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막스 프리쉬 '이제 그들은 또다시 노래를 부른다'

clint 2024. 10. 7. 07:04

 

 

'이제 그들은 또다시 노래를 부른다.'는 내용 이해에 앞서 줄거리 파악이 쉽지 않다.
제1장에서 제4장까지에 해당되는 제1부에서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으나, 제5장에서 제7장 (작품에서는 '마지막 장'이라고 표기되어 있음)까지의 제2부에서는 각 장에서 전개되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즉 생인지 아니면 사후세계인지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먼저, 제5장은 사후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등장인물들의 대화에서 암시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제4장에서 이미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카알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제6장에서는, 처음과 끝부분은 사후세계의 이야기이며, 반면에 중간부분, 즉 헤르베르트, 군인, 선생이 등장하는 대목에서부터 선생이 살해되기까지에 이르는 부분은 생의 세계이다. 제7장은 생의 세계와 사후세계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등장인물들 중에서 에두아르트, 토마스, 제니, 제니의 두 아이들은 생의 세계에, 대위, 신부, 무전병, 벤자민은 사후세계에 속한 인물이다. 이런 관계로 생자(生者)와 사자(死者)들 간의 의사소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면 이 작품의 내용을 보자. 이 작품의 도처에서 제 2차 세계 대전을 암시하는 대목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과, 또 부제가 〈진혼제의 시도〉라는 것을 놓고 볼 때, 이 작품의 집필 의도는 일차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희생된 영혼들을 위안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의 외도는 단순히 그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독일에 의해 자행된 인류역사상 유례없는 파괴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가 어떤 원인에서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밝힘으로써 이런 행위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프리쉬는 그 원인을 그 당시의 독일문화에서 찾고 있다. 다시 말하면, 독일이 문화적으로 그토록 위대한 유산과 전통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문화가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까닭에 현실을 지배하는 정치를 견제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하거나 이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함으로써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프리쉬가 말하는 그 당시의 독일문화는 어떤 문화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미적 문화〉로 총칭되는 문화이다. 이 문화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먼저, 현실과 유리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이 문화는 그것의 본래적인 임무를 현실을 초월한 영역에 국한시킴으로써 현실에 대해 한사코 무관하려 한다. 다음으로는,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정치에 대해 철저하게 외면한다는 것이다. 이 문화는 정치를 한낱 저급한 것, 저속한 것, 진부한 것으로 간주하며, 이에 관심을 둔다는 것은 곧 자신의 신성한 임무를 포기하는, 용납될 수 없는 행위로 받아들인다. 〈미적 문화의 특별하고, 언제나 뚜렷한 특징 은… 문화와 정치를 깨끗하게 구분한다는 것이다.〉 라는 프리쉬의 말은 바로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끝으로, 윤리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앞의 두 가지의 특성에서 이미 간파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에 머물려 하며, 현실을 지배하는 정치와의 관련을 극구 배제하려 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사회적인 삶이 요구하는 윤리적인 임무를 도외시하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프리쉬는 이런 성향의 문화를 도덕적으로 정신분열증을 일으키고 있는 문화로 명명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문화가 이 작품에서 어떻게 구체화되어 나타나 있는가를 살펴보자. 이는 세 등장인물, 즉 헤르베르트, 신부, 선생을 통해서 드러나는데, 여기에서 이 인물들은 각기 문화의 한 영역인 예술, 종교, 학문을 대표하고 있다.
군인 헤르베르트는 그가 수도원에 있는 프레스코 화를 두고서 배경이 〈황금배경〉이며, 화풍은 〈비잔틴 풍〉이며, 시대로 따지면 〈12세기의 작품〉이라는 등의 평가를 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미술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음악에 대해서도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으며, 첼로연주에도 뛰어난 인물이다. 말하자면, 그는 〈미적 인간〉이며, 〈문화적 인간〉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파괴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는 인간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사살하고 불태워 죽였다거나, 자기에게 주어진 무력을 통해 살인행위를 계속하겠다는 그의 의도가 그런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헤르베르트의 이 같은 이중적인 면, 즉 예술적으로 높은 수준을 가진 인간이 동시에 거침없이 살육을 자행하는 인간이라는 것에서 우리는 예술과 현실의 극단적인 양분화현상을 읽을 수 있다. 헤르베르트에게서 볼 수 있는 예술에는 그것의 〈미적 기능〉만이 인정될 뿐, 또 하나의 기능인 〈현실적 기능〉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아름다움의 추구에만 봉사하고 있을 뿐, 현실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거친 뒤 이를 추상화하는 것을 통해 삶을 보다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는 〈현실적 임무〉는 부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예술은 단지 자기도취와 미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헤르베르트의 예술은 윤리성올 상실하고 있으며, 오히려 어떤 의미에선 그의 비윤리적인 행위를 더욱 조장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이는 21명의 인질들을 살해하고 난 직후에 프레스코 화를 감상하는 그의 태도에서 분명해진다. 비인간적인 행위를 자행한 뒤 곧이어 예술 감상을 한다는 것 그자체도 그러하거니와, 예술이 마치 살인행위를 마무리하는 데에 추가되는 장식물로써, 더 나아가서는 또 다른 살육을 하기 위해 갖는 일시적인 휴식에 이용되고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현실과의 분리현상, 문화의 윤리성상실은 신부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신부의 종교가 어떤 것인가는 그가 〈내가 있을 곳은 이곳 수도원뿐이오〉라고 말한다든가, 수도원을 언급할 때 〈고독한〉이란 형용사를 붙인다든가, 12년 동안이나 세상 사람과의 접촉 없이 〈홀로〉 지내왔다고 고백하는 데서 드러난다. 이는 그의 삶의 영역이 한결같이 수도원이라는 공간에만 한정되어 왔으며, 그의 종교 또한 현실과 단절된 세계에 머물러 왔음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그는 종교란 현실과의 거리를 크게 두면 둘수록 그만큼 종교의 참된 길을 가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신부에게서 볼 수 있는 종교에는 종교의 이념적인 면만이 강조되어 있을 뿐, 이를 현실에서 실행으로 옮기는 실천적인 면은 처음부터 도외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종교는 〈이웃사랑〉이라는 윤리적인 임무를 외면하게 된다. 예컨대, 헤르베르트가 인질을 살해하고 난 뒤, 이에 관련된 일체의 사실에 대해 함구토록 요구하자 그가 이에 순순히 응하는 것은 바로 그런 사실을 말해줌이 된다. 이 같은 그의 태도는 자신의 종교생활이 직접적으로 침해당하지 않는 한,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야 어떻게 되든 이에 개의치 않겠다는 뜻이다. 선생 역시 그렇다. 그는 휴머니즘을 신봉하고, 휴머니즘 정신에 철저하게 배어 있다는 점에서 〈정신의 인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정신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며, 모든 것을 정신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본래적인 의미의 정신과는 크게 다르다. 본래 의 정신이란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현실을 통찰하고, 비판하며, 계도하는 것이지만, 선생의 정신은 지적 유희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일 뿐, 현실에 대해 지극히 무력하며 자신의 신념을 실행으로 옮기는 실천력을 결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정신은 현실과의 관련성이 매우 희박한, 요컨대 관념 적이고 공허한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교과서 사건〉에서 학생들이 교과서에 있는 휴머니즘정신에 어긋난 대목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자, 그가 이에 동조하기는커녕 당국의 압력에 굴복하는 태도가 그런 것이다. 그런가하면, 그의 관념 우위적 정신은 급기야 현실에 대한 무력함을 넘어서서 불의한 현실에 타협하는 태도를 취하기까지 한다. 그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사살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데, 이 〈대행 살인〉은 그의 정신이 경우에 따라서는 언제든지 자신의 신념을 바꿀 수 있는 기회주의적인 것임을 말해주는 동시에 윤리성을 상실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러면 이러한 성격의 문화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물론 그것은 이러한 문화가 현실과 유리된 상태에서 벗어나 현실에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는 곧 이러한 문화가 사회적인 삶에 대한 윤리적인 과제를 실현하는 것이 되며, 달리 말하면 윤리성을 회복하는 것을 뜻한다. 이 작품의 제5장에서 등장하고 있는 〈빵 만들기〉의 장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참여하여 빵을 만드는 행위는 곧 공동체정신과 협동정신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사회구성원인 개개인이 사회적인 삶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짐과 동시에 개개인이 사회적 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책임과 윤리를 실행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프리쉬는 미적 문화의 극복가능성을 이 장면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제 그들은 또다시 노래를 부른다.'는 독일의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과 이 당시의 독일문화와의 상관관계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