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불법체류 노동자 무하마드 알리의 갑작스런 죽음을 탐문하며 시작하는 이 연극은 동명의 미국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의 삶을 중첩, 대조시켜 절묘한 풍자의 진수를 보여준다. 알리의 삶을 마치 뉴스를 보듯 관망하는 형식으로 무대화해, 주변에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우리 사회 문제를 체면화 하는 우리의 모습을 최대한 가깝게 느끼게 한다. 또한 <알리>는 관객들에게 반복된 형식의 자극과 단절로 공연을 관람하고 있는 상황을 기억시킴으로써 극의 의도를 전달하는 서사극의 구조를 드라마에 도입한다. 무대는 네 개의 큐빅과 사각의 링으로 이루어진 권투 경기장으로 변신한다.

서울 근교의 소도시. 불법체류 노동자 무하마드 알리는 자신의 무허가 컨테이너 노점이 있는 동네가 재개발 지역으로 선정되면서 빈털터리로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결국 알리는 생존을 위해 농성을 벌인다. 그러나 그는 용역업체의 강제 진압으로 인해 심각한 상처를 입고, 고향 파키스탄으로 추방당한다. 불법체류 노동자 무하마드 알리의 삶이 무대 위에서 이야기됨과 동시에,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의 삶이 재현된다. 미국 사회의 인종과 종교에 대한 편견, 제국주의적 오만에 맞서 싸우면서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킨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싱 영웅의 삶과 불법체류 노동자 무하마드 알리의 삶은 묘한 대조를 이루며 중첩된다. 이들에게 삶은 모두 사각형의 좁은 링 위에서 벌어지는 복싱과 같은 것. 노동자 알리의 한국 체류기가 밝혀진다. 그가 한국에서 만난 모든 사람은 자신은 무하마드 알리에게 친절했으며, 오히려 그가 자신과 지역사회에 피해를 입혔다고 발뺌을 한다. 그리고 몇 년 후, 심각한 상처를 입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무하마드 알리는 복수를 위해 한국으로 되돌아오는데…

극은 아홉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 에피소드를 제외하고 8회전(에피소드)의 각 라운드는 파키스탄 출신의 한국내 불법체류 노동자 무하마드 알리가 마트 사장, 단속공무원, 공장주, 길거리 음식업체 사장(교회 장로), 친구 이브라함, 귀순자, 극락사 주지(바르게 살기 위원회 위원장), 낙선 정치인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작가는 이 불법체류 노동자와 이름이 같은 미국의 전설적인 복서 무하마드 알리의 삶을 중첩시키면서 극을 전개시킨다. 미국 사회의 인종과 종교에 대한 편견과 제국주의적 오만에 맞서 싸웠던 복서의 영웅적 삶과 부당한 대우 속에 폭력에 의한 상처를 안고 비참한 생을 살아온 노동자 무하마드 알리의 삶이 교차 재현된다. 복서 무하마드 알리의 삶은 서술자에 의해, 또 그의 어록은 영어로 배우의 떠버리 연기에 의해 전달된다.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인물의 삶을 통해 우리 사회의 폭력적 메커니즘과 투쟁양상이 관객들에게 보여진다. 극의 내용으로만 볼 때 이 작품은 사뭇 진지하고 처절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첫 장면에서부터 이 작품은 코미디라는 것이 예고된다. 무대 뒤편의 영상을 통해 나타나는 이 극의 타이틀은 만화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노란색과 검은색의 혼합글씨체로 되어 있다.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영어로 떠벌이는 말들은 번역돼 영상자막으로 나타나는데 케케묵은 영화에서 나오는 것 같은 구닥다리 글씨체다. 매 라운드마다 팬티만 걸치고, 하이힐을 신은 채 나타나는 라운드보이의 모습 역시 코믹하다. 매 라운드는 중국집 배달원이 음식을 갖다 주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다"라는 의미를 전달하려는 듯하다.

<누가 무하마드 알리의 관자놀이에 미사일 펀치를 꽂았는가?>는 이에 답하기 위해 지난한 진화의 과정을 거친다. 전제적 구조는 이렇다: "무하마드 알리가 죽었다." 그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인물들이 차례로 사슬처럼 잇달아 등장하여 전사(前史)를 구성한다. A(마트 사장) - B(단속 공무원) - C(공장주) - D(교회 장로) - E(친구 이브라힘) - F(귀순자) - G(극락사 주지) - H(재개발위원장)를 거치면서 파란만장한 이주노동자 무하마드 알리의 한국살이가 전개되고 틈틈이 철가방을 들고 얼굴을 내밀던 중국집 배달원(I)이 그의 사후를 진술한다. 여기에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는 노동자 알리의 배후에서 춤을 추듯 스텝을 밟고, 노래하듯 떠벌이며 권투(대결)에 대한, 즉 노동(삶)에 대한 불굴의 의지, 그 상징으로 너울거리고, 마이크를 쥔 서술자는 계속 두 알리의 인생 편린들을 소개하며 그 이질감을 주입시킴으로써, 아이러니컬하게도 동질감을 각인시킨다. 여기까지는 그동안의 텍스트들이 같이 간다. A부터 H까지 체인처럼 엮이며 알리의 스토리는 론도(윤무)를 춤추었으나 정작 결말에서는 그 연쇄구조를 책임지지 못했던 것이다. 누가 무하마드 알리의 관자놀이에 미사일 펀치를 꽂았는가? 이렇게 시작한 이 극은 스스로 답하지 못했다. 구조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수정이 시도되었을 것이다. 그럼 두 번째 텍스트는? 종교적 응징으로서의 타살? 고전적 비극의 냄새가 난다. 영웅적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역시 구조적으로는 실패에 가깝고 드라마로서도 뭔가 미진하다. 소위 '구조적' 이려면 형식과 주제가 손을 맞잡아야 하며, 제대로 된 드라마라면 뭔가 뭉클한 그거, 그런 것이 진하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세 번째 텍스트를 보자. 고난 끝에, 스스로의 종교적 신념마저 저버리면서 삶의 질곡을 통과하며, 그리고 처절한 실패 끝에 알리는 스스로 변화한다.

작가의 글 -안재승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은 두 가지로 평가되기 마련입니다. 좋은 것 혹은 나쁜 것. 사람이 본성적으로 그러한 평가기준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인지, 현실이 그 두 가지의 평가 기준을 내면화시키는 것인지에 대해선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상엔 좋은 것과 나쁜 것의 두 가지 부류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분명 좋으면서도 나쁜 것, 나쁘면서도 좋은 것은 존재합니다. 예외란 것은 항상 있게 마련이니까요. 대다수의 사람은 그런 모호한 부류의 것을 대면할 경우 심각한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쁜 것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가뜩이나 바쁘고 복잡한 세상에 감히 사람을 생각하게 만들다니! 생각하게 하는 것, 그것은 조작된 웃음만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선 죄악으로 규정되니까요. 때로는 그렇게 모호하고 예외적인 것들에 진실이 내포되어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믿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모호하고 예외적인 것들이라고. 제가 만들어낸 이야기들이 앞서 이야기한 부류에 속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잘 모르겠다는 평가가 일반적이었지요.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제가 가진 장점은 장점 그대로, 단점도 발전 가능한 장점으로 받아들여 주시는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고맙게도 그분들은 제 이야기가 지닌 현재의 불가능보다는 미래의 가능에 더 큰 관심과 믿음을 가져주시는 것이겠지요. 그분들의 관심과 믿음이 제게는 무엇보다 더 큰 동기가 됩니다. 가능에 대한 믿음은 항상 기대를 수반하기 마련입니다. 기대는 다시 부담감을 가중시킵니다. 하지만 부담감에 짓눌려 마냥 머물러 있지는 않겠습니다. 그렇다고 지나친 욕심 부리지도 않겠습니다. 그냥 단점을 장점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꿈을 상실한 새 세상을 부유하는 티끌 같은 인간들이 생을 의지할 무언가를 찾았으면 좋겠다는 제 작은 바람, 자본에 의해 한 인간이 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제 작은 바람,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타자에게 가하는 폭력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제 작은 바람 그리고 앞으로 생겨날 무수히 많은 제 작은 바람들이 현실에서도 가능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나영 '소풍혈전' (1) | 2022.04.29 |
---|---|
이연주 '어느 마을' (1) | 2022.04.29 |
안희철 '데자뷰' (1) | 2022.04.26 |
김성진 '이를 탐한 대가' (1) | 2022.04.26 |
위기훈 '마음의 준비' (1) | 2022.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