동자, 가난한 사람들은 정의를 주구하는 과정에서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을 가지고 있으며, 바로 그것은 그들이 모두 노동자 계급에 속해 있다는 공통된 의식이라고 말한다.
그럼, 이 계급투쟁에서 정부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공공건물의 정면에는 "법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다"고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선언'에서 "근대 국가의 행정부는 부르주아지 전체에 공통된 일을 밑아 관리하는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정치기구가 겉으로는 중립적인 척해도 실제로는 지본가 계급을 위해 일한다는 놀라운 생각을 제시했다.
열일곱 살 때, 나는 이와 같은 생각이 바로 현실에서 극적으로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어느 날 공산주의자 친구들이 타임스 광장에서 일어난 시위에 나를 데리고 갔다.
수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깃발을 펼쳐 들고 전쟁에 반대하고 파시즘에 반대한다고 외치며 길을 따라 행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서 말을 탄 경관들이 시위대를 덮쳤다. 나는 사복경찰들에게 흠신 두들겨 맞고 정신을 잃었다. 얼마 후 머리가 맑아지면서 정신이 들었을 때,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단 한 가지 혼란스런 생각뿐이었다. 경찰이, 국가가 엄청난 부를 가진 사람들의 명령에 따르고 있었다.! 어느 계급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누릴 수 있는 언론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가 달랐다!
열여덟 살에 브루클린에 있는 조선소에 견습설비공 (우리는 전함의 선체에 붙이는 강철판에 못질하고 용접하는 일을 했다)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이미 '계급의식'에 눈떠 있었다. 나는 조선소에서 나와 같은 어린 노동자를 세 명 만났고, 우리들은 당시 숙련공으로 조직된 노동조합에서 배제되어 있는 우리 같은 견습공들을 조직하기로 했다. 우리는 또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도 읽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엥겔스가 그의 책 '반뒤링론'(뒤링이라는 저자에 대해 벌인 논쟁)에서 설명한 마르크스 주의 철학을 읽었고. '자본론' 1권도 어렵게 돌파했다. 그러자 약간의 흥분 속에서 자본주의 체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게 보였다. 온갖 복잡한 경제적 계약 뒤에는 어떤 핵심적인 사실이 있었다. 모든 가치의 원천은 노동이었고. 노동은 자신이 받는 보잘것없는 임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했다. 그리고 그 잉여가치는 자본가 계급의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자본가는 임금을 낮게 유지하기 위해 실업, 즉 '산업 예비군'이 필요했다. 자본주의는 사람보다 물질을, 특히 돈을 더 소중히 여겼고, 삶에 유용한 것은 모두 그것의 교환가치에 의해 평가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착취와 계급투쟁은 세계사에서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며, 단지 자본주의에서 그것이 가장 심화된 형태로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일어날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본주의는 인류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서 역사에 진보적인 역할을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선언'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역사적으로 아주 혁명적인 역할을 했다"고 쓰고 있다.
자본주의는 과학과 기술의 엄청난 발전을 가능하게 했고, 이를 통해 어미어마한 부(富)를 창조했다. 그렇지만 이 富는 갈수록 소수의 손에 집중되었다. 점점 더 조직화되어 나기는 생산의 힘과 무정부적인 시장 체제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갈등이 존재했다. 그래서 어떤 시점에 이르면. 피착취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가 힘을 조직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마침내 권력을 잡아, 진보된 기술을 자본가계급을 더욱 살찌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를 위해 사용할 것이었다.
이렇게 나는 일찍 이 마르크스에 입문했다. 그리고 몇 년 뒤, 그러니까 제2차 세계대전 때 공군 제8연대에서 폭격수로 복무하고 나와 대학에 들어가서 제대군인 원호법과 아내와 두 아이의 지원 덕분에 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서 역사와 정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부에 있는 스펠만 대학에서 가르쳤으며 이곳에서 7년을 지낸 뒤 보스턴 대학으로부터 자리를 제의 받고 북부로 이사했다. 나의 정치이론 강의에서 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다 1960년대 말쯤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엥겔스와 마르크스 가족: 부인과 두 딸)
먼저, 소련에서 스탈린주의라는 공포 정치가 행해지고 있다는 혐의가 길수록 짙어졌고, 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남부에서 학생비폭력협력 위원회(SNCC)가 선봉에 섰던 인종차별주의 반대투쟁에 참여한 나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우리는 SNCC를 방아쇠를 당긴다는 의미에서 스닉(snick)이라고 불렀다. SNCC는 자기 의식적인 이론화 과정도 없이, 일체의 중앙의 권위도 부정하고 민중의 자발적인 의사 결정을 기반으로 한 풀뿌리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무정부주의 원칙에 따라 행동했다. 1960년대 신좌파에서는 이것을 '참여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나는 미국의 무정부주의자이며 여성해방론자인 엠마 골드만과 그의 친구 알렉산더 베르크만의 저작을 비롯하여 무정부주의에 관해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표트르 크로포트킨과 미하일 바쿠닌의 저작도 읽었다.
바쿠닌은 혁명이 어떻게 일어나야 하는가에 관한 마르크스의 구상에 격렬히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했다가 미국에서 러시아로 추방 된 엠마 골드만은 새로운 소비에트 국가가 자신의 적인 부르주아지뿐 아니라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혁명가들까지 감옥에 가두는 실상을 보고, 사회주의의 이상을 배반한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을 퍼부었다. 이렇게 무정부주의 사상에 물들면서, 나는 보스턴 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무정부주의'에 관한 세미나를 열었다.
그러나 1965년(베트남에서 한창 전쟁이 고조되던 해 이다)부터 1975년(사이공 정부가 항복한 해)까지는 반전운동에 열중했고, 나의 저술은 전쟁과 관련된 주제에 크게 집중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나는 다른 주제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자유로움을 느끼고, 엠마 골드만을 그린 희곡 '엠마'를 썼다. 연극 〈엠마〉는 보스턴과 뉴욕에서 공연되었고, 몇 년 뒤에는 런던과 도쿄에서도 공연이 되었다. 이 연극에는 뉴욕의 젊은 혁명가들이 로어 이스트사이드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마르크스사상과 바쿠닌의 사상을 대비시키며 논쟁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 사상가들의 개인적인 생활에도 깊은 흥미를 느꼈다. 엠마 골드만의 자서전 '나의 삶'은 정치 생활뿐 아니라 성 생활에서도 열정적으로 살았던 한 반란자의 삶을 솔직하게 기술한 책이었다. 마르크스는 자서전을 쓴 적이 없지만, 그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전기는 많이 있었다. 게다가 영국 작가 이본 캡이 마르크스의 딸 엘레아노르 마르크스에 대해 쓴 뛰어난 전기도 있었다. 이 책에서 이본 캡은 마르크스 가족의 런던 생활을 자세히 그려놓고 있다.
마르크스와 예니는 유럽 대륙에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추방당하다가 런던으로 갔다. 이들은 지저분한 소호 지역에서 살았으며, 소호의 이들 집에는 런던으로 흘러 온 전 세계 혁명가들이 떼를 지어 들락거렸다. 나는 집에 있는 마르크스, 아내 예니와 딸 엘레아노르와 함께 있는 마르크스를 상상해 보았고. 이런 장면들은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미 나는 엠마 골드만에 관한 연극으로 행복한 경험을 한 터라 연극의 세계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마침내 나는 카를 마르크스에 관한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들이 거의 모르고 있는 마르크스. 가정을 소중히 하는 남자로서 아내와 지식들을 부양하기 위해 애쓰는 마르크스를 보여주고 싶었다. 마르크스는 자식 셋을 어린 나이에 잃고, 세 딸만 살아남았다. 또 나는 관객들에게 마르크스가 공격을 받고 자신의 생각을 변호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알기로 그의 아내 예니 역시 생각의 깊이가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나는 이따금 예니가 마르크스에게 맞서는 장면도 상상해보았다. 또한 딸 엘레아노르 역시 조숙하고 영리한 이이였으니, 몇몇 가장 정교한 마르크스 이론에 도전하는 엘레아노르의 모습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정부주의 시각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싶은 생각도 있어, 바쿠닌이 마르크스의 집을 방문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꾸미기로 했다. (마르크스와 바쿠닌은 서로 알고 있었고 제1인터내셔널인 국제노동자협회 안에서도 서로 치열하게 싸웠지만, 바쿠닌이 마르크스의 집을 방문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 밖에도 나는 흔히 마르크스를 평가할 때 한 가지 빠뜨리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마르크스를 이야기할 때 언제나 이론가, 사상가로서의 마르크스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마르크스는 혁명가로서도 보기 드물게 적극적으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먼저 그는 독일에서 반항적인 언론가로서 활동했고, 이어 파리의 노동자 동맹과 브뤼셀의 공산주의자 동맹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848년에 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도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이 때문에 재판까지 받았으나 법정에서 펼친 극적인 변론덕분에 무죄 석방되었다. 런던으로 망명한 후에도 마르크스는 국제노동자협회와 아일랜드의 자유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1871년에는 파리 코뮌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 시기에 쓴 그의 저작 가운데는 『자본론』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경제학에 관한 이론적인 저작도 있지만, 1848년 혁명이나 파리 코뮌, 유럽 대륙세서 일어난 노동자 투쟁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으로 나온 저작도 있었다.
따라서 나는 마르크스의 이런 다른 면, 그러니까 현실에 깊숙이 참여한 열정적인 혁명가로서의 마르크스를 무대 위에 올리고 싶었다. 내가 쓴 희곡에는 마르크스와 그의 아내 예니, 딸 엘레아노르, 친구 엥겔스 그리고 정치적 맞수였던 바쿠닌이 나왔다. 이 희곡은 보스턴에서 낭독회를 가지고 좋은 반응을 얻었으나, 나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래서 이것을 1인극으로 바꾸기로 했다. 그런데 항상 내 작품에 날카로운 비판을 아끼지 않는 나의 아내 로즐린이 계속 나에게 이 극을 마르크스와 19세기 유럽에 관한 역사극으로 만들지 말고. 우리 시대와 좀 더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극으로 만들어보라고 부추겼다.
나는 로즐린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한참 골머리를 앓은 끝에 약간 공상적이지만 마르크스를 현재로 불러내자는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가 미국에 나타나면. 19세기 유럽에서의 삶도 회상하면서 오늘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논평을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나는 관료주의적인 당국의 실수로(어떤 당국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르크스가 자신이 살던 런던의 소호가 아니라 뉴욕에 있는 소호에 돌아오는 것으로 하기로 했다.
이것은 1인극이지만, 나는 그의 회상을 통해서 그의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사람들. 특히 이내 예니와 딸 엘레아노르를 통해 그에게 활기를 불어넣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무정부주의자 바쿠닌도 떠올리게 했다. 그러면 이들 모두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마르크스의 사상에 가차 없이 비판을 가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서로 대립하는 견해들 사이의 공방이 이들 논쟁을 상기하는 마르크스 자신의 회상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터였다.
나는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되어 주류 언론과 정치 지도자들이 거의 미친 듯이 기뻐 날뛸 때 이 희곡을 썼다. 왜냐하면 그들이 볼 땐 자신들의 '적'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사상 자체가 불신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자본주의와 '자유 시장경제'가 승리를 거두고, 마르크스주의는 실패했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정말 죽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비에트연방은 물론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한다면서 실제로는 경찰국가를 세웠던 나라들이 결코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마르크스가 자신의 이론이 무자비한 스탈린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왜곡된 것을 보고 분노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세계 곳곳에서 억압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한 사이비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자본주의의 승리에 자못 흡족해하는 서구 정치가와 저술가들로부터도 마르크스를 구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이 오늘날에도 근본적으로 옳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의 분석이 옳다는 것은 날마다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사건들이 명명백백히 입증해주고 있다. 마르크스는 그의 시대에 기술 변화와 사회 변화의 유례없는 속도와 혼동을 보았고, 이것은 오늘날 한층 더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생산의 끊임없는 변혁, 모든 사회적 조건의 부단한 교란, 항구적인 불안과 동요는 부르주아 시대를 그 이전의 모든 시대와 뚜렷하게 구분 짓는 특징이다. 모든 고정된 견고한 관계가 낡고 고색창연한 편견 및 의견과 함께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고, 새롭게 형성된 관계 역시 미처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모두 낡은 것이 되어 버린다. 모든 견고한 것이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선언』 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가 '세계화'라고 하는 것도 마르크스는 분명히 예견했다.
이번에도 '선언'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신의 생산물을 팔 시장을 끊임없이 확장시켜야 할 필요성은 부르주아지를 전지구상으로 내몬다. 그래서 부르주아지는 모든 곳에 둥지를 틀고, 모든 곳에 뿌리를 내리고 모든 곳에서 연고를 맺어야 한다. …예전에 한 지역이나 한 나라에 틀어박혀 자급자족하던 때와 달리 이제는 사방에서 왕래가 이루어지고 국가들 사이에 보편적인 상호의존이 나타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미국에서 추진한 '자유무역협정'은 자본이 전지구상에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자본의 흐름에 방해가 되는 것을 모두 제거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본가에게 세계 모든 곳에서 민중을 착취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신문에 대서특필된 기사들을 보면서도 마르크스는 하나도 놀라지 않는다. 그는 대기업의 합병을 예견했고, 이것은 오늘날 더욱더 큰 규모로 진행되고 있다. 그는 빈부 격차의 심화 역시 예견했고, 이는 오늘날 각 나라에서도 진행되고 있는 현실이지만 부자 나라 국민과 가난한 나라 국민 사이에서는 더 한층 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연극에서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는 결코 자본주의의 특징을 띠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사이비 사회주의 나라에서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는 1853년 『뉴욕 데일리 트리뷴』지에 글을 쓰고 있을 때 범죄와 처벌 제도에 관해 자신이 한 말을 되씹는다. "그저 새롭게 공급되는 범죄자들을 수용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수많은 범죄자를 처형하는 교수형 집행자를 찬양하는 대신, 이런 범죄자를 낳은 체제를 바꾸는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는 마르크스가 '상품 물신주의'라고 말한 것이 딱 들어맞는 사회에 살고 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랠프 월도 에머슨이 미국 산업제도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 말한 대로, 우리 사회에서는 "물건이 안장에 앉아 인류를 몰고 간다:'
우리 사회에서는 기업의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실제로 19세기 말 미국 대법원에서는 기업도 하나의 '인격체'이며 따라서 미국 수정헌법 제14조의 보호를 받는다고 판결하였다. 이로써 원래 이 법이 보호하고자 했던 흑인보다 기업을 더 보호해 주었다.
마르크스가 몇 년 후에야 출판되었지만 『경제학 철학수고'라고 알려진 아주 뛰어난 문건을 쓴 것은 예니와 함께 파리에 살고 있던, 그의 나이 겨우 스물다섯 살 때였다. '경제학철학수고'에서 마르크스는 현대 사회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소외에 관해 쓰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인간관계로부터, 자기 자신의 진정한 자아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은 지본주의 사회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며 이로 인해 우리는 물질적인 고통 뿐아니라 심리적인 고통도 겪는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작 대부분을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데 바쳤고, 사회주의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에 대해서는 거의 기술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자본주의에 관해 말하는 것에서 충분히 착취 없는 사회, 사람들 이 자연과. 자신의 하는 일과, 자신 자신과 하나 됨을 느끼고 인간관계에서도 소외되지 않는 사회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또 1871년에 파리 코뮌이 짧은 기간이지만 몇 달 동안 존재하면서 창조했던 사회에 관해 매우 열정적인 어조로 기술함으로써 우리에게 미래에 관한 몇 가지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를 읽는 독자들은 이 1인극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정확한지 궁금할 것이다. 먼저, 마르크스의 삶과 그 시대의 역사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들, 그러니까 마르크스가 예니와 결혼한 것, 그가 런던으로 망명한 것, 자식 셋을 잃은 것, 그 당시의 정치적 갈등, 잉글랜드에 대한 아일랜드의 투쟁, 유럽에서 일어난 1848년 혁명, 공산주의 운동, 파리 코뮌은 모두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거론하는 인물들. 그러니까 그의 가족 구성원과 친구 엥겔스 그리고 그의 맞수였던 바쿠닌도 모두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다. 대화는 꾸며낸 것이지만, 등장인물의 개성과 성격에 충실하려고 노력했고, 단지 마르크스가 예니나 엘레아노르와 이데올로기적인 갈등을 빚는 것으로 상상한 부분에서는 상상력의 자유를 좀 누렸다. 그렇지만 마르크스가 나폴레옹 3세에 관해 말하는 부분처럼, 몇몇 경우에는 마르크스가 직접 한 말을 그대로 썼다.
모쪼록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가 그 시대와 그 시대에 마르크스가 차지한 위치뿐 아니라 우리 시대와 우리 시대에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 역시 조망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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