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무 '구름가고 푸른하늘'
소년 한영일은 엉뚱한 의문을 안고, 언제 어디서나 엉뚱한 질문을 곧잘 던졌다.
예를 들면 "개미 허리는 왜 잘룩잘룩하냐?", "토끼는 풀을 먹고 사는데 고양이는
왜 생선을 즐기느냐?"하는 따위의 질문을 끊임없이 주위에 퍼부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러한 그의 질문에 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질문들 때문에 그는 점차 바보가 되다 못해 "엉뚱한 아이"로 소외되었다.
어느 날 그는 자기 아버지가 옥이 아버지로부터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주위에 알렸으나 그 엄연한 사실에도 귀 기울여 주는 이가 없었다.
그의 말은 이미 설득력을 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도리켜
살인자 강만득으로부터 심한 협박까지 당하게되고 그의 어머니로부터도 무조건
사실은 외면한다는 식의 "몰라요"란 말을 즐겨 사용하라는 "강요"까지 이르렀다.
한편 어릴적부터 유일하게 한영일의 편이 되어 주던 옥이는 점차 그를 사랑한다.
그 "사랑"이야말로 영일을 일상의 사회인으로 자각 시키려는 동정과 연민에서 비롯된
일종의 희생같은 것이었다. 왜냐면 옥이만은 자기 아버지의 추한 몰골을 증오하였고,
영일도 결국은 자기 아버지로 인해서 바보(?)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기에.
그러나 옥이의 헌신적인 노력도 끝내 영일을 구제할 수는 없었다.
이미 영일은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의 늪에 깊이 빠질대로 빠졌을 뿐만 아니라,
그간 단 하나의 의문에 대한 확답도 얻지 못한 상태였기에 그 어떤 가치관도
주체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영일은 소년적에 인연이 닿았던 행봉선사를 찾아
먼 길을 떠난다.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하는 의문을 풀고자.
말더듬이 소년이 겪는 삶의 허구성 - 김방옥 (연극평론가)
(...) '구름 가고 푸른 하늘'은 16년 전에 데뷔하여 계속 침묵을 지키던 작가의 작품이다. 이 공연을 보면서 나는 이 연극이 한 40년 전에 발표되어 '동양극장'에 올려졌다면, 연극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는 상상을 해 보았다. 물론 40년 전의 '동양극장'에서 관람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당시의 연극이 적어도 관객을 의식하고 관객의 소박하나마 솔직하고 열띤 반응을 얻었다는 사실은 안다. 이 작품이 비록 시대를 초월한 종교적 주제를 다루었다고 해도, 소재의 선정이나 등장인물 등의 성격묘사나 조연급 배우들의 연기 방식 등에서 낡고 퇴색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관객을 요즘 일부 연극처럼 센세이셔널한 비정상적 방법이 아닌 정상적인 연극적 통로로 극 속에 빠져들게 하는 진솔함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구름 가고 푸른 하늘'은 불교의 선(禪)인 공(空) 사상을 그린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무릇 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니 만약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바로 여래를 본다. 즉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일체의 회의와 초탈, 일상적 자기의 파괴를 통해 세계라 는 허상에 묻힌 참된 자아를 찾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굳이 작가가 내세우는 주제를 통해 본다면 그 나름의 분석도 가능하다.
주인공 영일(이인철 분)은 말더듬이며 남들이 범상히 여기는 모든 사물의 이치에 대해 끝없는 질문을 늘어놓음으로서 주위 사람들을 괴롭힌다. 예컨대 '왜 개, 개미 허리는 짜, 짤룩이야?', '왜 지금 바람이 불어요?' 하는 식이다. 그 결과 동네에서 따돌림을 받고 바보나 저능아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갑자년 갑자 시에 태어난 아이는 큰 사람이 된다는 전설을 믿는 영일의 할머니는 근처 절의 혜봉스님에게 영일을 맡겨 교육시키려고 마음먹고 스님을 명일과 대면시킨다. 영일은 아무도 대답 못하던 모든 질문을 선문답하듯 척척 답해주는 스님을 곧 따르게 되지만, 그들은 절로 가는 도중 뜻하지 않게 살인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금광에서 금을 캔 명일 아버지가 영일 엄마에 얽힌 과거의 치정사건과 불욕에 휩쓸려 충동적 싸움 끝에 동네 옥이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혜봉스님은 옥이 아버지로부터 사건을 못 본 것으로 하겠다는 확약을 받고, 위기를 모면하며 영일은 바보라는 이유 때문에 목숨이 부지된다. 영일처럼 제반사에 민감한 인물에게 아버지의 피살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충격은 모든 모른 체 하라는 어머니와 옥이아버지의 압력 때문에 그의 내면으로 응어리지고, 혜봉스님은 이 사건 이후 선수행에 들어가 입을 다물게 된다. 대답이 불가능한 질문으로 사람들의 따돌림을 받았던 영일은 그 사건 이후 오히려 '몰라요'를 고집하며 입을 다문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시달림을 당한다. 영일을 동정하며 사랑하는 옥이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입을 열라고 요구하지만, 영일의 증언은 그의 말과 태도가 불확실하다는 이유와 물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효가 된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한 증언이라는, 세상을 향한 그의 최초이자 유일한 언표와 행동은 그가 명백히 보고 들은 바를 오히려 믿어주지 않는 세상에 의해 좌절되는 것이다. 그 후 세상이 요구하는 세속적 확실함인 '증거'에 대한 그의 반발은 옥이 아버지와 도망쳤다가 10년 만에 돌아온 어머니를 '증거가 없다'고 외면하는 행위로 극대화된다. 바깥 세상과의 만남에서 패배한 후 모든 것에 대한 더 큰 회의에 빠진 영일이 선수행에 몰두하여 산 돌부처가 된 혜봉스님을 찾아가는 것으로 극은 끝난다.
즉 영일의 행동은 사물에 대한 본능적 회의 - 살인사건 이후에 지각한 바에 대한 강요 받은 침묵, 그가 지각한 바의 언표가 세상에 의해 거부된다는 좌절의 경험- 사물에 대 한 본질적 의의, 깨달음에 입문으로 요약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일의 이런 내면적 성숙 과정은 극 진행 사이사이에 삽입되는 영일의 독백에 의해서 도 다시 잘 요약되고 있다. 실제 극의 전개는 독백 하는 영일의 과거 회상 형식으로 진행 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의도하는 주제는 일반 관객에게 그다지 선명히 전달되지 못 하는 것 같다.
관객들은 회상 형식으로 펼쳐지는 사건들에 강렬히 흡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1920년대의 이효석이나 김유정의 단편소설이라도 연상케 하는 토속적이며 농도 짙은 정감적 분위기, 말더듬이인 영일 소년에 대한 감정적 공감, 간통, 살인, 실성 등 멜로드라마틱한 자극적 사건들의 스피디한 전개, 일부 배우들의 약간 과장된 연기 등이 주제와 관련하여 바람직하건 바람직하지 않던, 그 자체로 관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결국 이 작품 역시 주제를 너무 내세운 점, 제재를 선택하고 처리하는 작가의식이나 감각이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우리 희곡의 병폐의 일부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관객을 연극적으로 흡입할 수 있는 극작과 공연의 성실함, 즉 연극적으로 농축되고 계산된 대사, 연극의 긴장감을 야기하고 지속 시키는 힘, 독특한 정서의 창출, 무난하나 희곡에 적절한 연출이라는 면에서 안이해진 창작극계에 한 자극이 될 수 있겠다.
작가의 글
흔히 선수행(禪修行)의 제일과는 자기파괴 작업이라고 했다. 여기서 "자기파괴"라는 말은 일상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원래의 청정한 자아를 되찾기 위해서는 일상의 가치관을 훌훌 털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도 일상의 가치관(고정관념)의 노예가 되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때묻은 모습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말하자면 우리의 일상 모습은 본래의 내 모습과 얼마나 동 떨어져 있으며, 우리의 일상적 삶의 모습은 그 얼마나 헛된 것일까? 이와 같은 의문을 안고 나는 이 작품의 구상에 임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그 어떤 결론이나 해답을 유도하기 위한 구성일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 얼마나 가혹한 일상의 속박에 얽매여 본래의 나를 잃고서 허망한 나날을 살고 있느냐?"하는 하나의 물음과 제시로 족한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이 보여주는 "무대"가 하나의 큰 충격으로 확대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작가의 욕심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