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임선영 '작은 집을 불태우는 일'

clint 2024. 1. 27. 06:18

 

 

자신에 대한 의심으로 시작한 불씨는 집을 불태운다.

, 여왕벌은 집을 만들고

어린 장수 말벌인 89 90은 길러주는 엄마인 5를 통해

집에 대한 규칙을 배운다.

89는 자신들보다 오래 사는 꿀벌이 밉다.

시간이 지나 성년식이 다가오고,

8990은 성년식을 거쳐 집을 지키는 일과

집을 돌보는 일을 맡게 된다.

한편, 5는 성년식 동안 다른 뜻을 품는데....

 

 

 

장수 말벌의 세계에 빗대어 인간 세계의 다양한 화두들을 논의해 보려는 작품이다. 시적 언어와 소재의 선택은 흥미로웠으나, 전반적인 개연성이 부족하여 작품이 그려내고 있는 세계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가 인간중심 세계에 대한 은유로서만 쓰인 것인지, 혹은 인간중심 세계를 벗어나 장수 말벌인 비인간 존재세계 자체를 내밀히 비춰내기 위한 것이었는지 역시도 모호하였다.

 

 

작가의 말 - 임선영

 

이 이야기는 작년 봄에 쓴 시에서부터 시작했다. 여름이 다가와 말벌이 활동하기 시작해 민가에 있는 말벌집을 태우는 영상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시를 썼다. 인간들은 거리낌 없이 개미집을 나무 막대기로 들쑤시고 자신들에게 해가 된다는 이유로 말벌 집을 태운다. 우리에겐 누군가의 '', 소중한 보금자리를 태울 권리가 있는가?

등단 이후 '봄 작가, 겨울 무대'라는 사업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까 고민하다 시를 풀어 희곡으로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시를 희곡으로 풀어쓰기 시작하자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자신,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자 집에 대한 이야기다. 이야기를 쓰다 보니 말벌에 더욱 집중하게 됐다. 같은 꿀벌도 그리고 자신보다 작은 말벌(털보 말벌 등)도 잡아먹는 장수 말벌. 그 강력한 이미지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야기는 동족을 먹는 이야기에서 시작해 집을 불태우는 것으로 끝난다. 자신에 대한 의심으로 시작한 불씨는 집을 불태운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잡아먹을 권리가 그 타당성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장수 말벌에게도 그리고 인간에게도 유효하다. 높은 위치에 자리한 포식자에게 동족을 잡아먹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일상 속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을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전부인 집에 대한 존재가 흔들리는 만큼의 고민을 인간들도 할 수 있기를. 더불어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것들 속에 얼마나 많은 죄악이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길 바란다. 공연의 마지막 장면은 아주 작고 하찮은 말벌집이 타는 이미지로 끝난다. 이 장면을 통해 지금까지 아무것도 아닌 말벌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던 것이냐는 자조와 함께 아무것도 아닌 것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관객들이 말벌이라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곤충과의 대화를 통해 그로테스크함과 기괴함 그리고 무섭고 두려운 감정 을 가지고 나간다면 기쁠 것 같다. 이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인간을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을 의심하고 질문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임선영 작가

 

2023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 당선 [Bae]: Before Anyone Else 어느 누구보다 먼저>

직장인,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