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히라타 오리자 'S 고원에서'

clint 2025. 2. 27. 06:16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아니... 살지않는다.’
고원에 있는 요양원, 마지막 치료를 위해 이곳에는 많은 장기환자들이 머물고 있다.
이들의 병은 곧 죽음과 연결되는 중대한 병이다.

그러나 이곳을 나가는것은, 환자 자신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 어떤 환자들은 자신의

죽음을 알려달라는 선고계약을 하고, 선고를 받으면 내려가기도 한다.
어느 날 오후, 이곳에 저 밑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면회를 온다.

6개월만에 처음 만나는 연인- 무라이와 오오다케. 그들이 요양원에 입원하고

처음 만나는 날. 오오타케는 이별을 준비하고 무라이를 만나러 온다.
무라이는 이 사실을 모르고 설레임과 걱정으로 애인을 기다린다.

그런 무라이를 보고 차마 말을 못하는 오오타케.
아무말 없이 돌아가고, 같이 온 친구가 무라이에게 대신 이별을 전해준다.

일년을 기다려온 연인 - 니시오카와 우에노. 유명한 화가였던 니시오카.

그러나 지금은 색을 잃어버리고 뎃생만을 하고있다.
그러나 니시오카는 퇴원을 자신이 결정할 수 없다고,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고 하며 거부한다.
4년이라는 시간을 같이하고 있는 연인 - 후쿠시마와 후지와라.

이들은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연인들이다. 어쩌면 죽음과 가까운 연인들이다.
그러나 그들사이에는 더 이상 다가갈수 없는 선이 존재한다.
애인의 마지막을 같이 하기 위해 후지와라는 다시한번 결혼에 대해 얘기하지만,

후쿠시마는 침묵으로 이를 거부한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이렇듯 같이 하기를 원하는 그들이지만, 그 사이에는 죽음과 시간이,
그리고 이 위와 저 밑이라는 거리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면회실에서 이별을 하고, 이별을 준비한다.
자신들이 진정 바라는 것은 말하지 않고 숨겨놓은채, 죽음을 선택해 가는 것이다.
생각한다든지, 이것저것 하면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요양원,

그 긴 시간이 너무나 버거운 사람들.
그래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조용한 연극’이라고 불리는 이 연극은 우리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과장없이 보여준다. 항상 우리곁에 머물고 있는 일상. 바로 그 일상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가? 또한 현재 우리의 일상은 어떠한 모습인가?
바로 그 모습을 찾기 위한 시도가 조용한 연극이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 문제도 없는 듯 평화롭게 보이는 일상. 하지만 어쩌면 그 깊은 곳에는 소용돌이와도 같은 욕구가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이러한 겉과 속의, 현실과 환상의 불일치 속에서 우리의 자아는 분열되고, 존재의 시간은 멈추어 버린다. 그래서 조용한 연극은 다른 말로 ‘외치지 않는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자신의 목소리를 숨기는 연극’인 것이다. 자신이 진정 바라는 것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겨야만 하는 현실. 숨길 수 밖에 없는 그것을 드러냈을 때 다가오는 불안과 공포. 그것을 견디기 힘들어 때로 우리는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 속에서 우리의 삶은 어긋나고 빗나가며, 그러한 삶속에서 우리의 만남은 더욱 멀어지고 그 골은 깊어만 가는지도 모른다. 그 ‘숨김’과 ‘드러남’ 속에서, 그렇게 우리의 삶은 많은 것을 숨겨 놓은채 우리 곁을 지나가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들 곁의 일상은 더이상 소소한 행복으로 다가오지만은 않는다. 이제 일상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되는 것이다. 

 

 

 

이 연극의 중심테마가 되는 ‘카제타치누, 이자, 이끼메야모(바람이 분다, 자, 살아야겠다.. 아니.. 살지 않는다)’라는 말은 호리 타츠오라는 일본작가가 그의 소설 ‘바람이 분다’에서 폴 발레리의 시를 인용하면서 그 모습이 변형된 말이다.
그리고 그 변형이 많은 의문을 남기는 말이다. 원작인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에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이 호리 타츠오의 소설에서 ‘바람이 분다, 자, 살아야겠다.. 아니.. 살지 않는다’라고 변형된 것이다.
삶에 대한 의지가 돌연 애매모호해지고, 다짐에 가깝던 의지의 불꽃이 사그라든다. 명확한 그 무엇이 윤곽을 잃고 흐릿해 지는 순간이다. 여기서 의문이 시작된다. 왜 호리 타츠오는 그렇게 변형시켰을까? 이것에 대한 의견은 여러 가지다. 번역과정에서 온 오역이라는 의견과, 다른 사람의 오역을 인용했다는 의견, 의도적으로 변형시켰다는 의견 등이다.
이 여러 가지 가정중에서 그가 의도적으로 변형시켰다는 쪽에 초점을 맞춘 것이 이 작품이다. 그 이유는 폴 발레리의 원작에 나오는 구절 역시 절망 속에서 울컥 터져나오는 외침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명확한 의지, 완전한 의지가 아니라 오히려 절망속에서 희망을 간절히 바라는 울부짖음인 것이다. 그러한 삶에 대한 의지를 호리 타츠오는 오히려 절망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반어(反語)라는 거울을 통해 본래의 모습을 보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