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 내리는 밤. 세상과 고립된 듯한 외딴 가옥의 별채.
머지않아 기억 속으로 사라지게 될 공간에서 대학교수 현,
그의 제자 정혜, 현의 조카 산하 세 사람이 책을 정리하며 마지막 밤을 보낸다.
부모의 흔적을 찾아 파리를 여행하다가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산하는 작은 아빠인 현에게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꺼내며 과거를 캐묻는다.
암울한 시대와 주체하지 못하는 열정, 사랑, 배신, 증오, 출생의 비밀……
La Vie En Rose, Danny Boy, Go where you wanna go 의 선율과 함께 세 사람의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이어진다. 메이데이, 은방울꽃, 학생운동, 파리, 마들렌의 호텔, 파리 텍사스, 역사, 사랑, 죽음, 진실…… 하지만 격앙된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서로의 상처를 피해가며 나누는 세 사람의 대화. 눈이 그치고 사방은 고요한데 들릴 듯 말듯한 중얼거림. 진실을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폭설이 내리는 밤, 산속 외딴 별채에서 아물지 않은 상처를 안고 시대를 보내는 세 사람이 20여 년 전 기억과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을 담은 연극이다. 이 작품에는 현, 정혜, 산하 세 사람의 등장인물이 나온다. 지방대학 국문과 교수인 현과 현의 이삿짐을 거들려고 온 제자 정혜, 그리고 갑작스레 파리여행에서 돌아온 현의 조카 산하가 만나면서 극이 진행된다. 산하의 부모와 현의 관계 그리고 그들의 사랑과 진실이라는 외형적인 서사구조가 읽혀진다.
송선호 작가는 “몇 해 전부터 ‘1980년대식’이라는 부제를 달고,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며 살아가는 중년의 여성, 출생의 비밀과 관련된 소설을 쓰겠다며 고모를 괴롭히는 작가 지망생, 그리고 은방울꽃과 파리 등을 소재로 한 희곡을 구상해 왔습니다. ‘You don't understand’는 그 구상을 모티브로 이번 공연 조건에 맞추어 새롭게 쓴 희곡입니다”라 한다.

국문과 교수인 현에게 산하는 옛 연인의 딸이자 형의 딸인 조카이다. 정혜는 현의 제자이면서 연인이다. 현은 정혜을 옛 연인의 딸로 대할 때도 있고, 조카로 대할 때도 있다. 이 구분은 주관적이어서 관객마다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어쩌면 연인의 딸과 조카의 구분이 불가능한 상태로 현은 산하를 보고 있는 지도 모른다. 현에게 산하는 연인의 딸이나 조카보다 더 가까운 관계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정혜를 대하는 현의 태도 역시 제자와 연인이라는 관계를 굳이 구분하기 보다는 제자이면서 연인으로서 대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어정쩡한 관계일 수 있지만 제자보다도 연인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일 수 있다.
정혜에게 산하는 지금 사랑하고 있는 현의 옛 연인의 딸이면서도 현재의 연인인 현의 조카다. 옛 연인의 딸인 산하는 정혜에게 현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아픔이지만 현의 조카인 산하는 가까워져야만 하는 관계다. 산하에게 현은 어머니의 연인이며서 아버지의 동생이다. 정혜는 작은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사람이면서 현의 연인으로 옛 연인이었던 어머니를 상기시키는 인물이다. 이 복잡함을 복잡함으로 보면 더욱 복잡해진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이 인물들은 한마디로 매우 가까운 사이다.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알 수 없지만 매우 가까운 것은 사실이다. 너무 가깝기 때문일까? 이 복잡함을 배우들은 아주 무심하게 연기한다. 내면의 감정들을 드러내는 연기가 아니라 감정을 감추는 연기다. 현과 산하가 들려주는 죽은 자들의 이야기는 어쩌면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이 흔히 겪거나 보았던 일들일 수 있다. 사랑과 사상 사이에서 사상을 택했던 사람들과 사랑을 택했던 사람들. 사랑했던 현을 떠나 사회주의 사상을 같이 했던 현의 형과 결혼을 한 여인. 산하의 어머니는 사랑과 사상 사이에서 사상을 택했지만 이혼하고 파리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한다.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상처 입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누가 상처를 준 걸까? 산하가 과거의 이야기들을 다시 들추어내는 까닭은 무엇일까? 현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다시 확인하려는 것은 왜일까? 어머니가 겪었을 아픔을 나눠갔고 싶었던 걸까? 바둑을 복기하듯이 옛이야기들을 소설로 복기하는 산하는 과거의 아픔들을 기록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는 이 아픔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시대에 대한 고발일지도 모른다. 사랑도 상처가 되었던 시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시대에 대한 고발이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상처를 준 사람들이 많았다는 말이다. 이 연극의 속에 등장하는 현과 산하의 어머니. 그리고 현의 형은 서로에게서 상처를 받았지만, 또한 서로에게 상처 준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연극의 제목, ‘YOU DON'T UNDERSTAND' 는 ‘당신은 타인의 상처에 대해 모른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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