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머레이 쉬스갈 '타이피스트'

clint 2025. 5. 16. 06:20

 

 

도시의 작은 우편 주문 회사에 취직한 새로운 타이피스트 폴. 
출근 첫 날 옆자리에 앉은 선배 실비아에게 폴은 
타이피스트로 사는 삶이 임시직이라고 큰소리 친다. 
야간 법대를 졸업하면 잘나가는 변호사인 삼촌의 뒤를 따라서 
성공한 인생으로 살 것이라며. 
홀어머니를 돌보면서 시계추 같은 일상에 적응한 
실비아에게는 특별한 꿈도 희망도 없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한 계절이 지나고,
1년 또 그리고 몇 년이 지나지만
폴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반복적인 생활속에
그들의 세월의 무게도 늘어간다.
폴와 실비아는 서로를 감추고
누군가를 함께 비난하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다가
결국은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현대인들 중에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대부분 내가 그나마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고, 안정적이기 때문에 직업을 선택한다.

자신의 꿈이 있어도, 여러 상황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머레이 쉬스갈은 이런 현대인의 삶을 하루라는 시간 속에 고스란히 담아서 보여준다.

처음 타이피스트라는 직업을 얻게 된 폴과 입사선배인 실비아는 타자기 앞에서

쉴 새 없이 사람들의 이름을 두드린다. 그들의 등퇴장이 이루어질 때 시간의 흐름은

빨라진다. 10년이란 세월이 무색하게 그들의 대화도 처음과 많이 달라져있다.

더구나 그들의 관계도 묘한 분위기속에 달라져있다.

잠시만 이 일을 할 것처럼 외쳤던 폴은 직장을 옮기지 못한다.

겉과 속이 다른 현대인의 모습을 소소하게 잘 그려내고 있다.

겉으로는 아닌 척 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외로움을 느낀다.

유부남인 폴과 독신인 실비아는 서로 사랑하지만 용기가 없어서 뜻대로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타자기의 글자들처럼 인생의 의미를 잃고 헤맨다.

 

국내 초연시 김금지와 추송웅(극단 자유, 1969년 카페 떼아트르 추에서)

 

 

현대를 살아갈 때, 오히려 더 여유롭고,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더 많은 자유를 누릴수록 이에 해당하는 여러 책임을 우리 스스로 져야 할 때가 있다. 외로워도 외롭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 떠나고 싶어도 좁은 공간 안에서 타자를 쳐야 하는 사람들, 내가 쓰고 싶은 글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보낼 글만 하루 종일 치며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묻는다. 처음 내가 이렇게 살고자 한 게 아니었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힘들게 살지. 하지만, 그들은 용기를 낼 수 없다. 내가 가진 환경을 뒤바꾸고 살 자신은 없는 것이다.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뒤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그 모습이 바로 현대인인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이중성 앞에 비판보다는 연민이 느껴진다. 단 하루도 자신이 살고자 하는 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은 큰 불행이기 때문이다. 그건, 단 하루도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과 같다. 생활이 편리해졌지만, 오히려 속박이 더 많아 불편하다. 더 넓은 공간에 살지만, 오히려 더 좁은 틀 속에 갇혀 사는 게 현대인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두 명의 타이피스트가 출근해서 퇴근하기까지의 시간을 극대화시켜, 40년간에 걸쳐서 흐르는 시간으로 확장시켜놓은 작품이다. 자연히 인물들은 한번씩 등퇴장함에 따라 나이를 한움큼씩 먹고 등장을 하고, 그 흐른 세월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서로를 잘 알고, 그 테두리에서의 삶을 공유한다. 자연스럽게 변화되는 폴과 실비아의 모습은 현대인을 많이 닮아있다. 겉으로는 아닌 척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모습이 이중적인 모습의 현대인과 맞닿아 있었다.

 

 

 

 

아주 재미있는 것은, 두 주인공의 신체는 40년간에 걸쳐 늙어가고 있는데

물리적인 주위의 물체와 환경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이 두 남녀의 타이피스트가 하는 일은 전화번호부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주소를

엽서에 끝없이 옮기는 작업을 하는 것인데,

마치 기계와 같이 하루종일 그 일을 한다.

자기의 회사가 무엇을 파는지를 아는 시점은 극의 마지막 부분 퇴근시간,

그들이 60살이 되었을 때이다. 그것도 우연히 땅에 떨어져 뒤집혀진 엽서를 통해

스웨터를 판다는 문구를 처음 발견한다.

그토록 많은 시간 자신들이 타이핑하던 그 엽서 바로 뒷면이었다.

그리고 그리 놀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