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재창작 배삼식 '거트루드'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수많이 재생산되어왔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다.
<거트루드>는 이 <햄릿>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거트루드는 바로 햄릿의 어머니이다. 그동안 '햄릿의 어머니'로 명칭 되던 그녀는
극작가 배삼식에 의해 자신의 이름을 찾는다.
햄릿과 레어티즈의 검투에서 어떤 의지 없이 독배를 마시고 만 그녀는,
이제 살고 싶다는 욕망을 발화하는 주체로 태어난다.
이를 위해, 장소는 엘시노어라는 극장식 주점으로 치환되며,
클로디어스는 엘시노어의 현 사장으로, 거트루드는
엘시노어의 여주인으로, 폴로니어스는 엘시노어 밤무대 사회자로,
오필리어는 엘시노어 밤무대 가수로 재배치된다.
그리고 무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검투장면으로 시작된다.
아니, 검투가 시작이며 끝이다. '게임'으로 명칭 되는 이 검투는
비극으로 달려가고자 하는 남성들의 욕망의 산물이며,
거트루드가 철저히 거부하는 대상이다.
남성들이 협의한 '게임'에 그녀는 개입'되는' 것을 거부한다.
햄릿과 클로디어스와 레어티즈는 동생의 손에 죽은 아버지 햄릿의 죽음,
형수인 거트루드와 결혼한 동생, 이들의 사건에 연유되어 죽어간
폴로니어스와 오필리어의 죽음을 미화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영웅의 서사'로 마무리 지으려고 이곳에 모인 것이다.
이들의 시나리오는 이렇다. 햄릿과 레어티즈가 검투를 한다.
거트루드가 아들을 위해 건배를 하다가 독배가 든 잔을 들고 죽는다.
햄릿과 레어티즈도 독이 발린 검에 죽고, 클로디어스 또한 죽는다.
이러한 이들의 행위는 햄릿의 친구인 호레이쇼에 의해 기억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이 집안의 추악함은 은폐된다.
이를 위해서, 우선 거트루드가 독배를 마셔줘야 하는데,
그녀는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남성들의 입장에서는 애가 탈 일이다.
이들은 이를 위해서, 자존심 상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조차 감수한다.
결국 칼자루를 잡은 것은, 당신들의 목숨은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거트루드가 말했듯이, 그녀에게 있다.
그녀가 독배를 마시지 않는다면, 그들 또한 죽을 수 없다는 것이
이 '게임'의 룰이자 치명적인 약점인 것이다.

그들은 거트루드에게 '당신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강요하지만, 그녀는 '나는 나일뿐' 이라는 말로 응수한다. 그들은 그녀에게 '죽음'을 강요한다. 그들의 논리로는,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은 클로디어스가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형을 죽였으므로 그녀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녀는 그럼 어떤 여자가 강간을 당하면, 그것은 그 여자의 책임이냐, 라며 맞선다. 스스로 생각 없이 살아왔다는 거트루드는 '죽음'을 맞서면서, 삶에의 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재탄생한다. 이 삶에의 의지란 본능보다도, '죽음'을 강요하는 폭력의 거부라는 데 의의가 있다.
이들이 이렇게 티격태격하는 동안, 폴로니어스와 오필리어가 엘시노어에 돌아온다. 알고 보니 이들의 죽음은 죽음으로 오해했던 것. 이들의 생환은 레어티즈가 격투를 할 명분을 소거시키며, 이들의 '게임'은 이렇게 끝이 날듯 보인다. 이미 클로디어스가 형을 살인한 것도 쌍둥이 형에 의해 지워진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몸부림으로 밝혀진 뒤이다. (클로디어스는 이 행위에 대해 후회의 뉘앙스를 풍기며, 햄릿을 죽인 후 자신조차 '텅 비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 지겹고 피로한 죽음을 향한 게임은 여기서 그칠 것인가. 그러나 햄릿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이야기의 완성을 위해 폴로니어스와 오필리어를 죽인다. 이를 통해 지루한 게임은 재개된다. 결국, 비극에서 희극으로 패러디된 듯싶었던 작품은 다시 비극을 향해 치닫는다. 독이 묻은 손수건에 거트루드가, 레어티즈가, 햄릿이, 클로디어스가 차례로 죽음을 맞이한다. 모든 것이 종결된 시점, 거트루드는 그동안 독을 하도 마셔서 면역이 되었나보다, 란 우스우면서 우습지 않은 말을 하며 살아난다. 그러나 호레이쇼는 이 이야기의 완성을 위해 그녀를 산탄총으로 쏜다. 이야기는 완성된다.

<햄릿>을 거트루드의 입장에서 재해석한 점은 흥미롭다. 그녀의 거부행위는 그녀를 '햄릿의 어머니'가 아닌 '거트루드'라는 의지를 갖은 여성으로 태어나게 한다. 그러나 왜 나는 거트루드라는 이름이 아직까지 낯선 것일까.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거부했으며, 다른 이들이 모두 죽은 상황에서도 새 삶을 위해 엘시노어의 밖을 향해 가려고 하지만, 그것은 서술자인 호레이쇼에 의해 거세된다. 이런 그녀의 거부의 몸부림은, 이야기의 완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작가에 의해 추구되지 못하는 욕망으로 남는 것이다. 이것은 <패러디>의 한계일까, '큰 폭력을 멈추기 위해서는 작은 폭력(희생)이 필요하다'는 메시지 전달의 하나일까. 어쨌든 <햄릿>이란 서사에 여러 이야깃거리를 녹여낸 작가의 욕심이 여실히 드러나는 작품임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그 욕심이 지나친 나머지, 거부의 욕망을 갖고 있던 거트루드가 첫 남편인 햄릿을 큰 사람이라고 변론하며 폭력의 세계를 인정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모순적인 부분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또 한 가지, 우려의 목소리를 내자면, 주관적일지 모르겠지만, 연기가 아닌 텍스트에 집중하게 된다는 것은 자칫 공연에는 독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글 - 배삼식
"증오와 양심의 가책은 인류의 근본적인 두 적들이다"_스피노자 B.d. Spinoza
자유와 평화, 민주주의, 정의와 진리, 명예, 선(善)과 사랑, 성스러운 존재에 대한 믿음, 국가와 민족그리고 가족, 발전과 실용 대체로 가장 끔찍하고 야만적이며 대규모로 벌어지는 폭력은 이렇듯 아름다운 이름표들을 달고 있습니다. 저에게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이러한 종류의 폭력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떤 과정을 통해 정당화되는가를 가장 탁월하고 극명하게 보여주는 텍스트 중 하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아름다운 이름들 이 위협받을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가르쳐줍니다. 그 위협을 그대로 둔다는 것은 무책임하고 명예롭지 못한 일이며 너는 영원히 원한과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거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하나, 복수, 즉위협이 되는 대상을 완전히 제거, 말살해버리는 것뿐입니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도처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실육, 모든 종류의 마녀사냥' 은 이러한 가르침 에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길은 과연 그것뿐일까요? 그것이 과연 길이기는 한 것일까요? <거트루드>는 이러한 물음들을 담고 있습니다. 어쩌면 결국 우리는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폭력에 중독되어 있다면 그 중독된 상태를 찬찬히 들여다볼 수는 있습니다. 그 중독에서 벗어나려 애쓸 수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