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알료쉰 '열여덟 번째 낙타'
1980년대, 러시아 모스크바. 젊은 지질학자 블라지미르는
6개월간의 탐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집에는 패션 디자이너인 고모, 아그네사의 집에서
하우스 키퍼로 일하고 있는 바랴가 자기를 대신해 생활하고 있다.
시골 아가씨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빨리 익힐 만큼
영리하고 아름다운 바랴를 보고 블라지미르는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지만, 바랴에게는 따로 마음에 둔 이가 있다.
그는 집안일을 도와 주러 가서 만나게 된
중년의 저명한 연극학자 뾰뜨르로 둘은 여러 희곡과 낙타에 관한
아랍인들의 우화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친숙해진다.
바랴는 이러한 심경을 아그네사의 집안일을 봐주며 우연하게 이야기를 하게 되고,
아그네사는 바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상대를 알게 되며 사각관계로 빠져드는데…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서로 다른 사랑,
그리고 사각관계를 풀어내는 열쇠는 무엇일까…
이 작품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모든 인물들로 하여금 서로를 조명하여 등장인물들의 정당한 측면과 부당한 측면 모두를 부각시키도록 만드는 복잡한 구조로 짜여있다. 등장인물들 중에서 바랴가 이 작품의 가장 중심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바랴는 두 명의 남자들을 조명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녀는 청년 블라지미르와의 관계에서는 부모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는 무능력한 젊은 세대의 모습을 조명하고, 뾰뜨르 예보그라포비치와의 관계 속에서는 문학적인 인물은 이해하면서도 현실적인 삶과 인간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한계성의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바랴는 인물도 예쁘고, 음식도 잘 만들며, 비서에서, 사서, 모델, 재봉까지 척척 잘 해내는 완벽에 가까운 인물로 등장한다. 그녀는 첫 번째 결혼에서 받은 상처를 보상받기 위해 블라지미르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감정까지 무시하고 타산적인 감정에 싸여 뾰뜨르 예보그라포비치에게 접근한다. 그녀가 결혼에 실패한 원인은 사회적 지도층의 이들과 결혼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아나 다름없는 그녀를 계산적인 여자로 내몬 세인들의 비난과 부모에게 의지하려고 만들고 스스로 삶을 개척할 의지가 없는 무능력한 남편에 대한 실망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타산적인 여자로 내몰았다는 것 때문에 가슴에 상처를 입은 그녀가 보다 건실하고 강한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서 진정으로 타산적인 결혼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모순과 아이러니는 드러난다. 그러나 만약 예브그라포비치가 지성과는 거리가 먼 부자이기만 했다면, 바랴가 그를 선택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을 때. 바랴의 성격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 또한 추론할 수 있다. 이것으로 그녀의 선택에 타산만이 개입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또 체호프와 쇼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보다 현실적인 주인공이라는 측면에서도 부각된다.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입으로 극작가들은 자신과 같은 사람은 주인공으로 삼지 않는다고 강변하는데, 이런 말을 통해서 작가는 자신이 전통적인 주인공들과는 다른 새로운 인물, 즉 자신의 힘으로 삶을 일구어 나가야 하는 평범한 여인을 주인공으로 삼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바랴는 자신이 캉디드와 같은 유산계급의 여인들이 알지 못하는 삶의 문제들을 안고 있으며, 현실 속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약자의 입장에서 강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강변하여, 사랑을 믿지 않는 자신의 입장을 변호한다. 삶이 몽상이 아니라 현실임을 아는 그녀는 사랑과 현실이라는 선택의 갈림길 사이에서 현실을 선택하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현실주의의 냉혹한 측면을 이해하기도 하는 인물이기도 한다. 그녀의 판단과 선택이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바랴는 이 작품에서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정당성이 부여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라는 점에는 의심할여지가 없을 것이다. 블라지미르는 바랴의 지적대로 아파트에서부터 시작하여 자동차까지 삶의 대부분을 부모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는 연약하기 그지없는 젊은 세대의 대표적인 인물로 나온다. 그러나 그러한 그에게도 항변할 여지가 있는 것이 현실 자체가 그로 하여금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고모와 마찬가지로 사랑이라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가 진실한 사랑을 믿고. 자신의 직업과 임무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건실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의 긍정적인 측면은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인물은 소련의 모든 젊은이들은 유약하기 짝이 없는 약자들이라고 보는 바랴의 생각이 잘못 되었음을 부각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그네사 빠블로브나는 바랴로 대표되는 세대, 즉 사랑을 믿지 않는 젊은 세대와 달리 사랑을 믿을 뿐 아니라 사랑을 숭배하는 사랑 지상주의자이다. 젊은 시절 뾰뜨르 예브그라프와 결혼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그를 떠나버린 그녀는 바랴의 사랑관이 지닌 타산성을 부각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자신의 사랑 지상주의로 인해 뾰뜨르 예브그라포비치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고. 뾰뜨르 예보그라포비치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 또한 바랴와 마찬가지로 이름 없는 젊은 연극학자보다는 미래가 보장 된 사람을 선택한 계산적인 여자이기도 했으므로 (설령 그의 생각이 오해였다는 것이 밝혀지기는 하지만). 그녀의 행동이 전적으로 옳았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다. 뾰뜨르 예보그라포비치는 아그네사 빠블로브나의 사랑 지상주의의 희생자로서 그녀의 사랑관의 어두운 측면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는 사랑으로 인해 미음에 상처를 입었지만, 여전히 사랑의 힘을 믿고 그와 동시에 외로움도 벗 삼아 살 줄 아는 저명한 연극학자이다. 뾰뜨르 예브그라포비치는 젊은 세대와는 다르게 자신의 인생을 노력과 인내, 의지로 개척한 나이든 세대의 대표자이며, 사랑에 상처를 입었지만 사랑을 믿고. 주변의 연약한 사람들을 능력이 되는 한 힘껏 도와주려고 노력하는 넉넉하고 너그러운 지성인이다. 동시에 그는 작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작가는 이 인물을 통해서 연극, 예술, 학문이 사람들에게 인생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투사시키고 있다. 이런 그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작가는 열여덟 번째 낙타에 대한 아랍인들의 우화를 사용한다. 결국 뾰뜨르 예브그라포비치는 바랴의 인생에 있어서도 열여덟 번째 낙타의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녀에게 사서자리를 알아봐 주고. 블라지미르와의 사랑에서도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주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모든 것을 너무 쉽게만 얻으려고 하는 소련의 유약한 젊은 세대들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아무리 삶이 현실이라 할지라도 진정한 사랑은 존재하며, 연극과 문학, 그리고 이들에 대한 학문이 사람들에게 열여덟 번째 낙타와도 같은 역할, 즉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작가의 생각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독자 혹은 관객. 아그네사 빠블로브나가 알게 된 사실을 블라지미르, 바랴, 뾰뜨르 예브그라포비치 순으로 알아 가는 과정으로 구성된 이 희극은 주인공들의 삶과 생각들이 잔잔하고 탄탄한 플롯의 구성을 통해 짜임새 있게 전달되고 있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무엘 알료쉰은 1913년에 태어났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1942년에는 희곡 「메피스토펠레스」를 썼지만. 극작가로서의 명성은 얻지 못하고. 1950년 「감독관」이라는 작품으로 세상에 알려진 극작가이다. 그가 쓴 희곡 작품들 대부분이 무대에서 공연되었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소비에트 시대와 소련 붕괴 이후 구 소련권의 대중들에게 사랑받은 극작가였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주로 현대사회가 지닌 도덕성의 문제.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갈등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작품 활동을 한 작가이다. 1983년에 쓴 그의 희극 「열여덟 번째 낙타」 또한 이러한 그의 관심을 잘 드러내주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구소련의 문학이 지향하는 사상성이나 정치성과도 거리가 멀고, 소련 현실의 어두운 측면을 고발하는 갈린과도 다른 순수문학 계열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등장인물은 소련 사회에서 지식인 계층에 속하는 연극학자. 지질학자, 패션디자이너와 이들과는 다른 평범한 민중 계층에 속한 시골 아가씨 바랴이다. 작가는 이들의 사각 관계를 통해서 1980년대 소련의 풍속도와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서로 다른 애정관, 삶께 있어서의 연극 혹은 학문과 문학의 의미를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