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슨 하이웨이 '마른 입술은 카피스카싱으로 가야 해'
1989년에 발표한 이 작품은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가상의 공간 와세이치간 힐 인디언
보호구역을 배경으로, 7명의 원주민 남성시점에서 이곳의 삶과 일상이야기를 전한다.
인디언 보호구역 남성들은 원주민 부녀자로 구성된 여자 하키팀 결성에 항의하기 위해
뭉치고, 이것이 극의 전개를 이끄는 뼈대가 된다. 남성들은 여성들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
남성의 권위와 정체성에 대한 도발이자 공격으로 이해한다.
한편, 인디언 보호구역 남성들은 저마다 삶의 계획과 이야기를 가진다.
빅 조이는 과격한 성품의 다소 폭력적인 인물로, 라디오 방송국을 개설해 침체한
보호구역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포부가 있다. 재커리 예레미아기 키치기식은 빵집을 열어
보호구역주민을 위한 일자리 창출및 경제부흥을 꾀하려는 계획을 가진다.
빅 조이와 재커리는 각자 마을의 발전방안을 놓고 불화와 다툼을 일삼는다.
크리처 나타케이스는 빅 조이를 추종하는 인물로 시종일관 그의 편을 들여 지지한다.
스푸키 라크루아는 보호구역의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구원될 방법으로 기독교에 집착하며,
주민들에게 전통신앙을 버리고 개종할 것을 종용한다. 반대로 청년 사이먼 스타블랭킷은
사라져가는 영적 전통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려는 일념으로 인디언 춤과 노래를 연마한다.
마을 연장자 피에르 생피에르는 불법 밀주업자로 여자하키 경기의 심판으로 새로운
직업을 얻는다. 한편 일곱 남성 중 가장 나이어린 소년 디키 비트 할키트는
빅 조이의 사생아다. 태아 알코올 중후군을 안고 태어난 그는 후유증으로 말할 수 없다.
생부와 생모로부터 방치되어 정신적, 육제적으로 피폐한 삶을 사는 인디언 보호구역의
현실을 표상한다. 외견상 삐걱거리버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남성들이지만, 이들은 공유하는
부분도 있다. 특히 동년배인 빅조이, 재커리, 크리처, 스푸키는 과거 청년시절
인디언 인권운동에 동참하는 등 원주민공동체의 생존과 발전을 도모했던 동지였다.
시간이 흘러 현재는 각자 계획에 몰두하지만,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보호구역의 현실을
개선하는 것으로 수렴된다. 서로 티격태격하면서도 원주민공동체의 존속과 발전이란
큰그림 속에서 나름의 계획을 추구한다. 각자 문제에 매몰되어 다툼과 갈등이 끊이지 않고
몸싸움까지 벌이지만, 이들은 특유의 유머기질을 발휘해 극단으로 향하는 건 피한다.
이 모습은 이들이 언젠가 다시 합심할 수 있다는 가능성마저 버린 건 아니란 암시를 준다.
마을에 여성하키팀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은 남성들을 하나로 연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남성들은 여성 하키팀 결성에 대해 한목소리로 우려와 반대의 뜻을 표한다.
이러한 태도는 겉보기엔 여성혐오와 가부장적 위계의 정서를 표출하는 듯하다.
다른 측면에서, 남성들의 이러한 태도는 그들이 잠시 망각하던 것, 즉 과거 인디언보호구역
생존과 발전을 도모했던 시절의 동지애에 다시금 불을 붙이는 계기로 작용한다..
다행인 것은 남성들의 태도에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극 후반에 이들은 여성하키팀 경기에 관중으로 참석해 마을대표로 링크를 누리는 여자들을
일괄적으로 응원한다. 결과적으로 이 극은 인디언 보호구역의 남여 갈등 및 남성들 사이의
반목과 질시가 해소되는 방향으로 향하여 이런 점에서 극은 막바지에
한결 마울 따뜻해지는 여운과 감동을 전한다.
내일이면 남성들은 다시 저마다의 계획에 빠져 끊임없이 다투는 일상을 반복하겠지만,
그들에게 여전히 '동지애'의 가능성이 남아있으리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다.
아울러 고통스러운 현실은 여전하겠지만 여기서 벗어나려는 마을주민들의 노력과 고민
역시 여전히 지속될 것이라는, 그렇게 아들의 커뮤니티는 미래를 향해 존속해갈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함께 남긴다.
이 작품은 하이웨이의 <레즈 시스터스(The Reimers)>와 싹을 이루는 작품이다. 전작은 이 가상의 마을에서는 7명의 원주민 여성 혹은 '레즈시스터스의 꿈'과 희망의 여정을 유쾌하게 풀어낸 반면 <마른 입술은 카피스카싱으로 가야 해>는 원제가 '레즈 브러더스(The Rez Brothers)였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인디언 보호구역에 거주하는 일곱 남성에게 초점을 맞춰 아들의 꿈과 미래 계획을 소소하지만 유쾌하게 극화한다. <레즈 시스터스>의 남성 버전이라 할 이 극에서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영어, 크리어, 오지브웨이어 등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사용되는 일상 언어가 혼용된다. 또한 <레즈 시스터스>에서 원주민의 영적 정체성의 상징이자 '트릭스터' 캐릭터로 등장하는 나나부시가 이 극에도 등장한다. 특기할 점은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전작에서 나나부시가 '남성 정체성'을 띤다면, 남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극에서는 나나부시가 '여성 정체성'을 띤다는 것이다. 이는 쌍을 이루는 두 작품을 관통하는 '성대결' 국면을 극화함에 있어 남녀의 입장과 정서에 대해 균형적인 시각을 견지하려는 작가의 섬세하고 치밀한 의도를 잘 반영한다. 일례로 <레즈 시스터스>에서 마을의 발견 방안과 계획에 대한 '여성' 자매들의 요구와 이에 대해 딱히 답변을 내놓지 못하는 '남성' 추장의 구태의연한 태도가 충돌한다면, <마른 입술은 카퍼스카싱으로 가야 해>에서는 여성하기 팀 결성을 열망하는 '주부들'의 목소리와 이에 항의하는 남편들의 목소리가 충돌한다.
한편 작가는 상기한 성 대결과 남녀 불평등이라는 민감한 이슈를 전경화함에 있어 시종일관 '유머'를 놓지 않는다. 이는 과열된 양극화 및 시각편중을 방지하는 가운데 주제가 극 마지막까지 힘과 탄력을 유지하도록 하는 효과적인 무기로 작동한다. 이 점은 <마른 입술은 카페 스카싱으로 가야 해>의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빛나게 하는 '고무적인' 요소다. 이처럼 이 작품은 캐나다 원주민의 정체성과 현실의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하면서도 대중과의 공감과 소통을 끌어내는 유머와 재미를 겸비한다. 이런 점에서 이 극은 톰슨 하이웨이를 캐나다 연극사에서 중요한 위치로 끌어올린 작품이자 토론토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왕립 알렉산드라극장에서 상업적으로 공연된 원주민 최초의 극으로 평가받는다.
<마른 입술은 카퍼스카싱으로 가야 해>는 2막 희비극 (Tragi-comedy)이다. 이 극은 원주민의 영성과 기독교, 남성과 여성, 개인 간 사업계획 갈등 등 다양한 주제 및 그로 인한 불가피한 폭력과 분노로 가득하다. 반면, 상기한 폭력과 분노는 희극적으로 전개된다. 고통스러운 경험은 유머의 주제가 되며, 유머는 역경을 극복하거나 견뎌내는 방법으로 부각된다. 비극적 상황이 희극으로 역전되는 방식은 삶을 긍정하는 철학 및 생존의지로서 웃음의 힘을 피력한다. 아울러 극에서 표출되는 원주민의 고통스러운 현실은 수세기 전 아메리카 대륙이 서구 백인에 의해 식민지화되고, 이곳 원주민이 애초의 고향과 터전을 떠나 '보호구역'에 수용되어야 했던 역사적 맥락을 현재로 소환한다. 이런 방식을 통해 작가는 식민지 역사에서 비롯된 현재의 고통스러운 삶을 부인할 수 없는 현실로 인정하면서도, 이것을 패배주의적으로 체념하기 보다 또 다른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둔다. 이것이 톰슨 하이웨이의 '유머' 코드가 갖는 의미이자 이 극이 '희비극' 형태를 지니는 의미일 것이다.
변신의 귀재 '트릭스터' 나나부시는 극 중 남성들의 삶에 끊임없이 개입하며 이들과 상호 작용한다. 나나부시는 인디언 보호 역의 과거와 현재 및 이상과 현실을 잇는 존재로서, 절망과 희망을 모두 구현하는 다양한 '여성'의 모습- 불화와 혼란을 퍼뜨리는 성적 포식자 가젤 나타웨이스, 과거 전통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통합한 팻시 페가마가보, 보호구역의 자기 파괴적 습관을 구현한 블랙 레이디 할키드-으로 '남성'들의 무대 현실에 현현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나부시의 존재는 이 작품의 '희비극적 형태 미학에 대한 화상이 되며, 아울러 남성과 여성, 원주민의 영성과 기독교, 이상과 현실, 과거와 현재 사이의 단결될 수 없는 관계를 합의한다.
이처럼 쿡 <마른 입술은 카피스카싱으로 가야 해>에는 절망과 희망이 교차한다. 원주민 보호구역의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남성들은 그거 피해자와 희생자인 것만은 아니다. 백인식민자들이 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 또한 누군가에게는 가해자이고 폭력자이기도 하다. 일례로, 빅 조이는 식민지 개척자들에게 반항하는 전사적 풍모를 지닌다. 하지만 그는 정작 보호구역의 동료들 사이에선 무책임하고 비겁한 인물이다. 자신이 '사생아' 디키의 친부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남성으로서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자책을 여성들을 향한 폭력적 인사와 비난으로 표출한다. 그의 폭력적 성향은 억압적인 사회시스템을 향하기보다 보호구역 동료들을 향해 더 자주 행 사된다. 스푸키는 기독교가 원주민의 식민상태 예속의 근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기독교를 구원의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의 종교를 무기로 주변인의 개종을 강요하고 위협한다. 하지만 희망도 있다. 사이먼은 조상들의 영적신념을 지키며 자아실현을 향해 고군분투한다. 세월에 잊힌 인디언의 춤과 노래를 연마하는 그는 주술사의 손녀인 여자 친구 팻시와 가정을 이루어 캐나다 전역을 누비며 세상 모든 인디언 원주민들과 함께 춤추며 조상의 영적전통과 문화를 회복하겠다는 장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 디키는 인디언 보호구역의 절망 적인 현실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술에 찌든 친모의 영향으로 알코올 증후군을 떠안고 태어난 그는 후유증으로 말을 하지 못한다. 생모와 생부 모두에게 버림받은 후 정신적·육체적 장애를 겪는 그는 사이먼의 아기를 임신한 팻시를 성폭행함으로써 사이먼의 꿈과 '아기'가 상징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다시금 좌절시킨다.
그럼에도 이 극에는 여전히 희망이 남아있다. 극은 스푸키의 아기가 태어나는 것으로 끝난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 신봉자인 스푸키의 아들을 받아내는 것은 병원 간호사가 아니라 원주민 보호구역의 마지막 주술 사이자 산파 로지 카카페툼이다. 재커리 부부의 갓난아기가 해맑게 웃는 소리가 뒤를 잇는 가운데 극은 막을 내린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인디언 보호구역의 나은 미래를 약속하는 한 줄기 빛이 된다.
"완전히 암전되기 몇초 전, 무대 밖에서 헤라가 마법 같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린다. 그녀의 웃음은 하모니카의 마법 같은 아르페지오에 의해 울려퍼진다. 마침내 이 어둠 속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마지막 소리는 테이프에 녹음되어 극장전체를 가득 채울 만큼 확성되는 아기의 웃는 목소리다. 그리고 아기 목소리 역시 완전한 침묵으로 사라진다.”
유머와 진지함이 어우러진 이 작품은 원주민 문화와 현실을 알리고, 관객과의 소통을 통해 공감을 끌어낸다. 이 극을 통해 하이웨이는 캐나다 연극의 역사를 한 단계 격상시켰다고 평가받는다. 캐나다 최고 연극상인 ‘도라 메이버 부어 어워드’를 수상했고 영국에서 최고의 소수민족 희곡 작품 5선 중 한편에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