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마렉 플라스코 '제8요일'

clint 2024. 2. 6. 08:47

 


사랑하는 두 연인이 있다. 피에트레크와 아그네시카는 
공원이나 극장 같은 타인의 눈길에 노출되는 장소에서만 만나다, 
아무도 없는 둘만의 공간에서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한다. 
"아그네시카, 벽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두 몸을 가려 줄 장소가

왜 이리도 없을까? 단 둘이 일주일 만이라도, 

하루만이라도, 단 하루 밤 만이라도 함께 지낼 수 만 있다면." 
그는 수줍어하는 아그네시카를 어렵사리 설득해 하루 밤을 같이 보낼

생각으로 로만이라는 친구의 방을 토요일 저녁 동안만 빌리기로 한다.
토요일 저녁 6시가 되기를 며칠 동안 기다린 후, 가족들의 눈과

비밀경찰들의 눈들을 따돌리며 두 연인은 로만의 방으로 향하지만 로만은 

약속을 어기고 짙은 화장을 한 여자와 자기의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다. 
피에트레크는 절규한다. "우리를 벽으로 둘러싸 줄 조그만 방도 못 구하는구나. 
만약 로미오와 줄리엣이 1956년 이 바르샤바에 살았었다면 

그들도 우리와 같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장소를 갖지 못했을 거야." 
로만의 방을 등지고 계단을 내려오며 아그네시카는 생각한다. 
– 벽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면의 벽, 아니 삼면이라도 좋겠지? 
삼면이라도 방이 될 수 있을까? 그런 방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그런 방이 어디 없을까?

 

 


돌아오지 않을 첫사랑을 그리며, 매일같이 술독에 빠져있는 아그네시카의 오빠...
중병에 시달리며, 신경증 증세를 보이는 아그네시카의 어머니...
단 하루만이라도, 가족이라는 것에 해방이 되어, 낚시터에 나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하는 아그네시카의 아버지.... 

집에 와서도 마음 편할리 없는 아그네시카다.
삼면의 방도 찾을 길 없었던 두 연인은 휴일 날 

남들의 눈에서 멀리 떨어진 교외로 나가기로 한다. 
일주일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그 날은 비가 내렸다. 
2차 세계 대전 후 공산화 된 폴란드 바르샤바에서는 

더 이상 태양은 떠오르지 않고 모든 인간들의 정신적 자유와 

사랑까지도 억압하는 끝없는 이데올로기의 비만 내렸다. 
태양마저도 그들을 배신하자 아그네시카는 돌아오는 밤 거리에서 
오래전부터 계속해 자신을 유혹하던 길거리 불량배 중 한 명에게, 권력을 

등에 업고 방을 소유하고 있던 한 탐욕자에게 절망적으로 몸을 내버린다.
"내 이름이요? 아무렇게나 불러줘요! '내 사랑'이 좋을 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작은 태양'이라는 이름이 더 좋아요. 우리는 비오는 날 밤에 만났으니까요." 
태양마저 숨죽인 이데올로기의 숲속에서 아그네시카는 차라리 자신의 몸을 불살라 
맑은 날 빛나는 태양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폴란드의 작가 마렉 플라스코의 대표작으로 출간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켜 작가를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작품이다. 당시 작가의 나이 겨우 스물여섯. <제8요일>은 모든 인간들의 정신적 자유와 안식마저 빼앗긴 폐허 같은 바르샤바에서 목요일 낮부터 일요일 밤까지 불과 나흘 동안 평화와 안식을 갈망하는 청춘 남녀의 사랑을 통해서 바르샤바의 현실을 예리하고 심도 깊게 다룬 리얼리즘 작품이다. 작품은 게오르규의 <25시>처럼 제목부터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젊은 여대생 아그네시카와 그녀의 연인 피에트레크에게 있어선 ‘제8요일’이란 7일밖에 없는 일주일에서 얻을 수 없었던 그들의 소망을 이룰 수 있는 날을 의미한다.

 

 

 



폴란드 출신 작가 마레크 플라스코(Marek Flasko)의 소설 '제 8요일(The Eight Day of the Week)'은 24시간 밖엔 존재하지 않는 절망적인 현실에서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수 없어 꿈꿀 수 밖에 없는 비현실적 희망, 즉 절망의 역설적 시간처럼, 플라스코의 소설 '제 8요일'의 제목은 7일 밖에 없는 일주일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피에트레크와 아그네시카가 소망했던 요일, 즉 절망의 역설적 요일을 상징하고 있다. 플라스코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깐느 영화제에 출품되어 서방 세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이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결국 조국 폴란드에서 쫓겨나 서독으로 망명한다. 이 작품은 기로에 선 인간들의 운명을 니힐리스틱하게 묘사하여 삶의 심각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어 작품의 심도를 더해 주고 있다. 이 작품은 불과 128페이지 남짓한 분량밖에 안 되지만, 이 소설이 전세계에 일으킨 센세이션과 그 문학적 가치는 금세기에 나온 그 어떤 소설보다 깊이 있고 중량감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이 출간되자 뉴욕타임즈의 H.E 힐즈베리는 플라스코를 가리켜 “어두운 커튼의 울타리로 서방 세계와 분리된 동쪽의 허물어진 구릉을 불태우는 발랄한 문학적 재기의 소유자”라고 격찬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평론가 백철씨는, “이 작품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따라서 여기 현실문제로써 나타난 인간들의 고난은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운명의 상징이기고 하다. 두 남녀가 그렇게 찾아다니다가 실패한 벽이 있는 세 평의 방은 자유와 행복의 편린에 대한 최후의 희망을 의미한다. 그 점에 있어서 이 작품은 낭만적이기까지 했다”라고 격찬했다. 역시 평론가인 이어령 씨도, “영원히 박탈된 인간의 휴일, 이들의 가난한 소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선 새로운 또 하나의 요일이 있어야겠다. 이것이 바로 플라스코의 <제8요일>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을 읽을 때 분노할 것이다. 당신들은 인간의 비극도 또한 달라졌다는 것을 알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인간들이 원하고 있는 희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논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