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후쿠다 요시유키 '벽속의 요정'

clint 2025. 4. 15. 06:56

 

 

저기 안 보여요? 어라? 금세 어디 갔네. 그 많고 많던 귀신들중에 

저한테는 좀 특별한 귀신 하나가 있었답니다. 
아, 그래요, 요정, 눈을 떠보니, 뭐가 눈앞을 휙 스쳐가는데 
덜컥 무섬증이 났어요. 엄마! 엄마! 여기 뭐가 있어! 
그래, 너한테 왔던 건 어쩌면 요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날도 엄마는 늦도록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바로 그때, 그 소리가 들렸어요. 이상하게도 귀에 익은 노랫소리.
넌 누구니? 내 이름은... 맞아, 순덕이. 
요정 스테카치가 즐겁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요정 스테카치는 
벽 속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나한테 해주었답니다. 
옛날 옛적, 어느 깊고 깊은 산 속에... 얼마나 놀랐던지..
딸 애가 혀 짧은 소리로 그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가슴이 막 벌렁벌렁하고 똑 죽겠더라구요.
도대체 생각이 있는 양반이세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구.
그랬더니 그 양반이 그저 허허 웃어요. 
글쎄요. 전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빨간 색도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밤에 살짝 자수하면 안 될까? 
안 돼요. 절대로. 그럼 당분간 숨어서 동정을 살피도록 하지.
그렇게 그 양반은 저 벽 속으로 들어갔지요.
남편이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만 같아서, 입술이 바짝바짝 타요. 
그만 두세요. 지금은 기다리는 거 밖엔 다른 수가 없잖아요.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냐. 이럴 바엔 차라리... 안 돼요. 제발!
행상을 허다가 이제 베를 짜기 시작했지요.
베 짜다가 우리 딸애도 났죠. 내가 새벽 한두 시까지 짜면,
그 양반이 나와서 네 다섯 시까지 짜고, 처음엔 하지 말라고 말렸는데,
가르쳐 보니까 이 양반이 곧잘 해요. 살아있다는 건 아름다운 것.
살아 있으니 우린 함께 울 수 있잖아.
아까 제 요정이 들려줬던 옛날 이야기를 하다 말았죠?
김서방이 열두 달을 모두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열두 명의
사람들, 사실은 열두 달의 정령이었지요.
우린 자네가 맘에 들어. 선물로 작대기를 하나 주겠네.
그 다음 해에도 김서방네는 계속해서 풍년이 들었답니다.
아이들이 나한테 아빠가 없다고 놀리곤 했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나한테는 스테카치가 있었으니까요! 
스테카치! 나 소풍 갔다가 벌에 쏘였어.스테카치! 내 교복 어때요?
스테카치! 웬 남자애가 자꾸 따라와. 어찌나 유들유들한 지.
스테카치, 스테카치... 아빠......

 

 

 

'벽속의 요정’ 원작은 스페인 내전 중이던 1950년대를 배경으로 

좌우이념의 대립 속에서 사상범으로 몰려 벽속에서 숨어 지내는

한 남자와 그의 가족의 이야기다. 갇힌 삶의 고통도 가족과 함께 성장하고

사랑하며 나이 들어가는 인간의 소소한 행복을 막을 수 없다.

50년 세월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애틋하고 감동적인 사랑이야기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원작을 이념 갈등의 역사를 안고 있는

우리 한국의 상황에 맞게 배삼식이 각색했다.

때론 어린 소녀의 풋풋한 성장기 같고, 때론 부부의 따뜻한 사랑 이야기 

같고, 때론 옛날 전래 동화 같은 이 작품은 특히 시대적 배경인 

6.25가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고 벽 속으로 숨어살게 된 이유만 제공해 

극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밝고 가족애를 그린 

가슴 뭉클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40년 동안 벽 속에 숨어 사는 아버지, 그의 아내, 그의 딸, 
아내와 딸의 관점을 오가며 진행되는 벽속의 요정은 조그만 아이였을 때부터 벽속에 요정이 있다고 믿으며 요정과 둘도 없는 친구로 자란 아이가 커가면서 그 요정이 돌아가신 줄만 알았던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는 이야기와 우리나라 옛날 식으로 얼굴도 모르고 결혼한 남편과 살아가면서 사랑을 느끼다 어쩔 수 없이 남편을 벽 속에 숨기며 40년을 살아야 했던 아내의 이야기다. 그리고 아버지 요정이 어린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액자식 구성으로 잘 맞물려 있다. 배우 김성녀는 이야기마다 5살짜리 딸이 되었다가 어미가 되고 벽 속의 아비가 되고 경찰, 이웃집 사람들, 딸의 남자친구, 사위가 되었다가 다시 그 딸의 딸에 요정이 되는 1인 다역의 열연을 펼친다. 춤과 노래가 간간히 섞여 뮤지컬 드라마의 형식을 띠는 <벽속의 요정>은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모두 소화하는 김성녀의 첫 모놀로그 작품이다.

 

 

 

연극은 6·25동란 당시 북에 동조한 것으로 오해를 받을만한 행동을 한 인물이,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반공법이 강력한 위세를 떨치던 시절이라, 자칫 공산주의자로 몰려 감옥에 들어가 징역을 살게 되는 것이 두려워, 평생을 자택의 벽 사이 공간에서, 아내의 도움을 받으며 사망신고까지 하고 숨어 지낸 인물을, 벽속의 요정이라 일컬어 만든 연극이다.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스스로 만든 감옥에 날개를 꺾고 수감생활 하듯 지내며, 아내를 통해 사회변화, 여식의 성장과 결혼, 그리고 밤에만 베틀을 돌리거나, 낮에는 수건으로 여자처럼 머리를 감싸고 베를 짜며 은둔해 지내다가, 사회통합에 따르는 대사면령 포고에 따라, 검은 머리칼로 스스로의 감옥에 들어간 이래, 40여년 만에 백발의 머리로 벽 공간에서 나와 자유의 몸으로 살다가 몇 년 뒤 저세상으로 떠나간 기구한 운명의 <벽속의 요정>의 일대기다. 복선을 깔아 물이 솟도록 하는 요술지팡이 이야기가 그림자인형극으로 배경 막에 투사가 되고, 딸이 태아나자, 벽속의 요정인 아버지가 러시아 민요 스텐카라친을 딸의 기억 속에 심어주는 등, 여주인공이 40여 년 동안 숨어 지내는 남편 역을 비롯해, 딸, 건달, 이웃사람, 딸에게 치근대는 청년, 인형극 인물 등 수많은 역을 혼자 연기, 또는 노래와 춤으로 표현해 연극을 이끌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