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쓴 단막극 <고모의 죽음>(1924)을 4막으로 확대 개작한
<몬테비데오 별장>의 1막과 4막은 독일의 소도시가 배경이고,
2막과 3막은 우루과이의 수도몬테비데오에서 벌어진다.
내글러는 작은 마을의 선생으로 도덕군자로서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형편이 그리 풍족하지는 않으나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자식만 12명을 뒀다.
그는 아주 보수적이고 옹고집에 도덕심이 강한 사람이다.
오래전 누이동생이 혼전 임신을 하자 집에서 내쫓아 버린 일이 있었다.
오빠에게서 버림받은 누이는 할 수 없이 남미로 이민가게 된다.
20여 년이 흐른 어느 날 마을 신부가 버림받은 누이의 사망소식을 전한다.
동시에 큰딸에게 많은 유산을 남겼음을 알린다. 처음에는 그런 누이의 유산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지만 끝내 몬테비데오로 가서 직접 모든 상속문제를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큰딸 애틀랜타와 같이.
몬테비데오 시외에 고인의 호화스런 저택이 있다. 거기에 젊은 여자들이 살고 있다.
집을 관리하는 여자로부터 애매한 말을 듣는다.
"그분은 아주 작은 재주로 큰돈을 벌었습니다."
내글러는 이 집을 창녀소굴로 오해한 내글러는 큰딸을 데리고 곧장 독일로
돌아가려한다. 같이 온 목사가 자세히 알아본 결과 누이는 마리아 마카도스란
예명의 가수로 크게 성공해서 높은 명성과 부를 얻었음이 밝혀진다.
그 돈으로 재단을 설립해서 한때 자신이 겪었던 어려움에 처한 처녀들이나
어린 미혼모들을 도와주고 있었음도 알게 된다. 고모는 조카 애틀랜타에게
많은 재산도 유산으로 넘겨준다. 유언장에 따르면 단서가 붙어있다.
“도덕군자이신 오빠 내글러 집에서 내가 한때 겪었던 비극처럼 조카에게
혼전에 애가 생긴다면 그 조카에게 엄청난 액수의 유산을 상속해준다.
이 조건은 1년 안에 충족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모든 재산은 마리아
재단에 귀속된다."
애틀랜타를 사랑하는 남자 헤르베르트가 애틀랜타와의 결혼약속받기 위해
약혼녀를 찾아 서둘러 몬테비데오까지 쫓아온다. 내글러는 진퇴양난이다.
'자기 딸이 혼전에 애를 가졌으면' 내심 기대하면서도 일생을 지켜온 자신의
도덕적 신조도 버릴 수 없는 형편이다. 내글러는 미래의 사위에게 넌지시
애매한 귀띔을 해준다. 우선 아이부터 갖고(혼전임신) 나중에 결혼해도
좋다는 뜻이다. 헤르베르트가 무섭기만 한 장인의 말을 이해할 리 없다.
이윽고 내글러는 자신의 비굴한 모습을 문득 깨닫고 미래 사위에게 자신의
뺨을 때리도록 강요한다. 딸의 상속을 포기하고 딸과 목사와 함께 독일로
돌아간다. 하지만 상속에 대한 미련은 너무 크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유언장의 요구는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훨씬 넘어선 것.
아쉽지만 모두 잊기로 하고 큰딸의 결혼을 준비하게 된다.
결혼식은 애틀랜타 배에서 거행된다. 내글러 부부도 이 배에서 결혼했고
그래서 첫째 딸 이름도 애틀랜타라고 지었던 것. 하지만 근래에 와서 측정한
결과 이 배는 길이가 27센티미터가 모자라 정식 배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 배는 배가 아니고 이 배의 선장은 결혼식을 치를 권한이나 자격 없는 것.
그러므로 그간 애틀랜타 배에서 거행된 결혼은 모두 무효가 되고 내글러의
결혼도 무효가 되고 만다. 노부부는 혼전에 열두 아이를 낳은 것이다.
유언장의 요구는 충족된 것이다.
<몬테비데오 별장>은 단막인 <고모의 죽음 Die tote Tante>를 장막으로 확대 개작한 것이다. 이 작품은 연극으로도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또한 영화로도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 헤르만 트라우고트 내글러는 독일 시골의 인문계 고등학교인 '김나지움'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그리고 독일문학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그는 1940년대 독일에서는 평범하고, 보수적인 가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아내 마리안네 또한 성실 근면한 독일의 전형적이며 또한 매력 있는 주부이다. 이런 보통 사람을 희극의 주인공으로 삼은 이 작품이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은 이 시대가 이미 이런 전통적 보수적 인물을 관객이 희극적으로 볼 만큼 사회가 변화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12명의 자식을 거느리고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그리고 자신의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고집하며 살고 있는 내글러 박사에게 어느 날 갑자기 거액의 유산 상속을 받을 기회가 주어진다. 혼전 임신을 했다고 해서 자신이 내쫓은 누이동생이 죽어서 그들에게 유산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그것은 이 집안에 또다시 자신과 같은 혼전임신이라는 불행한 사건이 생길 때 그 미혼모에게 상속된다는 것. 내글러는 거액의 유산에 마음이 흔들리다가 그것은 자신의 도덕적 기준에 반해서 거절한다. 그러나 바로 자신이 단지 법적으로는 아직 미혼이라는 것이 밝혀져 유산을 아내인 마리안네가 받게 된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이 희극에는 웃음을 폭발시킬 수 있는 많은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 장면이 이 대가족의 식사장면이다. 아마도 관객은 제1막 시작의 이 장면으로 인하여 심리적으로 이완되면, 이후의 장면에서도 쉽게 웃음을 폭발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주인공 이외의 매력적이고 전형적인 조역들이 이 희극의 완성을 돕고 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역인 맏딸 애틀랜타는 결혼을 앞둔 착하고 매력 있는 17세 처녀이다. 그리고 이 처녀의 애인 헤르베르트 크라프트 역시 착하고, 그러나 엉뚱하다. 그리고 제2막에서의 데라 로코 부인, 변호사 코르테츠도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전형적이고 매력 있는 희극적 인물이다. 이 희극에서는 서양 희극에서 흔히 보는 극단적 인물의 권모와 술수, 진실과 거짓의 폭로 등은 없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적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사소한 오해, 이들이 만들어내는 극적 상황의 착상,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이 사용하는 재치 있는 대사들은 작가 쿠르트 괴츠가 독일문학에서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한 희극의 천재임을 입증하고 있다.
쿠르트 괴츠 Curt Goetz
쿠르트 괴츠는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한 시대(1930-50년대)를 풍미한 풍자희극의 작가이며, 동시에 뛰어난 배우 및 영화감독으로 활동을 한 예술인이다. 그의 희극은 지나치게 엄숙하고 진지한 독일문학의 전통에서는 블로바르 연극(상업연극)으로 폄하되기도 하지만, 동시대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탁월한 언어유희는 흔히 버나드 쇼나 오스카 와일드와 비견되기도 한다. 그의 대표적인 희곡 〈호쿠수포쿠스>, 〈의학박사 히옵 프래토리우수〉그리고 〈몬테비데오 별장〉은 여러 차례 영화화되어 최고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오늘날까지도 쿠르트 괴츠란 이름을 제외하고는 독일의 블로바르 무대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인기가 지속되고 있다.
쿠르트 괴츠 (원래는 Curt Gotz. 후에 Goetz로 사용했다.)는 1888년 11월 17일 스위스 출신 상인의 아들로 독일의 마인츠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그의 나이 2살 때 아버지가 죽어서, 어머니 젤마 괴츠(여의사)는 잘레로 이사하여, 그는 그곳에서 성장했다. 18세 때 그의 양아버지가 그를 베를린의 연극배우 엠마누엘 라이허에게 소개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 이 듬해 (1907년)에 그는 19세의 나이로 로스톡에서 배우로 데뷔했다. 1911년부터 그는 베를린에서 배우생활을 하며 스스로 불바르극의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전등 갓 1911), 단막극 모음집〈야간조명 1918), 역시 단막극 모음집〈동물원 1919), 그리고 장막 〈잉에보르크 1921)가 그것이다. 1912년 그는 여배우 에르나 니터와 결혼하고 그해 여러 편의 무성영화에 출연했으며 무성영화를 위한 대본도 썼다. 1917년에 첫 부인과 이혼하고, 1920년에 영화사를 차려 직접 무성 영화를 감독, 제작하기도 했지만 곧 연극으로 돌아왔다. 1923년 여배우인 발레리 폰 마르텐스와 재혼하여. 새 아내와 함께 자신의 극단을 조직, 순회공연을 했다. 그 중에서 자신이 쓴 추리 희극 〈호쿠스포쿠스>는 큰 성공을 거두어, 이 수입으로 이들은 스위스의 툰 호반에 저택을 사서 이수했다. 그 후 〈사기꾼과 수녀 1929)와 〈의학박사 히옵 프래토리우스 1932)도 계속 발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30년 그는 다시 자신의 희곡 〈호쿠스포쿠스〉를 직접 영화로 제작하고, 이후 아내와 함께 여러 편의 영화를 직접 만들거나 출연 혹은 관여했다. 그러나 그의 영화가 당시의 나치 권력자를 풍자했다는 이유로 심한 검열을 받고 삭제를 당하였다. 이 시기에 독일의 많은 유능한 영화감독들이 나치 독재를 피해 주로 할리우드로 이주하였다. 그럼에도 괴츠는 자신의 시나리오 <모든 죄는 나폴레옹 에게 있다 1938>에 아내와 함께 주연을 맡았으며, 이 영화는 당시 권력자들을 겨냥한 풍자와 해학으로 관객의 큰 호응을 받았다. 1938년 마침내 괴츠도 역시 아내와 함께 뉴욕으로 이민을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MGM 영화사를 위해 두 편의 시나리오를 더 썼다. 이후 그는 소설 <타타냐 Tatjana>와 <비버리-힐에서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장막극 몬테비데오 별장 Das Haus inMotevideo〉으로 개작, 발표했다. 1945년 그는 <몬테비데오의 집>의 브로드웨이 공연에 아내와 함께 직접 출연했다. 전쟁이 끝나자 1946년 괴츠는 아내와 함께 스위스로 돌아와. <몬테비데오 별장>을 공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는 다시 독일의 여러 무대에서 성공적으로 공연되었다. 1949년 그는 자신의 희곡 <의학박사 히옵 프래토리우스>를 시나리오로 각색, 감독 및 주연을 맡아서 당시 신생 서독의 가장 성공한 영화인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할리우드와도 계속 관계를 유지하며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각색해 주었다. 그는 베를린 예술가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이 후 고령의 괴츠는 아내와 함께 리히텐슈타인으로 은퇴하여 1960년 9월 12일 이곳에서 82세의 일생을 마감했다. 그의 무덤은 스위스 상 갈렌에 있다.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가미상 잡극 '격강투지' (3) | 2025.03.05 |
---|---|
체호프 원작 김용선 재창작 '모스크바 갈매기' (1) | 2025.03.04 |
구앤틀린 퍼어스 '버지니아 그레이의 초상' (1) | 2025.02.28 |
히라타 오리자 'S 고원에서' (1) | 2025.02.27 |
키스 허프 '스테디 레인' (3) | 2025.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