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이 오르면 이 공연의 리딩 플레이어(사회자)가 관객들을 신비한 마법의 세계로 초대하고 주인공 피핀 왕자를 소개한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피핀은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해 완벽하고 특별한 삶을 살고자 하는 야망에 가득 차 있는 젊은이다. 그 첫 번째 시도로 피핀은 아버지 찰스 대제에게 간청해 비지고스 전투에 참여한다. 살마뉴(찰스) 대제의 군대는 승리를 거두지만 살육의 참상을 목격한 피핀은 전쟁의 영웅이 인생의 의미가 아님을 깨닫는다. 회의에 빠진 피핀은 시골에 사는 할머니 버싸를 찾아가고, 버싸는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인생의 즐거움을 마음껏 만끽하라고 조언한다. 이후 피핀은 여자들과의 환락적인 유희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그 역시 공허하게 느껴질 뿐이다. 고민하던 피핀은 아버지 살마뉴 대제가 백성들을 탄압하는 것을 보고 또 다른 인생의 의미를 발견한다. 바로 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세계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피핀의 계모 파스트라다는 자신의 친자 루이스를 왕위계승자로 만들기 위한 계략을 꾸민다. 파스트라다의 귀띔을 받은 피핀은 아를루의 성당에서 홀로 기도를 드리던 아버지 찰스를 살해한다. 왕위에 오른 피핀은 처음엔 세금과 전쟁과 공포가 없는 혁신적인 정치를 펼치지만 곧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결국 아버지와 같은 폭군이 된다. 왕의 자리에서도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피핀은 사회자에게 부탁해 아버지 찰스를 부활시키고 왕위에서 물러난다. 이후에도 방황을 계속하던 피핀은 아들이 딸린 미망인 캐서린과 사랑에 빠져 평범한 농장 생활의 행복을 맛본다. 하지만 위대한 삶에 대한 갈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결국 그녀에게서 떠난다. 이제 더 이상 도전할 것도 없는 현실 앞에서 절망하는 피핀. 배우들은 지금까지 어떤 것도 충족을 주지 못한 것과 완벽한 삶이란 없다고 피핀에게 다가가 얘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남은 것은 오직 한가지 피날레(최후, 죽음) 뿐이다. 리딩 플레이어는 극적인 생의 마감이야말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방법이라며 특별한 사람인 너야말로 최고의 클라이맥스를 누릴 자격이 있다며 피핀을 유혹한다. 피핀은 리딩 플레이어와 배우들의 부추김 속에 불꽃 속으로 뛰어들려 하나 순간 죽음을 거부하고, 캐서린과 아들이 나타나자 피핀은 이들의 손을 잡는다. 웅장한 피날레가 망쳐진 것에 분노한 다른 배우들은 피핀을 겁쟁이, 타협꾼이라며 비난하고는 퇴장한다. 무대는 치워지고 조명은 꺼지고, 피핀과 캐서린이 입고 있던 무대 의상과 가발도 벗겨진다. 리딩 플레이어는 이제, 관객을 향해 말을 건넨다. 완벽하고 장엄한 피날레를 위해 평범한 삶을 포기할 관객이 있다면 언제든지 찾아가겠다고. 그리고 피핀은 텅 빈 무대에서 캐서린과 함께 인생의 완전한 그 무엇에 대해 노래한다.
피핀은 장차 왕좌를 물려받아 한 나라를 통치하여야 한다는 중압감속에서 폭력의 정치와 육체적 쾌락이라는 말초적인 가치와 대비되는 인간적이고도 소박한 사랑을 찾고 있다.
이렇듯 왕권 사회의 굴레 속에서 전쟁과 정치를 심으하여 순수한 자아를 찾는 피핀의 위험한 도전은 1960년대 미국 젊은이들이 반전 의식으로 무장한 채 자유를 부르짖었던 모습과 정서적으로 연결된다. 이는 물질적 풍요로움과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를 최우선의 가치로 확립시켜 온 미국을 비롯한 서구 문명국가의 정신적인 현대이며 이 작품이 발표되었던 1972년 이래 30여 년 동안 이러한 가치는 변하지 않고 있다. 세대를 초월하여 가족을 감동시킬 수 있는 이러한 로저 허슨의 교훈적인 주제 의식은 짙은 허무주의와 퇴폐적인 어둠으로 상징되는 밥 포시의 연출과 일견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건전 계몽 드라마나 심각한 뮤지컬 플레이가 아닌 놀랍게도 고전적인 뮤지컬 양식인 보드빌과 벌레스크 스타일을 가미한 도시 스타일의 풍자적인 뮤지컬 코미디로 만들었으며, 그의 탁월한 연출력은 이 작품에서 순수와 원초적인 섹시라는 이질적인 두 코드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 피핀이 여타의 뮤지컬 작품 가운데에서도 돋보이는 이유는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 강렬한 개성이 돋보이는 가운데서도 서구 뮤지컬의 전통을 한편으로는 충실하게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충실하다기보다는 의도적으로 보드빌 형식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보드빌의 영향이 감지되는 이유는 이 작품이 주제가 있는 장면 하나하나를 각각의 독자적인 쇼처럼 그려내고 있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피핀이 능동적으로 드라마를 이끌어나가기보다는 외적으로 다양한 기회가 각각 다른 장면으로 주어지며 피핀은 이에 수동적으로 반응한다는 설정이나 죽은 왕이 살아나고 인과 관계에서 자유로운 상징으로서 마술 묘기가 끊임없이 등장한다는 점 등이 이 작품의 기본 정서는 결코 리얼리즘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게다가 리딩 플레이어의 원맨쇼 양념처럼 등장하는 듀엣 혹은 트리오 댄스 장면은 벌레스크 스타일을 느슨하게 따르고 있다. 이렇듯 정교하게 계산된 각종 아이디어와 장치들은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허구임을 되새겨준다. 물론 이 일을 가장 잘하는 것은 사회자 역할을 하는 리딩 플레이어다. 그의 존재는 역사적으로 멀리 갈 것도 없이 카바레나 '시카고'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전형적인 보드빌 쇼의 사회자다. 이 작품이 뛰어난 것은 그것이 마치 정말로 철저한 애드리브처럼 보인다는 것도 한몫을 한다. 이를테면 피핀이 사랑한 과부 캐더린이 피핀을 옹호하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인데, 이 장면의 노래는 당시 프로그램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프로그램에 실린 노래의 곡목을 확인하여 보는 관객이라면 이 부분에서 상당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리딩 플레이어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걸어 나와 캐서린을 바라보는데 사실 이 자체가 고도로 계산된 부분일 뿐이다. 결국 코메디아 델 아르떼가 이 작품에 끼친 영향은 주어진 결말에 따라 끝내는 사명을 완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나마 해피엔딩조차 피핀 역을 맡은 배우의 거부로 지켜내지 못한다. 코메디아 델아르떼가 철저하게 관객의 즐거움에 봉사하여 그들의 잔재주를 다 부렸듯이 이 작품에서 배우들은 서로서로의 배역을 조롱하고 우스개로 삼으며 (살마뉴 대제를 밤일의 대가라고 마지못해 말하여 알 수 없다는 몸짓을 취하는 장면 등) 자신의 배역이 할 일이 없을 때는 서슴없이 하품하며 뒹구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주요 등장인물을 제외하면 모든 코러스는 얼굴에 광대 같은 분장을 하고 등장한다. 이는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그들이 철저하게 배우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인식시키는 동시에 코메디아 델아르떼 시절의 가면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피핀은 처음 등장부터 어딘가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진하게 그려진다. 전쟁이란 그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피상적인 것이었다. 날선 칼을 들고 전쟁에서 공을 세우기를 갈망하지만 막상 전쟁터에서 마주친 살육전은 그로 하여금 진한 회의를 남겨준다. 대체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이 일개 병사의 인생에 있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죽어가는 적국의 머리와의 대화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면 그런 실육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지만 천만의 말씀 전쟁이 없이 유지되는 왕국은 없다. 반전사상은 이 작품의 핵심 키워드다. 남성 중심의 세계관과 반전 의식을 코믹하게 드러낸다. 아이를 낳는 어머니들의 안타까움을 보여준다. 기껏 남아서 길러 봤더니 남이 길러놓은 아들들을 죽인다던가 남의 아들의 손에 죽어버린다면 그건 얼마나 황당한가? 따라서 이 작품은 상식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매우 정적이다. 무대에서 시체 조각들이 난무하고 침략과 강간을 장려하는 전쟁, 정치적인 발언이 선거 운동 아니면 혁명으로 이분화되는 모습, 백성들의 고혈을 짜지 않으면 현상 유지가 되지 않는 왕국, 대중을 세뇌하고 억지 동의를 이끌어내는 방송국 녹화 장면 등은 이 작품이 여타 작품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짙은 정치색을 보여주고 있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허무하고 냉소적이다. 자기 자신의 의지나 희망과는 상관없이 군주의 요구로 전쟁터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피핀의 혼란은 그가 왕자이며 언젠가는 왕이 되어 누군가를 전쟁터로 내몰아야만 한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가중된다. 결국 그는 리딩 플레이어의 요구대로 훌륭한 왕이 되지 못하고 평범한 한 과부 캐서린의 남편으로 살기를 원한다. 그의 입고 있는 의상을 다 벗기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이는 나약한 자아를 보여준다. 우리는 역사 속의 피핀 왕자가 그의 할아버지 피핀 3세나 아버지 찰스 대제처럼 용맹을 떨칠 기회도 없이 역사 속에서 사라져갔음을 알고 있다. 어쩌면 그는 죽은 게 아니라 죽은 셈 쳐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어깨에 지워진 지긋지긋한 의무로부터 벗어나 그야말로 평범한 인생의 진실을 향해 떠났을지도 모른다.
<피핀>은 9세기 서로마제국의 프랑크 왕국을 배경으로 찰스 대제의 아들 ‘피핀’의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세상의 많은 것을 소유한, 부러울 것 없는 프랑크 왕국의 왕자인 피핀은 영혼이 자유롭고, 인생에 있어 좀 더 특별하고 완전한 것을 찾길 원한다. 피핀은 왕인 아버지를 통해 정치와 전쟁을 비롯해 왕권, 혁명, 살인, 육체의 유희, 일상의 삶, 사랑 등 인간과 인생 안에 있는 자연스러운 모든 것들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경험한다. 절대적인 지도자인 아버지 ‘살마뉴 대제’와 주어진 세상에서 삶을 즐기며 만끽하는 할머니 ‘버싸’, 친아들의 왕위 계승의 야심을 품고 있는 탐욕스러운 계모 ‘파스트라다’, 평범한 삶 속에서 사랑을 찾기 원하는 젊은 미망인 ‘캐서린’과 그녀의 아들 ‘테오’ 등 여러 인물로부터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되묻게 된다.
극은 피핀이 겪는 여정을 순차적인 흐름으로 보여주지만, 극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인물인 ‘리딩 플레이어’(사회자)를 통해 매 장면이 드라마 안에서도 독립적인 주제를 가진 일종의 ‘단막극’의 요소를 띠게 된다.
극의 전개에 관객이 몰입하지 않도록 ‘리딩 플레이어’는 나레이터로서 관객들에게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노래하는가 하면 전체 앙상블을 리드하고, 작가처럼 극 속에서 등장 인물들의 심리를 배후 조종하며, 연출가처럼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지시를 내리기도 하면서 관객들의 극 몰입을 차단하는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주는 역할을 한다.
또, 관객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장면 등 기존 뮤지컬과는 현격히 다른 극과 관객이 소통하는 독특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매우 모던하고도 코미디적인 요소를 가미해 쉽게 전달되는데, 매장면마다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는 대사와 희화적으로 그려진 인물들로 하여금 웃음과 유머, 진지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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