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는 1920년대. 여성 식물학자 클레어 아처가 있다.
전 남편과 이혼 후 현재 해리와 재혼하였으나 집의 밀폐된 온실에서 새로운
변종 식물을 개발하고 있다. 미국 사회의 규범에 도전하는 선구적인 여성이다.
풍요롭지만 답답한 그녀의 온실에서, 그녀는 단순한 식물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식물을 계속 만든다. 각각의 식물 생명체는 그녀의 끊임없는 자율성 추구를 상징한다.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통제하고 억압하려 들수록, 클레어의 집착은 더욱 깊어지고,
결국 섬뜩한 파국으로 치닫는다.
긴장감 넘치는 심리 드라마, 가장자리(The Verge)는 천재성과 광기, 창조와
파괴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탐구한다.
클레어의 비전은 꽃을 피울까, 아니면 그녀를 파멸로 이끌까?

글래스펠의 문학작품에 대한 기존의 평가는 주로 가부장적 체제나 제도 하에서 여성의 의견을 침묵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많다. 그러나 글래스펠의 문학이 보여주는 깊이는 많은 문학연구가들로 인해 그녀의 문학이 여러 학문의 지식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내었다. 특히 요즘의 학문 풍토에서 나타나는 학제 간 연구 경향은 그녀의 문학세계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양상들, 가령 여성주의, 언어철학, 인종차별에 대한 반대, 초민족주의적인 생각, 인권, 반전, 정신분석, 자본주의 사상은 우리 시대의 생각을 밝혀내는 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그녀의 글쓰기가 매우 독특한 까닭은 그녀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철학, 법학,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 심리학 등에 대한 글래스펠의 지식은 글래스펠로 하여금 독특한 글쓰기를 보여주는 원천이 되고 있다. 국내 및 해외 학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시시각각으로 연구하는 논문의 경향을 다 파악할 수 없다는 한계를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해도 전반적인 추세는 그녀의 작품을 단지 페미니즘이 론으로만 국한시킬 수 없다는 점이다. 따리서 글래스펠 문학의 총체성을 한마디로 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의 예술작품 전반을 통틀어 나타나는 특징 중의 하나는 언어의 본질과 의사소통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특징은 그녀가 살았던 모더니즘 시대의 예술적, 철학적 개념에 부합되는 것이다. 글래스펠이 여성들의 세계를 보여준 방식은 독특한 글쓰기 방식과 언어에 천착한 것으로서 세계사에서 존재했던 오랜 가부장적 사고의 언어가 지배하면서 여성으로 하여금 침묵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의 틀을 깼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글래스펠은 자신이 태어난 사회의 전통적인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때로는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억압하고 질식시키는 보수적 영향력에 의해 의문을 제기하고 반추한다. 바로 이러한 태도가 글라스펠이 구현하는 페미니즘 문학의 색채이다

'가장자리'는 여성 작가로서의 글래스펠이 최고조로 발전한 것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보는 이유는 첫째 비재현적인, 총체적인 극이고 모더니스트 사고로 몇 가지 근본적인 개념을 전달하고 실현한 극적 테스트가 되기 때문이다. 창조하려는 의지는 모든 예술영역과 사회 영역을 포함하여 모든 예술가의 욕구인데 바로 글래스펠은 그러한 욕구를 언어로써 시도하려한다. 아이러닉하게도 그런 시도가 사실 불가능하며 그것은 니체가 말하는 “언어의 감옥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나 혹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논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장자리'를 새로운 시각에서 보아야 함은 이 작품을 여성주의자 시각이나 가부장적 시각을 비판하는 것에서 탈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레인 쇼월터(Elaine Showalter)의 '페미니스트 시학을 위하여'와 엘렌 씩서스의 여성적 글쓰기의 개념에 의해서 여성 글쓰기와 언어를 보여주는 '가장자리'는 여성작가로서 최고로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이유는 단순히 여성주의를 표현한다든지 혹은 남성 압제를 보여준다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클래어를 통해 여성 경험을 재현하고 새로운 예술 형식을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세계, 새로운 미래로 니이길: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가장자리'는 여성의 경험을 극화시키는데 있어서 그녀의 식물실험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전통적인 여성의 가치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극은 결혼한 여성들의 위치, 다시 말해서 어머니이자, 아내로서의 위치에서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데에서 오는 가치와는 무관하게 자신을 추구하고 자아를 찾아보려는 한 여성, 클래어의 투쟁이며 반역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이 결국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전통적인 가치 때문에 좌절되는 것을 보여준다.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이라는 표현은 찬송가의 구절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마지막 장면이 담고 있는 내용은 실은 여성은 가부장적사회의 시각과 틀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오로지 절대자 하나님으로 구현되는 것과 같은 사회의 어떤 절대적인 권력 앞에 무릎 꿇어야 하는 상황을 비판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으로 표상되는 절대 권력 앞에 인간이 순종할 것을 요구하는 기독교적인 색채를 띠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절대 권력이란 실제로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절대 권력을 가진 자들이 프로빈스-타운의 예술가들, 나아가 모더니즘 시대의 예술가들이 추구했던 자유로운 정신을 억압하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던 권력의 실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글래스펠 직품에 나오는 다른 어떤 여주인공들보다도 가장 극적이고 위트 있고 매력적인 인물은 단연 '가장자리'에 나오는 클래어 아처이다. 글래스펠이 식물 실험과 연관시켜서 클래어를 통해서 나티내고자 하는 클래어 자신,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클래어, 그리고 여성이라는 위치에서의 자신, 이렇게 한 인물에서 세 여성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세 양상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서 글래스펠이 나타내려고 했던 것은 모더니즘 시대에 두드러진 신여성의 모습이다. 이러한 신여성은 타자로서, 혹은 기존 사회에는 위협적이거나 반기를 드는 여성이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은 무한하게 창조해 나가는 여성이다. 그녀는 뉴잉글랜드의 청교도적인 조상의 배경을 갖고 있는 여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신의 삶에서는 그러한 모든 것에서 자유로움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식물 실험에서 나타나는 정신을 통해서이다. 자라나는 식물을 불안하게 만드는 실험을 하여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고 그럼으로써 주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깜짝 놀라게 하는 여성이다. 마치 기이하고 “아름답다기보다 매혹적인” 넝쿨의 모습처럼 기이한 여성인 그녀는 때로는 남성들에게는 무시무시하고 이해할 수 없게 느껴진다. “넝쿨의 잎들이 원래 유지해왔던 형태가 아니듯이” 그런 그녀의 세계는 그녀의 온실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엄청난 도약"을 경험한다. 그녀의 온실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자라나는 식물은 자기 창조에 대한 은유와 상징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이것은 식물들이 전시되는 온실도 아니고 그것들을 기르기 위한 흔한 작업실도 아니지만, 식물로 실험을 하는 장소, 즉 실험실이다. 뒤쪽으로 기이한 넝쿨이 자란다. 아름답기보다 매혹적이다. 그것은 낮은 벽을 따라 기어가고 한 가지는 약간 유리 위쪽으로 올라가 있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그런 식으로 우연히 생각했다면 그 안에 십자가 형태를 볼 것이다. 이러한 넝쿨의 잎들이 원래 유지해왔던 형태가 아니다. 그것들은 혐오스럽고 동시에 의미심장하기도 하다. 새로운 종을 개발한다는 것, 그것은 새로운 여성이 된다는 것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극과 새로운 언어실험으로 이루어지는 극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예술가를 의미한다. 그녀는 자신의 온실에서 새로운 두 식물에 이름을 붙여 실험을 한다. 하나는 "Breath of Life”, 다른 하나는 "Edge vine”이다 "Breath of Life"는 창조 정신, 즉 형태와 본질이 생겨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인 정신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꿈과 소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리서 그녀는 식물 삶의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기 위한 노력에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다 바친다. 평생 동안 자신이 해온 작업이 성취되는 절정시점에서 광기에 다다른다. 그녀는 남편을 무시하고 자신의 딸을 거부하고 자신의 동생을 모욕하고 그녀의 남자 친구이며 영혼의 동반자적 역할을 하는 톰을 유혹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그들이 방해할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애인을 목 졸라 죽인다. 사회의 엄연한 법 안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클래어의 행위에 대해서 독지는 글래스펠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가장자리'의 작품 배경이 되는 식물 온실에서의 식물실험은 미국문단에서 비 상업적이고 실험적인 극을 보여주고자 하는 글래스펠의 의도이다. 여성이 새로운 무엇인가를 꿈꾸고 창조하기에는 이미 미국의 문단에서, 그리고 공연세계에서 조차 가능한 것이 아님을 그녀는 극단 배우들의 활동과 자신의 실험적 작품을 통해서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가장자리'의 관객들은 가정적인 삶에 젖은 관객들로 가부장적 세계관을 내면적으로는 지지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프로빈스-타운 배우들은 일반 관객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난해한 극을 공연하였고 그러한 난해 한 극을 관객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즐거워했다. 그들은 극중 인물을 통해 세상을 풍자하였다. 니체가 슈퍼맨의 개념을 창조한 것과 달리, 글래스펠은 '가장자리'의 주인공 클래어를 통해 슈퍼우먼을 창조하고 싶었다. 그 의도는 남성이 만든 세계에서 여성이 낼 수 있는 목소리와 언어가 제한되어 있는 것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자 반항을 보일 수 있는 여성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단순히 가부장적 세계에 대해 반기를 드는 여성이 아니라 여성에게 입을 다물게 만들고 침묵하게 하는 세계, 권력의 세계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여성상이었다. 클래어가 보여주는 것은 깨뜨리기 어려운 사회구조와 뛰어 넘기 어려운 단단한 높은 벽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아 실은 그러한 도전이 타인들에게는 의미 없고 소용없는 것처럼 인식되는 것이기에 그저 종교적인 것으로 돌려야만 하는 것을 풍자하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 세계의 언어에 길들여진 존재였고 그것을 깨부수는 일은 오로지 광기처럼 무모하게 비춰진다. 이미 받아들여진 사회의 규범과 기준, 행동 양식에 직면할 때 그녀가 새로이 만들어낸 가치와 규범은 실제로는 그녀의 식물 실험이나 기존 미국 연극의 형식에 반하는 실험극처럼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다. 글래스펠이 활동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미국 연극이나 가부장적 세계의 권력이 지배하는 그 모든 이념적인 것을 그녀가 깨뜨리고 싶은 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해체하기를 원해요. 만약 그러한 것이 모두 조각난 것이라면, 우리는 살아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겠지요.”라는 그녀의 말은 만들어진 형식을 깨뜨리고 더 나은 식물을 만들어내는 실험적인 목표처럼 새로운 삶의 형태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여성의 외로운 투쟁을 의미한다. 낡은 형식을 깨고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할 때만이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글래스펠의 예술관은 오늘, 지금, 이 시대를 살면서 잘못된 기존의 틀과 형식에 만족하면서 권력에 굴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월미도 살인사건' (원작 熱海 번안) (1) | 2026.03.10 |
|---|---|
| 에드워드 올비, '키 큰 세 여자' (1) | 2026.03.09 |
| 수잔 글래스펠 '아웃사이드' (2) | 2026.03.07 |
| 안드레스 칼라우스키 '보이지 않는 아이' (1) | 2026.03.07 |
| 맥스웰 앤더슨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 | 2026.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