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그 다음 역'
그녀는 잘 살고 있을까?
잊었을까?
죽은 건 아닐까?
신문을 주워서 파는 '기억'은 첫사랑과 비슷한 할머니를 보자
이런 것들이 궁금하다.
할머니는 저녁이면 기차역에 우산을 들고
나와 말없이 누군가를 기다린다.
사랑의 취향은 혈액형만큼 변할 수 없는 것일까?
'기억'은 첫사랑과 닮은 그녀를 보면 볼수록
가슴이 점점 두근거려온다.
'기억'이 지하철에서 신문을 줍는 사이
그녀는 역에서 사라지고
'기억'은 그녀를 찾아 나선다.
지금은 80대의 노인된 할머니 아득과 할아버지 기억.
젊어 한 때 사랑했던 연인을 서로 찾는데...
할머니는 벙어리로 말을 못하고, 할아버진 눈이 침침하다.
누가 봐도 두 노인은 서로를 찾고 있는데...
이들의 만남은 왜 그리 비켜나갈까...?
작가의 글 - 김혜순
하나의 질문에 서로 다른 대답을 할 때 발생하는 갈등은 연극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 작품에는 갈등이 없다. 이는 연극의 관습에 위배된다. 연극의 관습은 삶의 관습이기도 하며 연극의 관습을 거역하는 것은 곧 삶의 관습을 파괴하는 일이기도 하다. 갈등 없는 삶, 소통되지 못하고 유통되기에 급급한 단절된 관계가 연극이, 혹은 삶이 될 수 있을까? 사실, 현실에서 사람들은 항상, 서로를 죽이거나 사랑을 고백하거나 하지 않는다. 매일 아침 알람소리에 눈 뜨자마자 인생의 본질이나 진리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대부분 시간을 돈을 벌고 쓰는 일에 할애하고 습관 처럼 반복되는 일상적 대화를 하다 보면 달력은 다 뜯어지고 만다. 싸움은 가끔 있을 뿐이다. 싸움에서 오는 분노, 절망감 보다 관계의 단절로 인한 막막함은 현대 삶 속에 배제되어 있지 않다. 홀로 생을 살아가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외로운 현대인의 일상에서 '사랑하기'는 살고자하는 욕망과 자신의 결핍을 채우는 부단한 몸짓이다. 살기 위해서는 사랑해야하고 또 기억해야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 살풋한 기억도 잊어야 한다. 그 기억이 만든 감옥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
작가 김혜순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 희곡당선 <함()>(2008), 제14회 춘천인형극 대본 공모가작 당선(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