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기 '저편에서'
이 대본은 실제 공연을 위한 공연모델로서 간주될 수 있다. 대본이 공연 자체는 물론 아니지만 연극공연이 갖는 실제적 제 구성요소를 가능한한 구체적으로 대본에 포함시킨다는 점에서 종래의 대사 위주의 연극대본과 차이가 있다면 있다. 물론 대사 이외의 연극의 구성요소를 대본에 구체화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또 그 필요성이 항상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사 본위의 대본을 작가나 연출가가 혹은 관객이 어떤 의미에서 절대화 하는 경우, 현실의 따라서 연극의 문학적 해석을 절대화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둘째로 대사가 생략 혹은 부재 된 상태의 많은 연극적 상황 등이 단지 연극 대본의 기술적인 형식문제로 인하여 구체적 표현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점에서 공연 모델로서의 대본은 실제 공연의 1회성과 구체성을 더 분명히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연극을 '본다'는 행위는 현실을 본다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총체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본다'는 행위를 통하여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현실 해석의 문제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 성을 같이 본다는 점이다. 바로 이러한 해석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에 우리는 이 해석된 현실이 희극으로도 또 비극으로 간주될 수 있음을 본다.
작가의 글 - 홍성기
사진을 찍을 때 피사체와 카메라 사이의 거리가 촬영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듯이 한 대상이나 사건을 '보기' 위해서도 거리는 필연적 요구사항에 속한다. 여기서 거리한 물리적 거리를 뜻할 뿐 아니라 정신적인 거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마당국과 무대극의 형식에 대한 논쟁에 있어서 무대 형식의 야적으로 지식 받아왔던 관객과 무대 사이의 거리를 다시 성찰해 보고 싶은 생각에서 이 연극을 구성하게 되었다. 무대극은 일반 보는 연극이다. 그렇다면 현실을 보고 또 연극을 본다고 했을 때 '본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문학과 철학, 혹은 기타 자연과학에 있어서 객관식 현실이란 말은 수천 년간의 논쟁의 초점이 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현실의 ‘객관적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입상과 현실은 어차피 주관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동일시되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현실해석'과 '현실을 본다'라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현실을 본다'라는 것은 특정한 시점에 묶여 있는 해석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정치적· 문화적 시련기에 있어 왔고 이러한 시련 자체는 현실을 한 시점에서만 해석하는 방식에 익숙하도록 우리를 조련 시켜 왔다. 다시 말해서 '본다'라는 개념보다는 일단 '해석'이 전면에 등장하여 사물을 왜곡시키는 것을 문제시 삼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다. 하지만 무대극에서 '본다'라는 것은 몇몇 도덕적· 정치적 입장을 위한 의미에서 본다는 것이 이 연극을 구상하면서 남을 의식하기 보다는 나자신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나 자신의 모습을 더 정확하는 나를 '저편에서’ 바라보는 나의 입장을 볼 때 느끼는 것은 의식의 분열이라기 보다 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연극에서는 배우가 자신을 노출하는 것을 업으로 하듯이 작가 역시 자신의 아픈 곳을 노출하는 것을 생명으로 한다. 보고 또 보이는 이 과정이 이 연극에서 관념적 울타리를 넘어 구체화된다면 무대극의 '본다'라는 것은 사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아주 기본적인 요소임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