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는 프로듀서와의 작품 제작 단계의 최종미팅 중
갑자기, 기존에 작업했던 작품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작품을 보여준다.
하지만 프로듀서는 작가와 진행해 왔던 기존의 작품에 대한
성과를 기대했기 때문에, 작품의 사업화를 포기하게 되고
결국 작가의 예정되었던 공연은 무산된다.
더군다나 작가는 갑자기 일어난 천재지변의 일로, 어떻게든
올해 안에 공연을 올려야만 하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예정되었던 공연이 취소되자 이 작품을 기한 내에 올리고자
여러 극단들과 미팅을 하는데, 평소 작가의 작업 스타일을 기대했던
극단들은 작가의 새로운 시도가 담긴 작품이 어렵고 난해하게만
느껴져서 모두 거절하고야 만다.
결국, 작가는 예전에 해산했던 자신의 첫 극단 동료들을 만나고,
다시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들 역시도 작가의 처음 보는, 예상치 못한 극 장르에
어려움을 느끼고 날이 갈수록 공연에 대한 불안감은 커져만 가자,
작가가 왜 이러한 극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의문점이 드는데....

연극 <작가노트, 사라져가는 잔상들>은 2022대한민국연극제 서울대회 대상, 연기상과 제40회 대한민국연극제 은상, 희곡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작가 판타지 서사'를 활용하여 현대사를 통해 지켜주지 못했던 사람들의 잔상을 작가 1인칭 시점으로 그려내며 그들을 진혼하였다. 섬세한 감수성으로 여성 캐릭터와 역사적 관계를 형성한 것과 더불어 현대사의 죄의식을 치밀하게 고민한 흔적이 돋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연극 속에는 수많은 극중극이 나온다. 이 작품들은 한민규 작가에게 잔상처럼 남아있는, 이전의 작품들을 새로운 세계관으로 가공한 극이다.
타임리프 : 2014년도에 발표한 연극 <서릿빛 소녀>를 근간으로 재구성된 극중극이다. <서릿빛 소녀>는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음악의 주인을 찾는 '시간 이동자의 이야기'였다.
어릴 적 우리 집은 할아버지의 기와집에 살았다 : 20년 전에 쓴 소설이지만, 그 어디에도 발표된 적이 없는 작품이다. 이 소설 같은 글을 재창작하여 극중극으로 만들었다.
빨간 잠바소녀 : 월간문학 2019년 10월 호에 단편으로 실린 음악극 <실명>을 근간으로 하여 재창작한 극이다.
바다를 가르는 칼 검황 유경 VS 시간을 베는 칼 무신 김통정 : 검황 유경은 2016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혈우>의 주인공 중 한 명이며, 무신 김통정은 2017 대전 창작희곡공모 우수상 수상작 <최후의 전사>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이다. 이 두 작품을 무협이라는 세계관으로 구축하여 두 인물을 구성했는데, 이 두 인물이 극중극의 판타지적 인물로 나온다.

'인생을 연극처럼 살아야 하는데, 나는 연극에 인생을 다 바쳐살았다. 관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하는 작가의 독백으로 연극은 시작된다. 뭔가 초조해 보이는 작가에게 소녀가 나타나 자신이 누구냐고 물어보지만, 작가는 그 소녀가 누군지 모른다. 자신의 정체를 알기 위해 소녀는 작가 주변에 머무르는데, 그 소녀는 작가의 눈에만 보인다. 작가는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제작자를 만나지만, 알 수 없는 장르의 대본을 본 제작자는 그의 작품을 거절한다. 이야기는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 여러 가지 독립적인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유일한 공통점은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연극 <작가노트>속에는 여러 가지 극중극이 등장한다. 바로 작가가 무대에 올리고 싶은 다양한 이야기가 극중극으로 관객들에게 소개된다. 도움이 필요했던 사람들이 이야기다. 신내림을 거부하는 소녀, 부모의 빚으로 인해 함께 죽어야 했던 아이, 자신을 납치한 남자의 눈을 찌르고 탈출하지만 시간이 지나 교도소에서 출소한 그에게 보복살인을 당하는 여학생, 수학여행 중 침몰한 배에서 죽어간 학생들의 이야기가 무대 위에 올려졌다. 작가는 왜 그토록 그의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아있는 이야기를 서둘러 무대에 올리고 싶어 했을까? 연극이 중반으로 흘러가면서 그 이유는 드러난다. 드디어, 작가는 예전의 극단 동료들을 만나 연극을 완성하고 공연을 하루 앞두는데~ 작가는 그에게 주어진 시간 안에 연극을 무대에 올릴 수 있을까? 작가가 그토록 서둘러 누구도 원하지 않는 연극을 무대에 올리려고 하는 이유를 찾아가는 것과 극중극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을 알아내려는 생각을 통해 연극에 흠뻑 빠져들 수 있었다.

작가의 글 – 한민규
동시대 사라져가는 아픈 기억들, 사라지는 게 맞는 것인가. 본인이 <작가노트, 사라져가는 잔상들>을 창작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3년 전이다. 창작자로서 과거의 시대사 아픔들이 나의 일로 들어왔을 때, 달라졌던 '나'를 발견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을 창작하면서 고민했던 것은 내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예술가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예술가로서 '시대 속 사라져 가는 아픔'을 연극이 갖는 제의적 의미로, '진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연극은 시대와 시대를 잇는 것이며, 작품으로 미래에 더 나은 가치를 전달해주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본 작품을 창작하기로 결심했으며, 동시대의 사라져가는 아픔들과 나와의 연결고리를 찾는 작업에 집중했다. 그 모든 아픔을 나로서 진실하게 느끼는 것이 동시대 연극 작업의 핵심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동시대성'이라는 것은 동시대의 일들에 '공감하는 것' 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오늘날 필요한 기적은 아닐까? 주변에서 일어나는 그 어떠한 아픈 사건들도 시간이 지나면, 무색 해지리만큼 잊힌다. 사람들은 현재라는 일상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각자마다 잊지 말아야 할 아픔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아픔을 잊어서, 또 비슷한 일들이 생겼을 때 동일한 아픔을 맞게 된다면 그것은 비극 중의 비극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작은 기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억은 행동으로 이어질 씨앗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작가노트, 사라져가는 잔상들>은 '작가판타지서사'라는 독특한 장르의 극으로 이러한 '작은 기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작은 기적'은 누구나가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동시대에 필요한 '기적'은 영웅이 이뤄내는 큰 기적이 아니라, 누구나가 할 수 있는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공감하는 것으로 생겨나는 '작은 기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노트, 사라져가는 잔상들>에서 보여주는 '작은 기적'의 이야기로부터, 동시대에 작은 기적들이 조금씩 생기 길 바란다. 이것이 <작가노트, 사라져가는 잔상들>이 동시대에 공연되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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