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로이 존스 '덧치맨 (Dutchman)'
미국 희곡중 흑백문제를 가장 강렬한 터치로 표현한 작품으로 이 덧치맨을 꼽는다.
5,60년대의 흑백문제는 지금 돌아보면 심각한 상황이었고
흑인 작가인 르로이 존스는 그런 갈등을 짧은 중막 정도의 시간에 표현하였다.
국내에서는 1977년 창고극장에서 한태숙연출로 공연되었는데 루라 역에 가수
한영애가 출연하였고 한상철씨가 번역했으니 한씨 전성시대였던것 같다.
바라카의 가장 잘 알려진 극 '덧치맨'은 뉴욕지하철에서
클레이라는 흑인 남성과 룰라라는 백인 여성의 대면을 다루고 있다.
룰라는 흑인 남성에 대한 백인 여성들의 편견, 그리고 흑인 전체에 대한 백인의
피상적인 지식을 대변한다. 그녀는 모든 흑인남성들이 백인여자에게 호감을
갖고 있으며 그들이 모두 "중산층의 가짜백인”이 되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흑인 남자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겉은 초콜렛 색 과자이지만
안에는 흰 크림이 들어있는 "오레오 쿠키”(Oreo cookie)이다.
그녀가 잠든 흑인의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 극에서의 그녀의 역할은 이중적이다. 그녀는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모욕, 욕설, 유혹 들의 전략을 사용한다.
1장에서 그녀는 클레이를 육체적으로 유혹하지만 곧 그로
하여금 자신의 남성다움의 진실을 직면케 한다.
처음에 룰라의 숨은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던 클레이는 2장에 가서
룰라의 모욕이 그를 궁지에 몰리게 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한다.
"너는 깜둥이가 아니야. 그저 더러운 백인일 따름이야. 너는 백인을 두려워하고 있어. 너의 아버지도 그랬고. 두꺼운 입술을 가진 엉클 톰 같은 녀석” 이라는 그녀의 모욕은 백인의 편견을 대표하면서 흑인의 의식을 자극하는 이중적인 효과가 있다. 한편,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 자신을 깨닫게 하는 전략은 에드워드 올비의 '동물원이야기'를 연상시킨다.
그의 이름이 상징하듯이 흑인을 대표하는 인물(Everyman)이라고 할 수 있는 클레이 또한 백인의 생활양식을 모방하고 싶어 하는 속물적인 흑인을 대표하면서, 동시에 흑인들의 예술적인 동기를 대변하는 이중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는 룰라가 첫눈에 알아볼 수 있는 타입이다. 그녀는 그의 백인 행세를 놀리며 "이렇게 더운 날씨에 그 자켓과 타이는 무엇 때문에 걸치고 있는 거지?... 그래, 어깨가 좁은 그 양복은 너희들이 억압을 당해야 했던 전통에서 나온 거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룰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백인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이렇게 얌전하고 속물적인 모습 저변에 억압되어 있는 파괴적 속성이다. 클레이는 "너는 겉으로 보이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몰라. 너는 하나의 행위. 거짓말. 속임수만 볼뿐이지. 순수한 심장. 펌프질하는 검은 심장. 그것을 너는 몰라”라고 말하며 흑인들이 개화된 생활 방식을 따르고 점잖은 옷을 입고 예술적인 성취를 추구하는 것이 살인적인 욕망의 승화라고 설명한다. 흑인들이 예술적 매체를 통해 좌절을 표현하지 않으면 찰리 파커 (Charlie Parker)나 베씨 스미스(Bessie Smith)나 "검은 보들레르”라는 별명이 붙은 클레이 자신도 파괴적이 될 것이며 재난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은 네 목을 잘라서 도시 끝까지 끌고 다닐 거야. 그래서 살점이 뼈에서 떨어져 나오겠지. 깨끗하게.” 클레이는 바라카의 예술적 입장의 대변자인 것처럼 보인다.
바라카는 이 극의 상징적인 차원을 제공함으로써 주제의 의미를 확장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첫 번째 상징은 룰라가 지하철에 올라타면서 사과를 먹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에덴동산이 아니라 덥고 답답한 여름철의 뉴욕 지하철이라는 무대에서 흑인 남성의 대표인 클레이를 유혹하는 이브의 역할을 맡는다. 이들의 만남 자체가 신화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미국 사회에서의 백인여성과 흑인남성의 대면이 두 상징적 체계의 충돌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극의 제목인 '덧치맨'(Dutchman)은 생중사의 승무원을 태우고 영원히 항해하도록 운명 지워진 "방랑하는 화란인”의 전설에서 원용해 온 것인데 이것은 흑인들이 백인들의 편견에 계속해서 끌려 다닐 경우 영원히 “도시의 밑바닥을 날아다닌다.”고 묘사되는 지하철은 계속 운행될 것이며 클레이와 같은 희생양은 계속 나오게 될 것이라는 것을 상징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이 극의 순환적 구조에 외해 더욱 더 강화되고 있다.
극의 시초에 클레이와 룰라가 처음 대면할 때는 보이지 않던 승객들이 2장이 되면서 점점 많이 타게 되고 클레이가 죽자 룰라의 지시에 따라 그의 시체를 버린 후 다음 역에서 모두 내린다. 룰라는 노트에 뭔가를 적어놓음으로써 한 가지 임무를 완수하고 다음 임무를 기다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다음 역에서 또 다른 흑인이 타고 똑같은 장면이 연출될 것을 우리는 기대 할 수 있다. 두 종족 간에는 좁혀질 수 없는 갭이 있으며 기차가 인간 역사의 어두운 터널 속을 계속해서 운행하는 동안 흑인들의 분노는 계속해서 기적처럼 울려 퍼질 것이라는 것을 이 작품은 암시하고 있다.
아미리 바라카 (르로이 존스) Amiri Baraka (LeRoi Jones)
아방가르드 시인에서 실험 연극 극작가로, 거기서 흑인 국수주의 (Black Nationalist) 극작가로, 그 다음에는 막시스트 - 레닌주의자로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해 온 아미리 바라카는 현대 흑인 연극의 역사를 대변해주는 극작가이다. 1934년 뉴저지 주의 뉴왁에서 르로이 존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는 1954년에 하워드 대학졸업 후 그리니치빌리지로 옮겨 그 당시 미국 시단을 이끌어나가던 비트 제너레이션의 시인들과 교유하며 실험적인 시를 써나갔다. 헤티 코핸(Hettie Cohen)이라는 유태계 백인 여성과 결혼하여 잡지편집자, 비평가, 시인으로 활약하며 흑인계 미국인 음악 문화에 관심을 보여 오던 그는 흑인문제가 사회의 주된 쟁점으로 부각하자 더 이상 미학적인 영역에만 머물러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앨라배마와 아칸소 들지의 남부에서의 흑인 구타와 탄압 등 미국 사회에서 더욱더 격렬해져 가는 폭력 양상의 목격과 1962년의 쿠바 방문은 르로이 존스로 하여금 미국 자본주의 체제의 억압에 대한 반기를 들게 만들었다. 그는 특히 쿠바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목격하였고 이것은 그가 후기에 들어서면서 극좌로 방향을 선회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침례' (The Baptism), '덧치맨'(Dutchman)과 같은 그의 초기작품은 유럽의 영향을 받은 부조리 계통의 실험적 전통으로 쓰여 진 극이며 주로 백인관객을 겨냥하여 오프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었고 특히 '덧치맨'은 오비 상을 그에게 안겨 주었다. 그러나 흑인 무슬림 쪽으로 점점 경도된 존스는 1965년에 그리니치빌리지를 떠나 할렘으로 활동영역을 옮기고 백인 아내와도 이혼하였다. 그곳에서 '흑인예술레퍼토리극단'Black Arts Repertory Theatre을 창단한 그는 흑인들의 커뮤니티에서 흑인들을 위해 공연하였고 흑인 아내와 결혼한 후 자신의 이름을 아미리(“왕자”라는 뜻) 바라카("축복 받은 자”)로 고쳤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뉴왁으로 돌아가 여러 흑인 운동 그룹의 중재자로서 활동하면서 젊은 흑인 극작가와 시인을 발굴하고 키우는데 앞장섰다. 뉴왁에서 흑인 시장을 선출하는 데 적극 앞장선 바라카는 그 과정에서 흑인들 간의 분열과 흑인들이 취한 미국식 자본주의 정치 행태에 환멸을 느끼게 되고 또 한 번의 변신을 거듭하여 막시스트 레닌주의자의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 후의 바라카는 극작가로서보다는 공산주의자보시의 이론 올 선전하는데 더 비중을 두었다. 그의 예술적인 재능은 흑백논리 식의 선전 극을 쓰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고 빅스비는 그의 변신을 다음과 같이 애석하게,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 논평하고 있다. '미국 연극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고 위트와 신랄한 언어로 한때 연 극계의 평정을 뒤흔들어 놓았던 사람이 지금은 공장 문 앞에 서서 노동자들에게 팜플렛을 나누어주고 있다. 물질주의 사회가 줄 수 있는 이익에 대한 그 노동자들의 관심은 그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위협 한다고 생각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적대감에 필적할 뿐이다.'
그가 핸즈베리나 제임스 볼드윈과 다른 점은 중류 계층의 흑인들의 모습을 사실주의적인 거실 코미디의 전통으로 다루기보다는 폭력과 행동을 통한 혁명을 부르짖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변신하기 전에 쓴 초기 극에서도 결말은 항상 주인공의 희생으로 끝나고 있다. 특히 국수주의적인 극들에서는 아프리카의 제의에서 빌어온 극적 형태를 통해 결말에서 항상 누군가를 희생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어서 바라카의 비평가들은 그가 미국 사회에서 비난하고 있는 폭력과 인종차별주의를 무대에서 그림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영속화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바라카에게 있어서 연극은 흑인에 대한 백인들의 편견을 공격하는 정치적 무기일 뿐만 아니라 흑인들의 잠들어 있는 의식을 깨우기 위한 도구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극은 희생자를 보여줌으로써 관객 속에 있는 그들의 형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바로 희생자의 형세, 그리고 피를 나눈 형세들 이라는 점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