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박진희 '위대한 뼈'

clint 2022. 2. 9. 18:20

 

 

 

<위대한 뼈>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50대 가장 김병태가 어느 날 가족에게 편지 한 통만 남긴 채 사라지면서 시작된다. 그는 회사 물류창고에서 20살 청년의 사망사고를 목격한 뒤로, 자신의 몸에 아가미가 생겨 물고기로 변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물만 보면 뛰어들고 싶다는 병태는 혹시나 이러한 증세가 딸에게 유전되는 건 아닐까 고민을 하다 진규백교수와 만난다. 유전학계에서 저명한 인물인 진 교수는 불법 임상 실험을 제안하게 되고 병태는 이를 받아들인다. 실험 과정에서 병태는 에콰도르에 (위대한 뼈라는 이름을 가진) 그란데 위소에 대해 설명을 듣고, 그곳으로 가겠다는 목표를 품는다. 그란데 위소엔 병태와 같은 물고기 인간, ‘돌연변이가 많다는 이유였다.

한평생 책상 앞에서만 살던 병태가 갑자기 변한 모습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내 이경아는 한숨을 내쉰다. 그러다 커다란 입, 단순한 눈의 물고기들을 얘기하며 나가고 싶은데 나가는 길을 모른다고 토로한다. 본인 또한 수족관 같은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 방법을 모른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전개 내내 책임감 없는 어른으로 그려졌던 경아의 자기 고백과 성찰이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작품은 한 중년 남자로부터 시작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회적 입지가 좁아지는 가장 병태는 가족의 외면과 심리적 압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신이 물고기로 변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홀연히 사라진다.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와 가장의 실종, 수일간의 행적을 두고 가족 사이 설왕설래가 펼쳐진다. 그러한 순간에도 병태의 인간성은 점점 상실되어 가고,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만 남겨진 채 물고기로 퇴화된다. 작품은 자기모순에 빠진 병태와 그의 행적을 쫓는 경아, 수민, 그리고 자신의 연구 성과를 위해 병태를 이용하는 진박사, PD 등 사회에 만연한 왜곡된 인간성에 주목하며 현시대의 자화상을 뭍으로 끌어올린다. 카프카 <변신> 속 벌레가 된 그레고르, <위대한 뼈> 속 물고기가 된 병태. 100년을 넘어 이어진 평행세계가 눈 앞에 펼쳐진다.

 

 

 

 

작가의 글

위대한 뼈는 자발적으로 퇴화를 선택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사회에서 자발적으로 증발하고 있는 인구가 매년 증가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이들은 가족과 직장을 떠나 스스로 사회적 퇴화를 선택한 사람들이라 소개되었다. '스스로 퇴화를 선택한 이들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라는 의문에서 이 작품은 시작되었다. 세상은 무한 경쟁, 일류 발전, 신인류로의 진화와 같은 사회적 슬로건을 내세우며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가길 강요한다. 발전의 패러다임에 속하지 못하거나 밀려난 이들에게 자비는 없다. 사회에서 내 자리를 잃어버리는 것은 내 존재를 부정당하는 일이다. 우리는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 불안과 싸우고 누군가와 경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사소한 균열만으로도 우리는 언제든지 낙오자가 될 수 있다. 작품 속 주인공, 병태는 스무 살 아이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몸의 변화가 시작된다. 그를 퇴화하는 인간으로 만든 사건은 사회에서는 흔한, 사소한 '사고'일 뿐이지만 병태에게는 삶을 뒤흔든 충격적 사건이다. 현대문명의 견고함은 병태와 같은 평범한 이들을 고립과 도태로 내몰고 있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그저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몸부림칠 뿐이다.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병태가 선택한 퇴화는 사회적 도태가 아닌 인간다움을 지켜내기 위한 퇴화이다. 위대한 뼈는 인간다움을 지켜내고, 나답게 살기 위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담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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