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준 '나, 옥분뎐傳!'
옥분은 이 땅에서 살아온 씩씩한 할머니이다.
짙은 전라도 사투리에 욕설이 튀어나오는 정 많은 할머니이다.
38년 전 프랑스에 입양 보냈던 딸이 손녀와 함께 옥분에게 찾아온다.
서로의 낯선 모습에 놀라고 거친 전라도 사투리와 알아들을 수 없는
프랑스어가 벽에 부딪힌다.
혜영은 옛 기억을 더듬는다.
“기찻길, 돌멩이 사이, 노란 꽃, 비올렛... 기억나요.”
옥분은 손녀인 소피에게서 어린 혜영을 본다.
오히려 손녀 소피가 더 다가온다.
그러다가 손녀와 시장에 구경갔다가 잊어버린 일이 발생하고...
딸 혜영의 앙칼진 모습도 본다.
혜영은 엄마에게 소리친다. “Qui est pauvre!” (누가 불쌍한데!)
며칠이 흘렀지만, 이들은 마음에 품은 말을 서로 하지 못한 채 헤어진다.
혜영은 ‘엄마’라고 한번 부르지 못한 채 파리로 돌아간다.
딸은 왜 갑자기 잊었던 엄마를 찾았을까?
그리고 서툰 한글로 남긴 편지를 통해 서로 대화한다.
보이지 않는 그리움, 증오, 죄책감, 사랑의 감정들이 빈 공간에 흐른다.
혼자 남은 옥분은 하늘을 보고 중얼거린다.
“별일 없지? 그 짝도 눈 와? 안 와?... 왜 안 와?...”
눈 속에 찾아 온 혜영과 소피, 이들이 떠나고 눈이 온다.
세 사람이 함께했던 며칠이 꿈처럼 흐른다.
'나옥분' 이라는 할머니의 이야기다.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해 보인다. 남편 자식 없이 혼자 사는 할머니이지만 원래 성격이 호탕한 그런 평범한 할머니. 그런데 안을 들여다보면 남다른 측면이 있다.
평범하다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평범하지 않은 면면들. 옥분에게는 함께 사는 자식이 없다. 큰딸 혜영은 6살에 프랑스로 병을 치료할 돈이 없어 입양보냈고, 아들은 누나를 기다리며 철길을 내달리다가 죽었다. 남편은 딸을 입양 보낸 후 화병이 났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맺어진 인연들이 모두 옥분의 곁을 평범하지 않게 떠나갔다. 38년을 떨어져 살던 딸이 한국에 돌아왔지만 격한 포옹 같은 건 하지 않는다. 헤어졌던 가족의 상봉이 던져주는 익숙한 장면들 대신에 시간의 간극을 인정하는 서먹하면서도 서로를 탐색하는 관계를 만들었다. 얼굴을 보고 끝내 엄마라고 부르지 못한 혜영이도 그런 딸을 한번도 안아주지 못한 옥분도 어색하고 낯설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뜨거웠던 것은 언어다. 프랑스에서 자랐지만 한국 말을 잊으면 안된다는 양어머니 덕분에 혜영은 더듬거리더라도 한국 말을 할 수 있었다. 소피는 이름처럼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프랑스어로 혜영과 소피가 대화를 나눌 때 질펀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옥분은 그저 듣고만 있다.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어서 둘의 표정으로 어림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딸 혜영이 왜 한국으로 엄마를 만나러 왔는지, 그리고 혜영의 고민은 무엇인지가 편지를 통한 대화로 어렴풋이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