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릿 랜던 작 해머스타인 2세 극본 뮤지컬 '왕과 나'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시암(태국)의 국왕이
자신의 어린 자녀들을 교육시킬 가정교사로
영국의 귀부인을 초청했다.
군인이었던 남편과 사별한 안나는 외아들 루이스와 함께
미지의 이국으로 떠날 만큼 강인하고 주체적인 여성이다.
절대왕정의 전제군주인 시암왕 몽꿋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자신에게 고분고분 하지 않은 안나에게 심통을 부리면서도
흥미를 느낀다. 안나는 궁정의 수많은 비빈들과 왕자, 공주들에게
서구의 예의범절을 가르치면서 많은 문화적인 차이에 부딪히지만
점차 궁정에서 좋은 평판을 얻으면서 발언권을 키워간다.
주변국들을 차례로 집어삼킨 서구 열강이 시암 왕국까지 넘보는 것을
경계하는 왕은 영국의 여왕에게 자신이 야만인이라는
중상모략이 전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민한다.
안나의 조언에 따라 영국 대사들에게 시암 왕실이 서구적인 관점에서도
우아하고 세련된 곳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성대한 파티가 열리고,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왕과 안나는 더욱 가까워진다.
연회의 하이라이트는 버마 왕자가 선물로 바친 아름다운 노예 처녀 텁팀이
시암 왕궁에 맞게 번안한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공연한 것이었다.
귀빈들은 환상적인 공연에 박수를 보내지만,
왕은 도망친 노예를 추적하던 주인이 죽음을 당한 것에 불쾌해한다.
게다가 텁팀이 왕궁의 젊은이와 사랑의 도피를 감행했다가
잡혀오면서 사건은 더 심각 해진다.
안나는 관용을 베풀 것을 간청하지만 왕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분노한다. 왕에게 실망하고 큰 상처를 받은 안나는
아들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어린 왕자와 공주들, 왕비의 간청에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던 안나는
왕이 큰 병에 걸렸다는 소식에 놀라 발걸음을 돌린다.
왕은 안나에게 자신의 후계자인 왕태자에게 선진 문물에 대해
잘 알려줄 것을 부탁하고, 안나는 그의 유언을 지키겠다고 약속한다.
차기 국왕으로 지명된 왕태자는 땅에 엎드려서 복종을 표하는 인사법을
없애는 것으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한다.
오리엔탈 궁정의 이국적인 복장과 삭발한 머리, 맨발의 율 브린너와 19세기 영국 숙녀다운 보라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데보라 커가 손을 맞잡고 황금궁의 홀을 가로지르면 날 듯이 폴카를 추는 유명한 장면과 그 순간에 흐르는 곡 ‘함께 춤추실까요?(‘Shall we dance?’)로 유명한 [왕과 나]는 고전적인 우아함과 사랑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공정함을 고려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불편한 면이 있는 뮤지컬이다. 1860년대 초 시암(현재의 태국)의 라마 4세에게 고용되어 왕실 가정교사로 일했던 애나 리오노언스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한 1944년 마거릿 랜던의 소설 [애나와 시암의 왕]이 이 뮤지컬의 원작이다.
율 브린너와 함께 호흡을 맞춘 데보라 커의 이미지가 선명하지만, 사실 [왕과 나]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브로드웨이 초연 배우였던 거트루드 로렌스이다. [피그말리온], [어둠 속의 레이디]로 명성을 얻은 이 영국 출신 여배우를 위해 일했던 변호사 겸 비즈니스 매니저 화니 홀츠먼은 서서히 저물어갈 거트루드 로렌스의 커리어에 새로운 전기가 되어줄 작품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마거릿 랜던의 소설 속 여주인공 애나가 바로 그런 역할이라는 것을 알아본 홀츠먼은 자신의 고객에게 작품을 보여주었고, 거트루드 로렌스는 1944년에 발표된 소설을 무대화하기 위해 필요한 권리를 사들였다. 이 소설을 무대화할 경우 뮤지컬에 적합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도, 애초에는 [아이 러브 파리]의 작곡가 폴 포터에게 작곡을 의뢰했다가 거절당한 후 리처드 로저스와 오스카 해머스타인에게 책을 보내 그들의 승낙을 받아낸 것도 화니 홀츠먼이었다.
전형적인 ‘서구, 동양을 만나다’ 구조의 이야기에 생생한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은 리처드 로저스의 풍부한 음악과 삶과 캐릭터에 대한 이해를 따뜻하게 그려내는 해머스타인 2세의 가사였다. 처음부터 여주인공이 확정된 작품의 다른 한 축을 담당해야 하는 남자 주인공 몽쿳왕 역을 맡을 배우는 오디션을 통해서 선발되었다.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은 영화판 [왕과 나]에서 몽쿳왕을 연기했던 렉스 해리슨을 원했지만 그의 스케줄 문제로 새로운 인물을 찾아야 했고, 이전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던 러시아계 미국 배우 율 브린너가 캐스팅되었다. 광산업자인 러시아인 아버지와 인텔리겐치아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자란 율 브린너는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배우고 곡예사와 연주자로도 활동했다. 그가 스물아홉의 늦은 나이에 영화 [뉴욕의 항구]로 데뷔한 것이 1949년, 그리고 이듬해 캐스팅된 [왕과 나]는 그의 첫 뮤지컬이자 첫 브로드웨이 무대극이었다. 율 브린너는 독특한 개성과 카리스마로 미워할 수 없는 독불장군이자 기이한 매력을 가진 한 남자를 완성했고. [왕과 나]는 그에게 역사상 토니상과 아카데미상에서 남우주연상을 모두 수상한 단 아홉 명의 배우 중 한 명이라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그는 평생 이 작품에 출연했고 폐암 선고를 받은 후에도 1985년 1월 7일부터 6월 30일까지 고별 공연으로 브로드웨이에서 [왕과 나]에 출연했다. 그해 10월 10일 6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기까지 율 브린너는 몽쿳왕 역으로 4,633회를 연기했다.
뮤지컬로는 흔치않게 한 배우의 존재감이 각인되다시피 한 [왕과 나]이지만 이 작품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두 사람이 리처드 로저스와 오스카 해머스타인 콤비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리처드 로저스는 시암이라는 미지의 공간을 음악으로 표현하기 위해 관객들에게 낯선 정통 태국 음악을 도입하는 식의 무리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 마치 발레 음악에서 이국적인 공간을 형상화할 때 작곡가들이 흔히 사용한 방식처럼, 리처드 로저스는 실제 아시아의 음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대신 관객들이 아시아의 음률에 대해 생각하는 특징들을 적절히 살리는 것으로 시암 왕궁의 분위기를 그려냈다.
[왕과 나]의 이야기는 이 작품의 대본과 가사를 쓴 해머스타인 2세가 8년 후 발표하게 될 유작 [사운드 오브 뮤직]의 작사가이자 극작가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완고한 남자 주인공과 당당하고 밝은 성격의 다정다감한 여주인공, 그리고 여주인공이 가르쳐야 하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라는 기본적인 인물 구성도 일치한다. 물론 [왕과 나]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비해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할만한 여지가 더 많은 작품이다. 하지만 인종과 문화의 벽을 뛰어넘어 느끼는 사람과 사람 간의 유대감과 교감, 그리고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지만 격변하는 세상의 한가운데에 있는 왕의 혼란,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의 질문에 명확히 답할 수 없는 아버지의 고뇌처럼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노련하고 능숙하게 담아내고 있다.
[왕과 나]에 참여한 또 한 사람의 거장은 안무가 제롬 로빈스이다. 현대 무용과 뮤지컬계에서 모두 굵직한 족적을 남긴 그의 대표작이라면 대부분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들겠지만 [왕과 나]에서 시암 왕실 사람들의 이국적이면서 우아한 몸짓들을 형상화해낸 것은 그의 공로이다. 특히 텁팀이 각색한 무용극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서는 그 해 토니상에서 의상상과 무대 디자인상을 모두 석권한 이 작품의 화려한 비주얼 요소들이 동남아시아 무용의 양식적인 특징들을 차용한 제롬 로빈스의 아름다운 안무를 더욱 빛나게 하면서 관객들을 매혹시킨다.
[왕과 나]는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어떤 공통점도 없는 애나와 왕이 부딪히면서 서로를 받아들여가는 과정을 통해 서양과 동양, 남자와 여자라는 전혀 다른 두 존재의 만남과 융합을 그려내고 있다. 1950년대 브로드웨이에서 통용될만한 상식적인 관점이 21세기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공정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왕과 나] 그런 한계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사랑받을만한 클래식 뮤지컬로서의 완성도와 매력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