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랫동안 집을 나가 있었던 딸이 갑자기 만삭의 몸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모든 것은 예전 그대로이다. 어머니는 쓸데없는 잡담을 즐기고 다리 통증으로 괴롭다. 아버지는 늘 같은 시간에 끔찍하게 피곤한 모습으로 퇴근한다. 여동생은 여전히 저 아래 노점에 가 시간을 보낸다. 물건들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견고한 틀처럼 전혀 변화가 없던 이 집에 돌아온 딸, 베아테의 뒤를 따라 낯선 청년이 찾아온다. 베아테가 가진 아이의 아버지인 그의 출현은 마치 이 집의 견고한 틀을 부수고 들어온 침입과 같다. 나갔던 딸이 임신하여 돌아오고, 뒤를 이어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인 딸의 남자 친구가 찾아온 그날 저녁의 몇 시간,<이름>은 한 가정의 이 짧은 저녁 한 때의 풍경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두 사람이 갑자기 나타난 것 이외에 특별한 사건은 아무 것도 없다. 드러나고 있는 것은 인물들 사이의 소통부재이다. 이 집의 세 딸 중 하나는 여전히 나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으며 어머니는 오랜만에 카드를 받았으면서도 식구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베아테에게도 부모는, 딸이 임신을 하고 왔음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막내딸은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이 그저 현재, 자신의 시간만 보내고 있을 뿐이다. 늘 피곤한 아버지와 다리 통증에 시달리는 어머니는 저녁이 되어서야 한 공간에 있게 되지만 항상 각자의 공간에 존재한다. 이들 간에는 어떠한 시선의 교류도 없으며 가족이라면 있어야 할 사랑의 몸짓도 존재하지 않는다. 베아테에 대한 유일한 사랑의 표시라면 아버지가 몇 장의 지폐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는 삭막한 행위 하나다. 베아테는 아버지의 이 행위에 당혹해 한다. 이 집을 찾아온 베아테의 남자 친구에게도 베아테의 부모는 큰 관심이 없다. 이 청년에게 부모는 이름조차 물어보지 않는다. 그저 형식적인 겉치레 말이 전부다. 여동생에게 갑자기 나타난 언니와 언니의 남자친구는 무료한 일상에 잠시 나타난 단순한 흥밋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청년 또한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보다는 소통부재의 상황을 한 가지 더 만들어낼 뿐이다. 그는 이 집에 들어와서도 마치 늘 그래왔던 듯 책만 들여다본다. 타인의 공간에 침입하듯 들어와 오히려 그 공간에 또 하나의 벽을 만들어 놓고 있는 그의 행위와 그 벽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전혀 변화가 없는 베아테 식구들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베아테와 남자 친구는 곧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짓는데 합의를 보지 못하고 실패한다. 남자 친구는 아이의 이름을 짓는데 진지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태어날 아이들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긴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태어나기도 전에 관계를 맺어야 할 부모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살아갈 장소에 대해 아기들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인간의 관계 맺기는 태어나기도 전에 어려움에 부딪힌다. 예전에 베아테의 남자 친구였던 비아네가 찾아온다. 베아테와 비아네의 관계 또한 잠시 스쳐간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인간관계는 이들 인물 사이에서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의 남자 친구, 그리고 예전의 남자 친구 모두 베아테를 남겨 두고 떠난다. 베아테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떠나고 난 후 “그 자리에 서서 어둠을 바라보는” 일 뿐이다.

모든 게 느리다. 극의 진행이 빨라질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몇 차례 있긴 하다. 그 때마다 뭔가 큰 변화가 닥쳐 올 것 같지만 모든 것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똑같은 대사가 반복된다. 그러나 그 짧고 자주 되풀이되는 대사 속에 그리움, 증오, 욕망, 좌절, 체념, 외로움 등 복잡한 감정들이 끈끈하게 묻어져 나온다.
포세(Jon Fosse)는 프랑스의 '르몽드'지가 '21세기의 사무엘 베케트'라고 평가했던 노르웨이 작가다. 포세의 언어는 철저하게 축약된 형태로, 문장의 조각들, 계속해서 반복되는 단어들로 이뤄져 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 과정 중에 끊임없이 반복 사용되는 '사이'의 침묵, 이 행간을 인물들의 말 없는 진실이 넘나든다.
오갈 데가 없어 할 수 없이 부모가 사는 집으로 돌아온 한 만삭의 소녀. 뒤를 따라온 뱃속 아기의 아빠인 듯한 소년. 소녀의 부모와 여동생. 소녀를 찾아온 옛 남자친구. 이들 사이에는 공허한, 엇박자의 대화가 이어진다. 소녀는 아기이름을 짓고 싶어 하지만 소년은 책 읽는 데만 관심이 있다. 이들의 대화는 늘 평행선을 긋는다. 뭔가 공통점을 찾고 어떻게 해서든 합쳐지고 싶은 욕망이 없는 건 아니나 모두가 번번이 실패한다.
근본적으로 고립이라 할까, 인간관계의 단절, 이런 것이 작품의 주된 소재라고 할 수 있다.
간결한 대사, 극히 일상적인 상황과 인물. 극은 명확하지만 모호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극에는 고요함이 떠오르고 느림 속에서 인물들의 불안과 우울함, 욕정이 소용돌이친다.

현재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연극계로부터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욘 포세는 1959년 노르웨이의 해안도시 헤우게순(Haugesund)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1975년 베르겐(Bergen)으로 가 그곳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했으며 호르달란(Hordaland) 문예창작 아카데미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1990년대 초부터 전업 작가로 자유로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포세는 현대의 사회 현실을 강하게 비판하거나 변화를 위해 투쟁하는 작가가 아니다. 그의 작품이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가족관계와 세대 간의 관계를 통해 볼 수 있는 인생, 사랑과 죽음 같은 우리의 삶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모습들이다. 세대 간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말로는 결코 종합적으로 고찰될 수 없는 것, 즉 죄와 실망의 원천 문제를 다룬다. 그의 작품에는 일견 너무나 평범해 보이고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삶의 그림들이 단순한 구조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그림에는 많은 사건이 발생하지 않으며, 항상 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아버지, 어머니, 아이, 남자(남편), 여자(아내), 소년, 소녀. 여기에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할머니, 그리고 때때로 이웃이다. 이들은 대부분 이름이 없으며 특별한 고유의 성격이 부여되지 않는다. 인물들은 항상 단순한, 일반적인 사람들이며, 그들의 관계는 한눈에 파악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평범함과 보편성을 통해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경건하게 들여다보도록 만든다. 그가 만들어내는 인간관계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상황이고 그 관계가 또한 철저하게 관찰되고 파악될 수 있어서 보편성의 미니멀리즘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만큼 포세가 작품 속에서 드러내고 있는 현실은 구체성을 지니고 있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현실의 단면은 굵은 윤곽으로 이루어진 담담한 그림으로 그려지나 그 사이의 여백에는 인간의 삶이 가진 구체적인 모습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현대인이 만들어내는 의사소통 부재의 사회적 관계이기도 하며 인간 의식 속에 존재하는 무형의 원형질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포세의 언어는 배우와 연출자에게 커다란 도전이 된다. 그의 언어는 철저하게 압축되고 축약된 형태로, 문장의 조각들, 계속해서 반복되는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완벽하게 구두법 없이 쓰인 그의 텍스트는 해석과 리듬의 모든 힘을 배우와 연출자의 손에 넘겨준다. 포세는 삶의 본질적인 것이 파묻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불필요한 소리들을 제거한다. 그의 언어는 끊임없이 회전하는 말의 고유한 움직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의 모노톤의 문장들, 부분적으로는 스타카토처럼 던져지는 문장들 속에서 여러 가지 삶의 구조들, 인간의 내적인 심리 구조가 현재와 과거의 시간이 교차하는 가운데 응축된 형태로 노출된다. 여기에 포세는 침묵의 순간들을 적절히 이용한다. 인물들의 대화 과정 중에 끊임없이 반복 사용되는 ‘사이’의 침묵, 이 행간을 인물들의 말 없는 진실이 넘나든다. 소리와 소리 없음의 독특한 리듬-이 긴장과 이완의 리듬을 통해 포세는 인간의 삶이 가진 진정성은 무엇인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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