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김상열 극본 '미녀와 야수'

clint 2023. 6. 3. 06:49

(서막)

옛날 숲속 마법의 성에 교만한 왕자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길을 가던 마녀가 하룻밤 은혜를 간청하였으나 사랑과 자비가 부족한 왕자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화가 난 마녀는 왕자에게 야수의 허물로 저주를 주었으며 건네어 준 장미꽃이 시들기 전에 사랑을 받지 못하면 야수의 허물을 영원히 벗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1막)

행복이 가득 찬 장미마을에는 마을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착하고 아름다운 미녀 벨이 발명가인 아버지 한스 영감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어리석고 힘만 센 고집통이 별에게 끊임없이 청혼을 한다마을사람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발명에 골몰하던 한스 영감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대도시로 팔기 위해 길을 떠난다.

대도시로 가던 한스 영감이 길을 잃고, 늑대들에게 쫓겨 저주받은 마법의 성으로 들어 간다. 성안에는 똑같이 저주를 받아 모습이 변해버린 신하들(촛불, 시계, 찻잔, 주전자, 빗자루 등)과 함께 고통스럽게 살고 있던 야수는 흉측한 자기 모습을 본 한스 영감을 지하창고에 가두어 버린다마을사람들을 모아 놓고 벨과 결혼하겠다며 허풍 떠는 고집통에게 벨은 사랑 없는 결혼은 승락할 수 없다고 거절하며 아버지를 구하러 혼자 마법의 성으로 들어간다.

세월이 흘러 장미 꽃잎은 자꾸 떨어지고 사랑을 구하지 못해 더욱 포악해진 야수는 성안에 숨어 들어온 벨을 발견하고는 분노하며 한스 영감을 풀어 주는 대신 벨을 잡아 가두어 버린다.

 

(2막)

사랑을 필요로 하는 야수와 착한 벨을 맺어주기 위해 신하들은 푸짐한 아침상. 사랑의 무드 등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마침내 벨은 야수의 생일날 그와 함께 춤을 추기로 신하들과 약속한다.

벨이 없는 장미마을은 근심이 가득한데 마을로 돌아온 한스 영감이 벨이 마법의 성 야수에게 잡혀 있다고 알리자 우둔한 고집통이 벨을 구하겠다며 마법의 성으로 떠난다생일 무도회에서 벨과 함께 춤을 추던 야수는 벨의 따뜻하고 착한 마음에 조금씩 감동되어 간다. 마침내 야수는 벨에게 마법의 성에 함께 살기를 요청하지만 벨이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애원하자 몹시 슬퍼하며 허락을 하고 만다. 마법의 성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가던 벨이 늑대들의 공격을 받고 쓰러지자 야수가 나타나 죽음을 무릅쓰고 늑대들을 물리쳐 벨을 구하여 성안으로 들어온다. 벨은 생명의 은인인 야수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둘의 가슴에는 서로를 이해하는 따뜻한 마음이 싹튼다마지막 한 개 남은 장미 꽃잎을 바라보며 야수는 벨에게 사랑을 고백하나, 벨은 진정한 사랑은 하나뿐이라며 간곡히 거절한다. 그 때 성안으로 나타난 고집통이 무방비상태의 야수를 찌른다. 심한 상처로 죽어가는 야수를 끌어안고 벨은 진정으로 사랑한다며 야수가 죽지 않기를 기원하자 신비한 빛줄기와 함께 장미의 요정들이 춤추는 가운데 야수는 마법에서 풀려나 왕자로 변하고 그외에 성안의 모든 것들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행복한 노래가 울려 퍼지고 즐거운 잔치가 벌어지는 가운데, 벨과 왕자는 행복한 결혼식을 올린다.

 

작· 연출의 변 김상열 꽃은 가슴 속에 핍니다

아파트 단지 안에 작은 공원이 있는데, 아이들은 그걸 '십자공원'이라 불렀습니다. 시멘트 건물 사이에 작은 동산을 일구어 어린이들의 쉼터를 만들어 준 것입니다. 겨우내 을씨년스럽던 작은 공원에는 봄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면서 새싹과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따스한 일요일 오후 나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봄 냄새를 맡기 위해 한가로이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진달래꽃 무더기 앞에서 잠시 발을 멈추고 있는데 저쪽에서 누군가 휠체어에 실려 천천히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사롭지 않은 모습이라 가만히 눈여겨 보았더니 작은 소녀 하나가 어머니가 탄 휠체어를 조심스럽게 밀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내 딸아이가아픈 사람인가 봐!"하고 소리를 높이길래 실례됨을 타이르고 풀섶으로 길을 비켜 주었습니다. 휠체어에 탄 중년의 어머니는 지체가 부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두 눈을 감고 있어 맹인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어린 소녀는 어머니의 등 뒤에서 자상하게 봄의 정경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엄마, 목련은 활짝 피었구, 살구꽃은 예쁘게 몽우리가 지었어." 어머니가 나직한 소리로 물었습니다. "진달래는 없니?" 소녀는 대답을 했습니다. "진 달래는 온통 분홍색이야. 그리고 오른쪽에는 개나리도 피었구." 어머니가 다시 말을 잇습니다. "진달래 속잎을 자세히 보면 작고 검은 점이 있단다.", "정말 그래 엄마!" 진달래의 속점까지 아는 걸 보니 실명한 지가 오래 되신 분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어머니는 어린 딸의 설명을 통해 가슴 속에 화사한 봄 색깔을 되새기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십자공원'의 꽃보다도 더 찬란하고 아름다운 꽃들이 그 어머니의 마음 속에 피어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두 모녀의 봄나들이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습니다. 나는 가슴 속에서 슬픔보다 훨씬 강한 희망이 솟구쳐올랐습니다. 소녀는 눈으로 봄을 맞이하고 그 어머니는 가슴으로 봄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눈을 뜨고도 아름다운 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록 본다 한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봄을 안내하는 소녀의 마음으로 「미녀와 야수」를 만들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야수의 모습은 흉하나 그의 마음 속에는 작은 사랑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벨은 야수의 가슴 속에 사랑의 꽃을 피워 줍니다. 겉모습이 흉측하다고 마음까지 흉측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아름답게 치장된 것보다 진실한 마음을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꽃은 '십자공원'에만 피는 게 아니라 착한 사람들의 가슴에도 핍니다휠체어를 탄 어머니와 그것을 미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