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라는 고래 보호 활동가가 되기까지 자신의 여정을 들려준다.
어린 시절 비만으로 인해 소설 속에 등장하는 흰고래 '모비딕(Moby Dick)'에 빗대어
놀림을 받던 일부터 시작해, 음식을 남기지 못하게 했던 어머니와의 일화,
대학도서관 앞에서 마주친 '고래살해를 멈춰라!'라고 적혀 있던 표지판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이 길게 이어진다. 대학 생활에 허무함을 느끼고 있던 다라는 도서관 앞을
지나는 학생들 대부분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 고래보호운동 전단지를 나눠주는 '레이철'을
보며, 실제로 변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멋있다고 느낀다.
다라는 레이철과 함께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한다. 웹사이트를 만들고, 온라인 청원을
시작하고, 페로 제도 총리에게 이메일을 보낸 다라와 레이철은 홍보 마케팅 경력의
지인의 도움을 받아 언론에 노출된다. 마침내 12만 2천명이 넘는 청원동의를 받으면서
레이철이 단체대표로 페로 제도를 직접 방문해 제본된 청원서를 전달하기로 한다.
하지만 페로 제도에 도착한 레이철의 연락이 뜸해지면서 다라가 청중에게 전달하는
이야기는 반전을 향한다.

이 작품 <페로 제도(Faroe Islands)>는 '행동주의'의 민낯과 인간 '본성'에 관한 질문이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돌고래를 주요 식량으로 사냥해온
페로 제도의 전통적인 고래사냥 방식인 '그린다드랍(Grindadrip)'은 대학살이라는
국제적인 비판을 받아왔다. 페로 제도에서는 바이킹이 정착한 이후로 10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풍습이자 전통이라고 설명하지만, 선박들이 돌고래 무리를 좁은 해안으로
몰아넣은 뒤 사냥꾼들이 몰려들어 돌고래를 도살하는 방식은 '무자비한 학살과 생업을
위한 선택이라는 주장' 사이에서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왔다.
2013년 루바브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페로 제도>는 '다라'라는 인물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을 '청중'으로 여기며 공식적인 행사의 기조연설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일종의 모노드라마이다. 공연장으로 들어서는 관객을 향해 '고래 액션 허브' 협회의
참여자들을 대하듯 친근하게 인사하고, 이름표 작성과 착석을 안내하며 단체명에 대한
설명에서부터 꽤 긴 이야기를 홀로 이어나간다. 앞선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예상치 못한
반전이 숨겨져있는 다라의 독백은 인간의 이중성과 위선, 미묘하게 '균열'이 발생해
견고함을 구축하지 못함에도 스스로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자기 합리화의 씁쓸한
민낯을 고발하며, 인간 본성에 대한 사유를 드러낸다.

작가로서 빌런이 <페로 제도>를 통해 관객에게 묻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이상주의와 현실의 대립, 전통과 환경운동의 갈등, 자연과 인간의 공존 가능성, 문화와 윤리의 충돌과 해결 방안에 대한 고민이다. 빌런은 이상주의적 신념을 갖고 있는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 현실과 충돌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균열'과 갈등을 노출한다. 동시에 레이철의 위선 외에 이야기를 전달하는 다라 자신의 내면이 품은 모순과 미세한 균열 또한 놓치지 않는다. 다라가 전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어딘지 모순되는 지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고래도 사람입니다'라고 외칠 정도로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인간이라면 결코 무심해서는 안 될 부분에서 다라는 의외의 반응을 보인다. 빌런은 다라의 이중성과 균열을 드러나지 않게 표출하기 위해 여러 에피소드를 전달하면서 그녀가 사용하는 단어나 태도를 교묘하게 조종한다. 관객으로서는 그러한 지점들을 놓치지 않아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인식할 수 있다.
인터뷰에서 빌런은 "온라인 청원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면서, <페로 제도>가 "소파에 편안히 앉아서 하는 행동주의"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페로 제도의 돌고래 사냥방식을 둘러싼 논란은 극의 외피를 형성하는 시작점이 되지만, '그린다드랍'은 극의 배경이 될 뿐이다. 실질적으로 작가가 겨냥하는 것은 행동주의를 추구하는 인물의 동기와 이상, 진실함과 실천력, 그리고 그러한 인물을 둘러싼 세상의 흐름과 구 조다. <페로 제도>에서도 빌런은 여러 개의 섬처럼 흩어진 인간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균열을 만들고, 그 균열로 인해 서로 멀어지며, 또 다른 섬들과의 연대와 협력을 위해 손을 내미는 인간 사회의 구조와 시스템, 인간 본성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세르게이 칼레딘 원작 레프 도진 연출 '가우데아무스' (1) | 2026.06.03 |
|---|---|
| 최은영 각색 '무명,無名’ (1) | 2026.06.01 |
| 이오네스코 작 양정웅 각색 '의자들' (1) | 2026.06.01 |
| 라울 콜렉티브 '산책자의 신호' (1) | 2026.05.31 |
| 뮤지컬 '천국과 지옥' (1) | 2026.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