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크뢰츠 원작 번안 '경남 창녕군 길곡면'

clint 2025. 4. 19. 09:39

 

 

젊은 부부는 맞벌이다. 
남편은 배달사원이고 아내는 같은 직장의 판매원이다. 
둘 다 비정규직이다. 살림살이는 노상 빠듯하다. 
“우리도 하와이 한번 가볼까?” “까짓거 한번 가지 뭐!” 
그저 자조적인 농담일 뿐이다. 
월급은 매달 들어오는데 손에 남는 건 한 푼도 없다. 
이거저거 떼면 영화구경 한번 가거나 카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기도 빠듯하다. 그래도 부부는 가끔씩 낭만적인 호사를 즐긴다. 

한 달에 한 번쯤 집에서 쇠고기를 구워먹으면서, 

마트에서 산 값싼 와인을 거기에 곁들이면서...
이만하면 일류 레스토랑이 부럽지 않다고 자조한다.
하지만 어느 날 아내가 임신을 하면서 갈등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아내는 당연하게도, 뱃속의 생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기뻐한다. 

반면에 남편은 걱정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아내의 임신 사실이 직장에 알려지면 퇴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임신한 비정규직 판매원은 다 그렇게 회사를 그만뒀다. 
그렇다면 자신의 월급만으로 아이까지 키워야 하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게 도무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결국 부부는 분출하는 갈등을 간신히 억누른 채 식탁에 마주앉아 
한달 지출 내역을 꼽아본다. 모두 308만원이다. 

사치 한번 안 하고 그저 ‘생존’만 했는데도 308만원이다. 

부부는 더 절약할 수 없을까 궁리한다. 

남편의 담뱃값 7만원, 아내의 화장품값 5만원을 지운다. 
부부는 계속 지운다. 친정엄마에게 주는 한 달 10만원의 용돈도, 
얼마 전 할부로 산 경차도 팔아치우기로 한다. 

그렇게 한달 지출을 192만원으로 줄인다.

 매달 180만원을 받는 비정규직 남편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 200만원을 벌어오겠다고 다짐하지만, 
남는 돈 8만원으로는 도무지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걸 부부는 안다. 

결국 아내가 어깨를 떨면서 오열한다.

 



경남 창녕군 길곡면이란 지명과 이 작품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아무 관계가 없는데, 아내가 어느 잡지에서 "절망에서 살인"이란
제목의 기사를 봤는데, 남편이 임신한 부인과 애를 낳자, 말자로
싸우다가 결국 낳겠다고 우기는 아내를 살해한 내용이고 이 사건이
벌어진 곳이 원작에서와 같이 이 작품의 제목이다.
종철과 선미 부부는 여기에서나마 위안을 얻는다.
부부는 사랑하니까.

 



<경남 창녕군 길곡면>은 독일의 사회참여적 극작가인 프란츠 크사버 크뢰츠의 <오버외스트라이히>를 한국적으로 번안한 연극이다. 류주연이 번안했지만 원작의 상황과 대사를 대부분 그대로 살렸다. 그렇게 가난한 비정규직 부부의 일상, 어느 날 임신을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무대 위에 사실적으로 펼쳐놓는다. 연극의 미덕은 바로 그 소소한 리얼리티다. 막이 올라 거의 끝날 때까지, 한국사회의 소시민이라면 누구나 겪어봤음직한 일상의 애환이 과장 없이 드러낸다.  

 


<경남 창녕군 길곡면>은 독일 극작가 프란츠 크사버 크뢰츠(Kroetz, Franz Xaver, 1946~)의 1972년 작품이다. 원제 <오버외스터라이히> (oberösterreich)는 독일 변방의 지명으로 우리가 이곳이 어떤 마을인지 모르 듯 길곡면 또한 어떤 마을인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지구촌 곳곳에서 종철과 선미 부부가 겪는 갈등과 같은 문제를 갖고 많은 부부가 언쟁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비록 사회의 마이너이긴 하지만 이들 젊은 부부는 나름대로 안락한 보금자리를 꾸미고 살아간다. 그러나 축복받아야 할 임신이 종철에게는 재앙으로 인식되면서 이들의 관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종철은 자신의 학력, 사회 지위, 경제력 등을 들어 장차 태어날 아이가 자신들의 안락한 현재를 파괴할 것이 라고 단정한다. 자신의 열패감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선미는 현실적 어려움을 인식하면서도 아이의 출산에 작가는 이 갈등의 해결에 적극 개입하지 않는다. 그저 현실을 충실히 스케치해 보여줄 뿐이다. 그는 도시 빈민의 삶 속에서 사회구조의 모순을 돌출시키려 한 작가이다. 선미나 종철이라는 개체는 사회라는 구조 속에 자리매김 되고 길들여져 왔다. 그들의 사고와 언어, 행동은 사회구조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종철의 언어와 행동은 교육의 혜택을 온전히 받지 못한 마이너리티 집단의 사고를 대변한다. 그는 과도한 억압 상태의 지속으로 언어표현 능력이 부족하고 대화로 적절히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도 없다. 오로지 현재의 안락한 삶을 방해하는 것에 맞서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에 충실할 뿐이다. 선미가 종철과 다른 점은 모성애로 현실의 장애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 아인 우리와 다르게 되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 희망이 가득해."라는 선미의 마지막 대사는 현실의 냉엄함에 대한 도전이자 종철과 같은 현실론자들에게는 하나의 아이러니로 인식된다.

이 작품이 발표되던 1970년대만 해도 급증하는 인구를 감당 못해 산아제한정책을 펴던 우리나라는 최근 세계 최저출산율로 고민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개인의 삶의 질을 모든 것에 우선하던 1970년대 독일인들의 삶의 태도와, 최근 출산을 꺼리는 우리나라 젊은 부부들의 삶의 태도는 일맥상통한다. 이들은 출산으로 인해 경제적 압박과 개인적 자유를 침해당하고 싶어하지 않으며, 개인의 육체적·정신적 노동력을 극대화 해 상품화하는 거대 자본에 종속되어 연명해간다는 점에서도 닮은꼴이다. 연극 <경남 창녕군 길곡면>을 통해 거대 자본주의 사회구조 속에서 개인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분투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김영균- 문학박사, 경희대 강사) 

 

프란츠 크사버 크뢰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