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하 '망향'


중유의 세계인 '다음 역'은 망자에게 있어 생전에 가장 강렬한 영향을 미친 곳과
중첩된다. 주인공 춘자에게는 망향의 터인 굴다리로, 그녀 가족들은 이미 오래 전
그곳에서 발생한 화재로 사망한 상태다. 해방둥이로 오로지 먹고 사는 것만이
전부였던 시절, 굴다리 거지 가족들이 창피해 홀로 달아났던 춘자는
감히 식모살이를 하던 주인집 아저씨를 좋아했던 죄로 창녀가 된 여자다.
파란만장한 세월을 지나 이제는 갈보 춘자가 아닌 미친년 춘자로 불리는 게
더 익숙한 나이. 하지만 그녀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친구 민주가 있어 행복하다.
아니 행복했었다. 역 주변을 배회하며 민주를 애타게 기다리는 춘자의 기억이
죽음 직전으로 돌아가는 동안 차마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한 많은 독백이 이어진다.
"육십 평생 외롭다는 생각은 별로 안해 봤는디.., 민주가 가고 나믄
참말로 외롭고 또 외로워진당께.. 이랄 때만 내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어...
'내 꿈 꿔....' 항상 갸가 하는 마지막 인산디 여적지 대답을 못해줬어....
그래서 우리 민주는 지를 만나는 이 순간이 나한티는 꿈같은 시간이고
또 이 꿈에서 깨어나기 싫어서 잠을 잘 수가 없다는 것을 알리 없제.."
춘자가 죽기 전날 평소처럼 동네 공원에서 만나 재미나게 놀았던 민주는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다음날을 기약하며 귀가하지만 이튿날 날이 너무 추워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바람에 다시는 춘자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
평생 죄책감이 되어 따라다닐지도 모를 슬픈 이별....
"엄니...! 아부지...! 나, 인자 그리 가도 되겠소? 우리 민주처럼 엄니 아부지가
부르는 소리 따라서 인자 가믄 되겠소..? 엄니~ 아부지~"
비로소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절규하는 춘자는
과연 '다음 역'으로 떠날 수 있을까? 가난하지만 온가족이 의지하고 살았던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기에 망향을 향한 길고 긴 꿈, 그 슬프고도
기막힌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기적소리를 울리며
기차가 다가오고 있다. 오로지 그녀만을 위한 기차가.......

작가의 글- 정서하
떠나는 자와 다시 돌아오는 자의 출입구.
극 중 '다음 역'은 실제 역인 동시에 중유(中有)의 세계로, 기구한 삶을 살아온
독거 노인 춘자를 비롯한 노숙자(망자)들에게는 반드시 거쳐가야 할 관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자신의 죽음을 각 성하는 과정을 통한 또 다른 '다음 역'으로의
출발이 본성으로의 회귀이자 일종의 승천이나 해원의 의미임을 그리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