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이오네스코 '왕은 죽어가다'

clint 2024. 3. 24. 06:47

 

 

<왕은 죽어가다>의 내용은 무척 단순하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오랜 시간동안 권좌를 누려온 왕이

앞으로 1시간 후면 죽게 될 운명에 처한다.

연극의 흐름은 그 죽음을 향해 치닫는 시간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함을 통해,

관객에게 동참을 요구한다. 바로 그 운명에 대해,

왕은 처음엔 거부하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예정된 죽음의 사실 자체는

인정하지만 피할 길을 찾게 되고, 종극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힘에

굴복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죽음의 진행을 통해,

이성적 인지와 그것이 감성적, 정서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

그리고 그에 따른 나름대로의 준비와 맞닥뜨림을 통해,

인간과 사회의 실존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결국은 누구나 죽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 사실을 망각하거나 애써 받아들이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사실, 인간 존재에서 그리고 인간이 살고 있는 이 현실세상에서 죽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영원한 것은 없다.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하나님으로 대표되는 영혼의 세계에 거하지 않는 이상, 현실세계와 인간 실존은 누구나 죽음의 문제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다. 문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무지와 오만의 태도이다. 바로 거기에서 폭력과 억압과 아픔이 발생한다. 죽음을 알고 받아들이고 포용하려는 존재는 겸손할 수밖에 없다. 삶에 대한 경외와 함께 죽음에 대한 존경도 더불어 간직한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포함한 이 사회는 어떤 문제를 안고 죽어가고 있는가? 극중 왕은 거의 전능한 존재로 묘사되었다가, 하나 둘 무능력한 존재로 추락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탁월한 문학, 예술, 발명, 기술, 그리고 영토와 권력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것들은 점점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져간다. 망각 속에 파묻힌다. 단순히 그의 작품들뿐 아니라, 왕이라는 자신의 존재까지도 사라져간다. 죽음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잊혀져 가는 것. 단순히 육신의 존재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기억마저 사라져가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일 것이다. 내 존재뿐 아니라 그 의미마저 사라져 갈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되고 허무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짊어지고 겪어야 할 짐이며 무게이다. 바로 이 점을 자각할 때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움과 함께 하는 인간존재의 따스함을 향유하고 나눠줄 수 있다. 김수환 추기경이 아름다운 것은 그에 대한 기록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대한 많은 추억과 기억들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모습을 아주 리얼하게 묘사한다. 거부와 몰인정, 분노, 우울, 회상, 그리고 체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들을 왕의 대사와 묘사를 통해 잘 보여준다. 때문에 그 과정을 보면서 우리의 거울로 삼을 수 있다. 자신을 준비시킬 수 있다.

 

 

 

죽음에 대해 초월한 것보다는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각자의 왕국에서 왕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죽음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겠는가? 

그것이 바로<왕은 죽어가다>를 통해 우리에게 제시하는 문제이다.

 

 

 

「왕은 죽어가다」안에서 인물들은 파열 현상을 겪는다. 키가 큰, 멋진 몸매의 왕은 극이 진행될수록 점점 더 작아지고 피곤해한다.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리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음'의 형식이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블랙홀 속으로 서서히 빠져드는 왕은 일그러지고 변화한다. 이전의 위풍당당한 왕의 모습은 사라지고 갓난아기처럼 칭얼대고 보채기 시작한다. 또 왕은 주변의 인물들과도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 의사 소통이 불가능한 존재로, 고립되어가는 존재로 남아버린 왕의 육체는 더 이상 크지도 멋지지도 않다. 이러한 왕의 우측에는 검은 옷을 입은 마그릿 왕비가 있고 좌측에는 하얀 옷을 입은 마리 왕비가 있다. 이들 또한 변화한다. 젊은 마리 왕비는 극 속에서 生을 상징하고 마그릿 왕비는 死를 상징하는 데 이들이 생과 사의 굳어진 공간 안에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때로 마그릿은 생각지 못했던 생의 단면을 보여주는 역을 맡기도 하고 마리 왕비 또한 이전의 밝고 활력 넘치던 생이 얼마나 어리석고 의미 없는 것인가를 역설하기도 한다. 「왕은 죽어가다」의 인물들은「대머리 여가수」에서처럼 모두 소통부재의 파열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왕의 '죽음'을 향한 움직임의 근처에서 그 속도를 조절하고 현상을 진단하면서 관객과의 리듬을 조율하는 왕비들은 「왕은 죽어가다」를 보다 정적으로 만든다. 「대머리 여가수」가 말놀이의 역동성을 보여준다면 「왕은 죽어가다」는 죽음의 통로를 걷고 있는 인물의 내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물론 기존의 극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말이다.

 

 

 

「왕은 죽어가다」에서 시간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 시간을 조절하는 인물로 근위병이 등장하는데 근위병은 극 초반에서 각 인물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극이 진행되면서 변화하는 근위병의 표정과 몸짓은 눈여겨봐야 한다. 급작스런 움직임을 배제한 채로 아주 천천히 자신의 몸 동작을 변화시키는데, 왕과 왕비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던 관객은 무심코 바라본 근위병을 보고 일종의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 근위병의 표정과 몸짓은 왕과 왕비들이 연극의 어느 지점에까지 와 있는가를, 왕이 죽음의 어느 길목에까지 다다랐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근위병은 키가 큰 창을 늘 들고 서 있는데, 극 초반에 꼿꼿이 서 있던 창은 시간이 흐를수록 뜨거운 열에 노출된 것처럼 휘기도 하고 둥글게 말리기도 한다. 마치 시계의 분침처럼 느린 속도로 무대를 회전하고 있는 근위병과 그의 손에 들린 채 모양을 바꾸는 창은 「왕은 죽어가다」의 속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왕이 혼란스러워할때마다 근위병은 제자리에 멈춰서기도 한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근위병의 창 또한 심하게 휘어진다. 이전의 시간개념은 사라지고 왕의 시간개념이, 혼란스러워진 관객들의 시간개념이 무대에 들어선다. 근위병은 다리와 팔에 붕대를 친친 감기도 하면서 인간의 삶이 상처와 가까워지고 죽음과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이 매우 느린 속도로, 그러니까 쉽게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꾸준한 속도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극 초반의 왕과 근위병의 모습은 극 후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극이 진행되면서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 것이다. 언제 그 많은 것이 변화했단 말인가.

 

 

 

「왕은 죽어가다」의 공간은 어느 나라의 성 안으로 상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 성은 결코 성대하거나 아름답지 않다. 금이 가 있고 치워도 치워도 없어지지 않는 거미줄이 있고 아주 작은 의자 두 개가 왕비들을 위해 놓여 있다. 예술극장 活人의 원래 무대가 추상적인 모양의 석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극의 배경을 표현하는 데는 안성맞춤이었다. 따로 다른 것을 설치하지 않아도 이오네스코의 원작의 분위기를 내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무대 공간 내에 색다른 구분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극의 중후반쯤에 이르러서 무대의 중심에 왕과 근위병을 남겨놓고 왕비들과 쥴리엣, 시의가 노출된 상태로 무대 밖에 나가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제2의 무대라고 부르고 싶다. 인물들은 무대의 중심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상태로 제 2의 무대에서 각자의 대사를 받아치곤 했다. 관객에게 있어서 그러한 장면 구획은 다소 낯선 것이었지만 왕이 얼마나 고립되어 있는가를, 그리고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는 효과적이었다. 인물들은 관객의 입장에서 왕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대사를 읊조릴 때는 순간적으로 연극 속의 인물로 변화하곤 했다. 이 때부터 관객은 심정적으로 더 쉽게 극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제 2의 무대 위에서 왕을 바라보는 인물들은 「왕은 죽어가다」 속의 인물임과 동시에 배우들 자탔堅竪?하며 관객이기도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관객은 죽어가는 왕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들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왕의 주변인이 된다. 제 2의 무대의 영역을 넓게 확장시켜보면 배우들과 관객들은 동일한 공간 안에 놓이는 같은 성격의 인물들이 되는 것이다. 싸늘하고 괴기스러운 성 안, 그 안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왕. 이오네스코의 「왕은 죽어가다」는 창백한 연극이다. 조금씩 삶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왕의 얼굴, 창백하고 그로테스크한 그의 모습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의 얼굴이다. 시간은 조금씩 빠르게 죽음의 구멍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왜 죽는가'라는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장밋빛 뺨이 시퍼런 시체의 뺨이 될 때까지 인간들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괴로워 할 것이다. 부조리 연극은 인간들 삶의 이해할 수 없는 비논리적인 구석들을 건져서 무대 위에 구성해 놓는다. 때문에 인물들은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언어는 파괴된다. 무대는 차가워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모습이 진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