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선 원작 이재현 각색 '학마을 사람들'
예로부터 학마을 사람들은 학을 신처럼 믿어왔다.
그 까닭은 학이 길흉의 전달자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일제 말기 학마을 이장의 손자와 박훈장의 손자가 징용되어 끌려가던 해는
학이 날아오지 않았지만, 해방되고 손자들이 돌아온 해에는 어김없이 학이 날아왔다.
그러던 어느 해 나무에서 학 새끼가 떨어져 죽더니, 이 마을에 전쟁(6·25)이 밀어닥쳤다.
마을 사람들은 전쟁의 사회적, 정치적 배경에 대해서 알지 못한 채,
학이 흉조를 보였다는 사실만으로 마을에 들어온 인민군을 경계한다.
학마을에서 자라난 사람 중 변모를 겪은 것은 박훈장의 손자인 바우뿐이다.
바우는 마음에 두고 있던 봉네가 덕이를 택한 후 불만에 차 마을을 떠났다가
인민군이 되어 돌아온다. 이 마을을 잘 아는 그는 마을사람들이 인민군을 꺼려하는 것이
학이 보인 흉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학을 쏘아 죽인다.
바우의 총질로 학이 죽자 마을 사람들은 전에 없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모진 피난살이에서 돌아왔을 때 마을은 폐허로 변하였지만,
땅을 버릴 수 없었던 순박하기만 한 농민들은 묵묵히 새로 집을 지으며
마을을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1957년 [현대문학]지에 발표된 이범선의 단편소설.
담담한 필치로 토착 서민의 생태를 그린 이범선 초기의 작품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학의 도래 여부와 학의 상태를 마을의 행ㆍ불행 및 운명의 길흉으로 믿는
전래적이고 집단적인 속신(俗信)을 바탕으로 우리의 현대사를 이에 병렬시켜 전개한다.
이 작품은 동양적 운명관을 기반으로 한 세계관이 있다.
이를 통해 작자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변천 및 그에 따른 인간의 불행한 상태와
이를 극복하려는 희망과 끈질긴 향토애라는 주체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 작품에는 신적(神的)인 존재가 깃들여 있다. 그리고 그 신의 자리에 학이 놓여 있다. 이 작품에서 신이 숨어 버리는 계기는 한일합방과 해방, 그리고 6․25의 세 가지 측면에서다. 이 세 단계는 한국 근대사의 중요 고비와 대응된다. 즉, 신이 숨은 시대가 역사성 자체에서 연유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작품 세계는 동양적 운명관을 밑바닥에 깔고 있다. 이러한 토착적 삶의 세계관 속에는 한국적 리리시즘을 바탕으로 하면서, 한 편의 수묵화 같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 그래서 자연적․토속적 삶의 세계를 통하여 비인간화되어 가는 역사적․사회적 현실을 상징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 문명에 대한 비판의 시각은 그가 전후작가(戰後作家)라는 평가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이 전쟁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문학에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전쟁의 비인간성과 파괴성,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의 위협에 대한 항변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휴머니즘 사상이다. 학이 오지 않는 문명의 폐허 위에서 인간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으로서 작가는 학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봉네의 손에 조그만 애송나무를 들게 한다. 이러한 특징들은 전후작가가 지닌 보편적 특성이기도 한 것이다. 작가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사상은 결국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라는 사실을 이 작품은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학이 오지 않았던 시절은 크게 두 가지 역사적 사건과 일치하는데, 하나는 한일합방이고 또하나는 6ㆍ25사변이다. 이 두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고비가 될 뿐만 아니라 민족의 삶의 조건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외부의 세계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 내왕도 별로 없고 영향도 별로 받지 않는 외진 산골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 해서 이 역사의 격동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작가의 역사의식이 학의 운명을 통해서 나타나 있다
이 작품에서의 학은 ‘신성한 삶의 규범’이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학이 떠나고 돌아옴은 일상적인 삶의 리듬과 일치하는 것으로, ‘인간의 삶의 한 지표’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라져 버렸을 때 인간은 삶의 의미를 상실한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 서두에 제시된 이장 영감과 박 훈장이 손자들을 일본군 병정으로 보내고 돌아오는 장면과 인민군 앞잡이 노릇을 한 바우가 재앙을 불러오는 장면에 잘 나타나 있다. 학이 돌아왔을 때의 기쁨과 잔치,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과 대조되는 이런 불행한 일들은 모두 민족사의 한 불행한 단면들이다. 학이 없는 시대, 그것은 삶의 질서를 관장하는 신성한 존재의 상실을 의미하며, 삶의 의미 창조가 불가능한 불행한 역사적 상황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내용을 시적 감상주의로 파악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소나무가 불타고 학이 죽어버린 암흑의 현실이라 하더라도 그곳은 학마을 사람들이 돌아와야 할 공간이고, 또 새로운 학의 도래(到來)를 이루어 내야 할 삶의 터전이다. 피난길에서 돌아온 그들이 박 훈장과 이장 영감을 장사지내고 내려올 때 소중히 안고 내려온 애송나무는 바로 비극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창조하려는 그들의 의지의 표상이다. 상실과 회복의 의지로 이어지는 사건 전개 과정에서 민족사의 불행을 극복할 수 있는 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은 진기한 이야기, 즉 학이 떠남과 회귀에 인간의 삶의 의미와 질(質)을 연계시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구도가 돋보임을 보여 준다. 소설의 허구성이란, 이처럼 어떤 현상에서나 인간의 삶과 관련되는 의미를 발견하고 그 의미를 형상화해 나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