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작가미상 잡극 '격강투지'

clint 2025. 3. 5. 09:43

 

 

 

유비가 군사 제갈량의 지략으로 형주를 점령한 것을 시기한 동오의 대원수 
주유는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백만 대군과 맞서 싸운 것은 동오였으니 
형주도 당연히 동오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주군이던 손권의 누이 손안을 유비에게 출가시키는 미인계를 써서 
유비를 살해하고 형주를 빼앗으려 한다. 
제갈량은 동오의 군대가 혼례식 날 신부 손안을 배웅한다는 핑계로 
형주성으로 난입해 유비를 살해하고 형주를 빼앗으려 한다는 것을 직감하고 
즉시 장비에게 신부와 시녀만 성안으로 호위해 들어오게 하고 주유가 
고심해서 짠 그 계책은 결국 헛수고로 돌아가고 만다. 
원치 않던 정략결혼으로 볼모 신세가 된 손안도 유비의 비범한 모습과 
제갈량· 관우· 장비· 조운 등 장수들의 늠름한 기개의 충성심에 감동해 
유비를 진심으로 남편으로 받아들인다. 
두 가지 계책 모두 실패한 것을 안 주유는 노숙을 형주로 보내 회문인사를 
명목으로 유비와 손안을 강남으로 끌어들여서 그를 볼모로 삼고 
형주를 빼앗으려 하지만 이 역시 제갈량에게 간파된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겨울옷을 전한다는 명목으로 유비의 양자 유봉을 
강남으로 파견해서 '조조가 형주를 재차 침략하려 한다'는 거짓 정보를 담은 
비단주머니를 슬그머니 손권 앞에다 떨어뜨리게 한다. 내막을 모른 채 
그 편지를 꺼내 읽은 손권은 처남인 유비와 누이 손안을 당장 형주로 
쫓아보낸다. 뒤늦게 그 사실을 전해 들은 주유가 급히 뒤를 추격하지만 
유비 일행은 벌써 형주로 떠나버리고 장비만 제갈량의 계책에 따라 혼자 
손안의 가마에 타고 있다가 주유를 조종한다. 
수치심에 어쩔 줄 몰라 하면 주유는 마침내 격분해 쓰러지고 
유비 일행은 잔치를 벌여 형주로 무사히 귀환한 일을 자축한다.



<격강투지>는 14세기 원에 무대에서 공연된 집극대본으로 지어졌다. 원작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삼국지 이야기'를 소재로 한 희곡들 중에서는 비교적 성공작으로 꼽힌다. 정식 제목은 <양군사격강투지, 유현덕교함양연>으로, 직역하면 '두 군사는 장강을 사이에 두고 지략을 겨루고, 유현덕은 절묘하게도 좋은 연분을 맺다' 정도로 새길 수 있다. 7자씩 대구를 이룬 이 제목은 원래 원대에는 연극을 홍보하는 문구로 극장 앞에 양쪽으로 내걸기 위해 지어졌다. 그러나 명대에 이르러 잡극의 희곡이 서재에서 독서를 위한 읽을거리로 수렴되면서 원래 제목은 너무 길어서 앞부분만 따서 <양군사격강투시> 또는 <격강투시>로 일컫기 시작했다. 제목 자체만 놓고 보면 유비의 군사 제갈량과 손권의 대원수 주유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극중사건과 상황들은 여주인공 손권의 누이 손안을 주축으로 관찰자 시점에서 전개된다. 중국 연극사에서는 이처럼 여자가 주인공을 맏이 노래를 부르고 연극을 주도하는 희곡을 '단본(本)'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보니 <삼국연의>에서 언제나 날고 기는 영웅호걸로 각광을 받는 제갈량과 주유도 적어도 이 작품에서는 한낱 조연이나 들러리에 불과할 뿐이다. 제갈량과 주유는 서로 계책을 내고 공방을 주고받지만 그 모든 지략겨루기의 승패를 결정하는 열쇠는 제3자인 손안에게 쥐어져 있는 것이다. 원작자가 이 작품에서 관객에게 보여주려한 것은 진부한 제갈량과 주유의 승부, 또는 유비와 손권의 대결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나약한 여성으로 정략결혼의 희생양에 불과하던 손안이 의지에 따라 자기운명을 주재하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나가는 강인하고 현명한 여성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이 같은 작자의 의도는 손안의 노래나 대사를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엿볼 수가 있다. 



원대 잡극은 일반적으로 네 개의 '절'과 하나의 설자'로 이루어졌다. '절은 연극적으로는 '막(act)'에 해당하는 것으로, 일정한 내용이나 목적을 가진 극중사건을 다루는 하나 이상의 장면으로 구성된다. 이에 비해 '설자'는 목조건물에 박아 넣는 쐐기라는 뜻 그대로 각 장면, 줄기의 연결과 전환을 좀 더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안된 극적장치로 희곡의 도입부나 중간에 일종의 '막간극'으로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현존하는 잡극 희곡들을 분석해 보면 네 개의 '절'과 하나의 '설자'로 구성된 삼극은 공연 세 시간 정도가 소요되는데, 공연하는 배우나 감상하는 관중 양쪽에게 모두 무난한 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잡극에서는 극중인물이 대화하거나 상황을 묘사하거나 심리를 표현할 때 크게 일상적인 어투로 이루어진 서사적인 대사와 악기반주에 맞춰 부르는 서정적인 노래가 함께 사용된다. 잡극 이후로 중국의 고전극에서는 배역에 상관없이 누구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쪽으로 진화했다. 그러나 13~14세기에 무대에 올려진 원대의 잡극에서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권한이 남녀주인공에게만 부여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예를 들어 <남채화>나 <간전노)> <오동우> 주인공이 남자인 작품은 '말본', <격강투지> <화란기>처럼 주인공이 여자인 작품은 '단본'이라고 불렀다. 잡극에서 대사와 노래는 서로 독립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주인공이 노래를 부르는 도중에 다사나 대화를 엿섞어 연출하는 기법도 수시로 시도되었다. 잡극에는 대사와 노래 이외에도 주요 인물이 등장하거나 퇴장할 때는 해당 인물을 소개하거나 특정상황을 고시하는 시를 읊었는데, 등장시를 '상장시', 퇴장시는 '하장시'라고 불렀다.
극음악 : 잡극은 연극 장르의 특성상 오페라 범주에 속한다. 잡극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는 뜻이다. 잡극의 각 대목은 연극 적으로는 '절'이나 '설자'로 불렸지만 음악적으로는 '투수'라고 했다. 잡극의 극음악에는 정궁·중리·남려·선려, 황종, 대석, 쌍조, 상조, 월조 등 아홉 가지 궁조가 사용되었는데 투수는 이 중 하나의 구조로 구성되는 서로 완결 독립된 악장이 있다. 각 투수는 <점강순><천하락> 등과 같이 해당 극 중 상황이나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소곡, 즉 곡패들이 한두 곡에서 십여 곡까지 사용도 있다. 이때 사용되는 음악은 금송대 이래의 궁중 음악과 송금대의 민간 음악 등 북방계 음악의 7음계 체제를 계승한 까닭에 음계의 남방계 음악에 비해 훨씬 힘차고 장엄하고 힘찬 느낌을 주는 것이 보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