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고연옥 '칼집 속에 아버지'

clint 2025. 5. 28. 06:04

 

 

용맹함과 날카로운 칼솜씨, 모든 무사들의 영웅으로 무사 찬솔아비가

어느 날 갑자기 살해되어 변소간에 거꾸로 처박힌 채 발견되었다. 

그의 초라한 마지막을 본 찬솔아비의 아들, 갈매는 어머니의 간청과

무사들의 규율에 따라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러 떠난다. 범인은 오리무중.

한번도 칼을 빼든 적 없는 갈매는 아버지의 원수들의 이름이 적힌 긴 종이를 가지고

무사흑룡강과 백호의 안내를 따라간다. 갈매 앞에 고행의 길이 펼쳐진다.

7년 동안의 고된 여정 끝에 당도한 마지막 마을은

잔혹한 왕과 검은등이 지배하는 세상.

마을사람들은 매번 처녀를 재물로 바치도록 강요받는데,

이때 마을에 등장한 갈매는 악독한 검은등을 무찌르고

마을 처녀 초희를 구해내려 하는데....

 

 

 

사건, 사고 전문 작가로 유명한 고영옥이 집필한 연극 <칼집 속의 아버지>는 게세르 영웅의 대서사시인 게세르 신화를 모티브로 했다. 우리에게 생소한 아시아 신화의 원류를 토대로 구성된 갈매의 이야기는 현대사회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차원과 시공간을 넘어서 여행을 떠나는 주인공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

 아시아의 <일리아드>로 불리는 게세르 신화는 북방민족 최대의 영웅서사시로 일컬어지고 있다. 바이칼 호수를 원류로 하는 게세르 신화는 게세르란 영웅의 대서사시로, 패배한 악의 신, 아타이울란의 찢겨진 몸이 지상세계로 떨어져 온갖 질병과 재앙이 창궐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고통 받는 인간들을 위해 인간의 몸으로 환신한 천신의 아들 게세르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인간세계를 구원하기 위하여 숱한 모험을 맞이하게 된다. 샤머니즘과 홍익인간의 정신이 바탕을 이루는 게세르 신화는 우리나라의 단군신화와 기원이 맞닿아있다. 육당 최남선 선생이 한국의 고대사를 정립하기 위해 게세르 신화와의 비교연구에 주목한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신화적 세계를 집대성한 게세르 신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보다 모험과 판타지의 요소가 강하여 현재까지 수많은 게임의 소재가 되고 있다.

 

 

 

 

 

<칼집 속에 아버지>는 이러한 게세르 신화의 모험과 영웅, 신과 악마, 악의 시작 등의 이야기를 주요 모티브로 하여, 꿈인 듯 현실인 듯, 갈매의 7년간의 여정을 유려하게 풀어내고 있다. 하지만 갈매의 모험은 결코 허구의 세계로 끝나지 않는다. 신화가 담고 있는 원형적 인물들 속에서 우리네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무게 때문에 자신이 원치 않는 길을 가는 사람들, 악마적 생각들을 항상 숨기고 살아야 하는 이중인격자들, 겉으로는 선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이기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 무한히 약하고 무한히 악한 사람들, 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위 사람들에게 영웅이 되어가고 있는 사람들…, 이들은 먼 세계의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인 것이다.

연극이라는 장르가 가지고 있는 동시대성을 생각했을 때, 창작공연은 우리 시대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고민과 질문들이 공연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칼집 속에 아버지>에도 우리시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칼집 속에 아버지>의 작가 고연옥은 희곡쓰기의 즐거움을 “현실에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어떡하든 해결해 보려고 애쓰는 것” 이라고 말한다.

이 <칼집 속에 아버지>에서 작가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변증법적 역사관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미래에 대해 막연한 희망을 가지기엔 너무나 산재한 사회 문제들이 개선되지 않고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막혀있는 것인지, 어디에 칼을 들이대야 할지 알 수 없다. 단지 작가는 <칼집 속에 아버지>를 통해, 진정한 영웅은 외부의 괴물을 물리치는 것도, 오이디푸스처럼 아버지를 부인하고 죽이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외부의 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자신의 길을 정정당당히 걸어갈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이 시대의 영웅인 것이다.

 

 

 

 

갈매는 7년째 아버지 찬솔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다. 그의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떠나온 길... 이제는 그저 걷는 것을 멈추고 죽음을 통해서라도 쉬고 싶다. 배 한구석에 지친 채 웅크리고 잠들었다 깨어나는 그에 앞에는 흑룡강이 노를 젓고 있다. 그와 나누는 이야기는 선문답 같다. 배는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곳이 정말 강일까... 배 밖으로 나선 갈매는 땅 위에 서있고 손으로 배를 걷어낸다. 강인지 땅인지 알 수 없고 가고 있는 것이지 멈춰서 있는지 조차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이 장면에서 보여주는 모호함은 극 전체를 지배한다. 흐르고 흘러 갈매가 도착한 곳,

검은등이 지배하는 한 마을에서 갈매는 '지상의 마지막 무사'로 검은등을 물리치고 마을과, 검은등과 결혼할 여인인 초희를 구원해줄 사람으로 떠밀린다. 초희는 갈매에게 구원 받기를 원하면서 한편으로는 검은등의 사랑에도 관심이 있다. 검은등에게 지배당하는 마을 사람들은 아무 힘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인 듯하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검은등을 이용하고 마을처녀를 결혼이라는 명목으로 팔아넘기는 악한 자들이기도 하다. 찬솔아비는 영웅적인 무사인가 하면 아들인 갈매와 아내인 아랑부인에게는 하찮은 사람이다. 찬솔아비를 소중히 생각지 않던 아랑부인은 그의 복수를 해야 한다며 아들의 등을 떠밀고 정숙한 듯하다가 색에 빠진 듯 보이기도 한다. 갈매는 검은등을 무찌르고 마을을 구한 듯도 하고 그 후에 마을 사람들로 인해 오히려 곤경에 빠진 듯도 하고 아예 검은등의 주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도 하다. 이것이다 싶다가 아니 저것인가 싶기도 하고 옳은가 하면 그른 것 같기도 하고 현실인가 싶으면 꿈같고 꿈이다 싶으면 다시 현실인 것만 같다. 어린 시절 세상에는 정답이 있어 보였지만 세월과 함께 정답에 대한 믿음은 줄어만 간다. 이조차 비겁한 어른이 되어간다는 비난과 여유와 넉넉함이라는 긍정적인 해석 중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어진다. 칼집 속에 아버지는 영웅이 아닌 영웅 갈매와 구원 받았지만 구원 받지 못한 세상과 사람들을 통해 모호한 세상과 부조리한 삶을 보여준다.

 

 

 

게세르 신화
게세르Geser는 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아우르는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는 영웅서사시의 제목이면서 동시에 서사시 등장인물의 이름이다. 게세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바이칼 호수 인근에서 채록된 판본들만 백여 개에 달하며 티베트와 몽골 고원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까지 합하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게세르 모티프를 가진 이야기들은 발견되는 지역의 특성에 따라 서로 상이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티베트 지역의 <링 게세르Geser of Ling> 이야기는 세속 영웅서사시의 성격을 가졌고, 몽골의 <1716년 베이징 판보 게세르>는 무속 영웅서사시와 역사적인 사건이 복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바이칼 호수 주변에 사는 몽골계 부리야트인은 순수한 샤머니즘 신화의 얼개를 가진 <게세르 신화> 혹은 <아바이 게세르 신화>를 구비 전승해오고 있다. 
흥미진진한 내용 전개와 색다른 판타지, 그리고 반전을 거듭하는 게세르 신화의 이야기 얼개는 문학으로서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서구의 신화나 중국 신화와 다른 면모를 보이는 독특한 판타지는 우리의 빈곤한 상상력을 풍요롭게 해주며 게세르 신화의 매력을 잘 드러낸다. 하지만 우리가 게세르 신화에 주목하는 까닭은 이야기 읽기의 즐거움이나 새로운 판타지 문법을 접하는 흥미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게세르가 한반도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바로 우리들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게세르 신화는 일연선사가 기록한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단군 신화와 닮은꼴이고, 한반도에서 면면히 생명력을 이어온 샤머니즘 전통과도 맥이 닿아 있다. 게세르 신화를 한반도와 연결하는 이론적인 시도는 육당 최남선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육당을 '불함문화론 "조선 고대사의 수수께끼를 해결할 단서로 단군 신화를 언급했고, 단군 신화의 해명을 위해 동아시아 고대 신화와 서사시를 비교연구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 거의 팔십여 년 전에 말이다. 육당은 게세르 신화를 단군 신화와 쌍둥이 형제로 인식한 것으로 보이며, 게세르 신화의 하늘세계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게세르 신화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하늘세계를 동서남북으로 나눠 각 지역에 거주하는 신들이 있다. 남쪽과 북쪽의 신들은 지상의 일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어 지상세계의 관심에 멀어져 있지만, 서쪽과 북쪽의 신들은 지상의 운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선신으로 여겨진 서쪽 신들과 악신으로 여겨진 동쪽 신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패배한 동쪽 하늘신들은 사지가 분할되어 지상으로 던져져 지상을 괴롭히는 마법사들로 환생하여 평화롭던 인간 세상에 기근과 질병의 고통을 주게 된다. 하늘신의 아들 벨리그터(게세르의 어릴 적 이름)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상에서 보내지고, 인간의 아들로 다시 태어난 그는 지상을 도탄에 빠뜨린 사악한 마법사들을 응징하고 지상과 우주의 조화와 평화를 복원하는 원정에 나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