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 문학 교사 헤르만은 작문 숙제를 채점하며 학생들의 실력에 회의감을
느끼던 중, 자신의 눈길을 사로잡는 작문 과제를 발견한다.
작문의 주인은 클라우디오로 항상 교실에 맨 끝줄에 앉는 존재감이 없는 소년이다.
그는 같은 반 친구인 라파의 가족을 관찰한 것을 토대로 글을 쓰지만, 소설 같기도 한
그의 작문에는 라파네 가족을 향한 수상한 욕망이 담겨 있다.
헤르만의 아내 후아나는 클라우디오의 글이 위험하다며 당장 글쓰기를 중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클라우디오의 글에 매료된 헤르만은 개인 지도까지 해가며
글을 완성시키려 한다. 클라우디오는 더욱 매력적인 글을 쓰기 위해 도덕적으로
위험한 상상들을 현실로 만들어 나가고....
교사는 문학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한 학생들과 보내던 단순한 일상에서 빠져나와
문학을 이야기하고, 작가를 꿈꾸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점점 더 클라우디오의
얘기에 빠져든다.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상상한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이나 좋은
문학 작품을 분별하는 능력이 헤르만을 좋은 교사,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에 빠져들고, 이야기는 끊임없이 인간에게 영향을 주지만
그 영향이 인간에게 좋은 모습으로, 또는 그렇지 않은 모습으로 스며들도록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선택인 듯하다.

스페인 연극의 좋은 이야기꾼 후안 마요르가는 <맨 끝줄 소년>(2006)에서 이야기를
만드는 학생과 그 이야기에 빠져드는 교사를 선보인다.
호모 픽투스, 이야기하는 인간이 언제부터 왜 이야기를 좋아하고 이야기를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이야기는 인간 삶에 단단히 밀착되어 있었다.
마치 물고기에게 물처럼, 인간에게 이야기는 지각할 수 없어도 언제, 어디든 있는 것이다.
시, 소설, 연극, 영화, 드라마, 노래, 광고, 게임 등 장르나 매체에 국한되지 않으며,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수없이 많은 만남에서도 인간은 이야기를 감상하거나 만들어 낸다.
이야기를 통해 육체가 속해 있는 현실의 시간과 공간속에서 내면의 창을 열어 허구의 세계,
상상의 세계를 마음껏 돌아다니며 꾸준히 일탈을 실행한다. 또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능력은
어른들만의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들도 어떤 교육이나 훈련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도
소꿉놀이 같은 놀이를 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아이들은 먹을 게 없어도, 누추한 환경에
살아도, 심지어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흉내를 내며 놀았다고 한다.
이처럼 아이든 어른이든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를 감상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며, 이야기는
인간이 이해하고 상상하고 창조하는 역량이 있는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맨 끝줄 소년>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작가가 중·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칠 때 한 학생이 시험지에 답 대신 시험공부를 못한 개인사정을 직문해 써낸 것이다. 물론, 작품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단순히 특이한 학생과 교사의 만남을 그린 것이 아니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차로 전개되지도 않는다. 장소나 장면변화도 명확히구분되어 있지 않아 등장인물들이 과거와 현재, 이 공간과 저 공간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무대에서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한껏 유도하는 연극적 글쓰기다. 또한, 작품을 읽거나 관람하는 사람들의 상상력에 따라 내용도 다양해진다. 여러 이야기가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 내에서 실제로 벌어진 이야기인지 꾸며 낸 이야기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쫓아가다보면 헷길리기 쉬운 미로 속을 걷는 것 같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연극의 상상력이 얼마나 풍성해질 수 있는지, 연극의 철학성이 얼마나 깊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후안 마요르가의 작품들은 우리 시대의 이야기들을 예리한 풍자와 함께 연극 형태로 들려주며, 인간과 세상에 대해 구석구석 들여다보게 한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못했거나 우리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철학하게 한다. 이 작품에서도 많은 풍자와 질문들이 던져진다. 관객들은 마요르가의 이야기에 공감하면서 연극을 통한 철학하기에 도전하게 될 것이다. 문학이란, 아니, 예술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예술은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가? 가족이란? 중신층이란? 지식인이란?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보이는것에 대해 어떤 상상을 하는가?
이 작품은 프랑스에서 프랑수아 오종(Francois Ozon, 1967∼)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2012 신세바스티안 영화제, 2012 토론토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국내에서 <인 더 하우스(In the House)> 란 제목으로 상영되기도 했다.

맨 끝줄의 자리에선 보는 행위를 들키지 않고 남을 관찰할 수 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우위적 위치에서 타인을 보며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느끼는 관음증적 응시가 연극 <맨 끝줄 소년>을 관통한다. <맨 끝줄 소년>은 가르치는 일에 지친 문학 교사 헤르만과 작문에 재능을 가진 클라우디오와의 은밀한 글쓰기 수업에 관한 이야기다. 헤르만은 수준 미달의 글을 써 낸 학생들 틈에서 클라우디오의 세밀한 묘사와 금기를 오가는 자극적인 표현에 매료됐다. 같은 반 친구 라파의 가족을 훔쳐보고 써낸 클라우디오의 작문은 항상 결말 대신 ‘다음 시간에 계속’이라는 말로 중단된다. 비상한 작문 실력은 소설가의 꿈을 접은 헤르만의 욕망을 부채질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헤르만은 방과 후 비밀 수업을 진행하며 클라우디오가 더 매력적인 소설을 창작하도록 채근한다. 이 과정에서 윤리의 선을 넘나들고 관찰의 대상이 전복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서사다.
연극은 헤르만이 작문을 채점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0점, 2점 선에 머무는 최악의 상황을 두고 학생들에게 ‘관점’을 설명하느니 침팬지에게 양자 역할을 설명하는 게 나을거라 자조하던 때 클라우디오의 글이 눈에 들어온다. 그의 글을 미술관 큐레이터인 아내 후아나에게 읽어주는 순간 무대 상수에 클라우디오가 등장하고 헤르만과 동일한 대사를 읊는다. 클라우디오가 쓴 작문을 듣고 그의 시선을 쫓을 수밖에 없는 관객은 원치 않아도 라파의 가족을 관음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위치에 놓인다. 자연스럽게 타인의 삶에 대한 호기심, 허구와 사실을 혼동하는 위험성에 동화되는 것이다. 후아나는 친구 어머니에게 연정을 품은 듯한 클라우디오가 불쾌한 아이라 단정하면서도 다음 글을 기다린다. 즉 클라우디오가 쓴 글의 유일한 독자인 헤르만과 후아나는 이미 그의 작문에 매혹된 것이다. 문체가 바뀌거나 지루해지면 쥘베른, 디킨스, 체홉, 세르반테스 등 다양한 대문호의 작품을 빌려주고 기술적인 부분에서 영향 받기를 권면한다. 클라우디오는 대상을 선택해 훔쳐보는 것에서 나아가 그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 한다. 현실을 반영하는 글쓰기에서 벗어나 본인이 쓴 소설 속 갈등의 주인공이 되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이 가능했던 이유는 클라우디오가 관음적인 시선으로 라파의 가족을 훔쳐본 결과 가족 내의 균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만 우선시 하는 라파 아버지의 발언들이 에스테르를 지치게 할 거라 예감했고 그녀의 외로움을 건드렸다. 또 불온한 엿보기로 에스테르의 척추가 좋지 않아 춤을 출 수 없다고 판단해 ‘비 조차도 저렇게 맨발로 춤추지 않는다’는 연시를 보낸다. 초반에는 단순히 라파 가족의 구성원이 되고 싶은 듯 행동했지만 주인공의 갈등은 자신 안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문학 교사 헤르만의 조언대로 적극적인 개입을 시도한 것이다. 라파 부모는 라파의 수학 성적을 오르게 한 클라우디오가 자신들에게 조금씩 스며드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무의식 중에 중산층 밑바닥의 허영과 가식을 노출한다. 클라우디오가 라파의 집을 관찰하고 글로 쓰게 된 원인에는 결핍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9살 때 집을 나간 어머니, 병든 아버지와 사는 클라우디오는 자신과 정 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라파의 가족을 공원에서 꾸준히 염탐했다. 이상적일 것 같은 가족에게서 균열을 발견한 순간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라파 아버지의 향수를 몰래 뿌린다거나 에스테르에게 고백하고 키스하는 행위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질서를 전복시키고 대타자의 기능을 무력화 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다. 불온한 상상의 역치가 높아진 것은 글쓰기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연극의 초반 클라우디오는 헤르만의 조언을 낱낱이 반영하는 듯 보이나 후반으로 갈수록 자신에게 잠재되어 있는 욕망을 조절하지 못한다. 창작을 할 때 가까이에서 편견 없이 보라고 제안한 헤르만은 클라우디오가 쓴 글의 수위가 높아질수록 한 발 물러서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초반 헤르만은 흥미로운 소설의 진행을 위해 금기를 어기는 클라우디오의 행동을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시험지를 훔쳐 주는 등 비 윤리적인 처신을 했다. 이는 본인이 실현하지 못한 글쓰기의 욕망을 제자 클라우디오를 통해 대리 만족 하려는 의도가 깃든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클라우디오의 작문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무너지고 불편할 수 있는 지점이 많아진다. 또한 클라우디오의 관음 대상이 헤르만 자신을 향한 것임을 인식했을 때 과거에 했던 발언들과 모순된 행동을 보인다. 이제 헤르만이 강조했던 관점의 문제, 부인과 대화한 예술의 기능, 클라우디오가 지닌 창작에 대한 욕망 등을 간과할 수 없다. 헤르만과 클라우디오의 예술에 대한 관점은 후반으로 갈수록 분리된다. 진정한 예술은 세상에 빛을 비춰야 하지 헷갈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문학 교사 헤르만의 예술론은 칸트의 미학과 직결된다. “네가 쓴 작품을 교장선생님이 읽으면 어떨까? 라파가 읽으면? 라파 아버지가 읽으면?” 헤르만은 이렇게 예술을 끝없이 수용자의 관점으로 이해한다. 헤르만이 강조했던 ‘작가가 해야 할 첫 번째 질문은 누구를 위해서 작품을 쓰는가’란 발언도 위의 맥락과 연계되어 있다. 반면 도덕 위에서 줄타기 하며 놀 수 있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던 니체의 개방적 태도는 클라우디오의 예술관에 좀 더 가깝다. 그 어느 것과 대면해서 자신의 힘을 전개시킬 수 있는 모험을 클라우디오는 글쓰는 행위로 치환한 것이다. 의지를 넘어선 욕망을 더 이상 멈출 수가 없다는 클라우디오의 글쓰기는,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 도취의 실현으로도 해석된다. 클라우디오는 자신이 쓴 작품의 제목을 ‘허수(虛數)’로 정했다. 존재하지 않지만 상상할 수 있는 수. 정해진 답이 있는 수학처럼 소설 창작에서 공식적인 기술론을 주입하던 헤르만과 달리, 상상력을 접목한 클라우디오의 창작에 대한 관점이 ‘허수’라는 메타포로 드러났다.

이 공연은 실재와 허구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이 많다. 그 연극적 장면성을 구현하기 위해 무대와 소도구, 조명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무대 양 옆으로 투명한 벽이 세워져 있고 정면은 반투명한 샤막을 설치했다. 글쓰기가 장면화 되는 순간, 즉 시공간이 중첩되는 장면에서 클라우디오는 샤막 안에서 나누는 가족의 은밀한 대화를 들을 수 있고, 관객 역시 클라우디오의 불온한 행동을 관음적인 시선으로 관찰하는 경험을 한다. 설치된 오브제들도 사실적인 공간이나 특정한 장소를 상징하지 않고 미니멀한 기능성을 추구했다. 테이블 4개와 몇 권의 책, 의자가 전부인데 테이블 위의 녹색 스탠드에 주목해야 한다. 스탠드는 장면이 전환되거나 글에 대한 첨삭이 진행될 때 배우가 직접 키고 끄며 모호한 경계를 나누는 장치로 활용되었다. 마지막 장면은 객석의 중앙 통로에서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것으로 진행된다. 이야기의 구성과 맞물린 무대 활용은 공간감이 깊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이었기에 더 적합하게 실현됐다. 함축적인 의미를 부여하진 않으나 갈등이 고조되는 감정을 구음으로 만들어 극적 분위기에 일조한 코러스의 역할도 적절했다. 밀도 있는 대사를 탄력 있게 표현한 배우들의 역량도 극의 완성도에 기여했기에 전체적으로 균형 있는 작품이다. (리뷰 신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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