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아구 호드리게스 '소프루'
<소프루>는 2017년 7월 7일, 아비뇽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카르무 수도원Cloitre des Carmes에서 포르투갈어로 공연되었다. 한국에서는 2021/2022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 해외초청 작으로 2021년 6월 17일~6월 19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이 희곡은 안토니우 파트리시우의 <디니와 이자벨>, 안톤 체호프의 <세 자매>, 장 라신의 <베레니스>, 몰리에르의 <수전노>,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담고 있다.
연극 '소프루'는 무대 왼쪽과 오른쪽 구석, 중앙 앞 아래, 혹은 뒤쪽에서 배우들에게 대사나 동작을 작은 소리로 일러주는 '프롬프터(prompter)'라는 직업을 중심으로 다룬다. 국내의 경우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전통을 따르고 있는 유럽 연극 무대나 오페라 극장들에서 아직까지 현존하는 '프롬프터'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거의 멸종위기에 처한 직업이라 할 수 있다.
프롬프터는 공연이 아무 문제없이 매끄럽게 진행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세부사항과 동선, 사운드, 조명, 장면전환을 모두 꼼꼼하게 기록한 '프롬프트 북'을 손에 들고 검은 색 작은 프롬프트 박스 안에 들어가 관객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존재를 감춘다. 하지만 배우가 대사를 갑자기 잊어버리거나 타이밍을 혼동한 경우, 혹은 동작을 잊은 순간에 속삭임으로 빠르게 연극에 ‘숨’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한다.
연극 '소프루' 공연장면. 연극 '소프루' 공연장면. 현재까지 44년 동안 리스본에 위치한 도나 마리아 2세 국립극장의 프롬프터(prompter)로 일하고 있는 실제 '크리스티나 비달(Cristina Vidal)'의 모습. 크리스티나는 공연의 마지막 결말을 완성하는 장면에서 라신 '베레니케'의 7줄의 대사를 읽어내려갈 때까지 무대 위에서 속삭임으로 다른 배우들의 귓가에 '숨'을 불어넣는 프롬프터의 역할만을 한다. 호드리게스는 포르투갈에 현존하는 마지막 프롬프터인 ‘크리스티나 비달’을 실제로 무대 위에 등장시켜 그녀의 이야기를 다루는 연극 제목에 ‘숨’이라는 뜻의 포르투갈어 '소프루(sopro)'를 적용한다. 'sopro'는 속삭이듯 배우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게 대사를 말하는 프롬프터의 일을 의미함과 동시에 무대 위 인물이 갑자기 자신의 길을 잃고 멈추거나 죽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연극에 ‘숨’을 불어넣는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 연극 '소프루'는 현재까지 44년간 도나 마리아 2세 극장에서 프롬프터로서 일을 해 온 크리스티나가 어떻게 연극 무대에 올라 실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었는지를 현재 예술감독인 ‘나의 예술감독’이 등장하는 큰 틀을 바탕으로 전개한다. 호드리게스를 의미하는 '나의 예술감독'은 자신의 존재를 감춰야만 존재의 의미가 생기는 프롬프터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일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맡은 일을 해나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빛이 드리워지지 않는 그림자 속에서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을 향한 '헌사'이자 '오마주'라는 점을 강조한다. 화려한 조명이 비춰지는 가운데 자신이 한 일이 드러나 모두에게 박수를 받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무언가를 완성하기 위해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드러나지 않는 곳에 있지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능을 하는 사회 속 곳곳의 사람들, '소프루'는 그런 사람들에게 바치는 찬사이자 감사이며, 그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필요를 강조하는 연극이다.
‘나의 예술감독’이 커피 9잔을 마시며 긴 시간 크리스티나를 설득하는 가운데 크리스티나는 5살 때 처음 고모의 손에 이끌려 무대 구석에 위치한 작은 프롬프터 박스 안에서 연극을 관람했던 과거를 말하기 시작한다. 연극은 크리스티나의 과거의 기억들을 중심으로 21세 때부터 프롬프터로서 극장에서 일하게 되면서 공연 중에 겪었던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나열한다. 프롬프터가 기억하는 배우들의 모습은 옆모습이나 뒷모습, 엉덩이 등이 대부분이며, 무대 아래에 위치한 프롬프트 박스에서 두 개의 손가락만을 살짝 얹고 프롬프트를 했던 것 외에는 무대에 오른 적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무대 위가 낯설다.
객석도 무대도 아닌 경계에 있지만 공연이 위기에 처하는 순간, 연극이라는 ‘환상’이 깨지지 않도록, 끝까지 지속될 수 있도록 작은 목소리로 ‘숨’을 불어넣는 구원자! 하지만 프롬프터의 존재가 객석에 드러나게 되는 순간 공연은 ‘실패’이자 ‘재난’이 된다.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배우를 향해 반복적으로 대사를 속삭이던 크리스티나는 들리는 귀를 향해 대사를 전달하려고 이리저리 움직이던 끝에 결국 관객들 모두에게 노출되고 만다. 객석은 웃음으로 채워지고 비평가는 그 날 공연의 가장 큰 수훈자로 ‘프롬프터’를 칭송하지만 크리스티나에게 그 기억은 끔찍한 좌절과 절망의 순간일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무대 위에 등장하는 실제 크리스티나의 역할이 계속 배우들 뒤를 쫓아다니며 프롬프트를 하는 일에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예술감독’이 크리스티나를 연극 창작에 동의하도록 설득하는 이야기라는 큰 틀 속에 펼쳐지는 프롬프트 과정의 에피소드들은 극장에서 공연되었던 여러 고전 작품의 연극 장면으로 나열되는데, 현재 혹은 과거의 에피소드 속에 등장하는 크리스티나의 역할을 하는 배우들은 따로 존재한다.
크리스티나와 똑같이 검은 옷을 입은 2명의 배우들이 번갈아가며 크리스티나의 역할을 하고, 실제 프롬프터인 크리스티나는 그들 뿐 아니라 나의 예술감독, 이전 예술감독, 연극 장면에 등장하는 여러 배우들을 프롬프트하며 따라다닌다. 단지 그녀의 위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벗어나 배우들과 함께 ‘무대 위’에 서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로 인해 관객들은 연극 초반에 혼란을 느끼지만 실제 프롬프터인 크리스티나의 존재가 보이는 가운데 그녀가 속삭이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혹은 바람소리처럼 극장의 공간을 가득 채우기 때문에 그녀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인지한 채 공연을 관람할 수 있게 된다. 즉, 무대는 허구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환상임과 동시에 실제이고, 관객들은 프롬프터가 하는 일을 목격하고 연극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인식함과 동시에 크리스티나의 이야기라는 허구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된다. 연극 '소프루'의 극작 및 연출을 맡은 호드리게스는 프롬프터인 크리스티나가 무대 위에서 자신이 하는 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역할을 하도록 하면서도 주인공으로서 충분히 각인되도록 만든다. 연극에서 가장 오래도록 잔상이 남는 부분은 시종일관 바람소리처럼 들리던 크리스티나의 ‘속삭임’이다. 사실 크리스티나가 2년간 거절해 온 연극 제안을 결국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녀가 우연과 운명을 믿기 때문이었다. 연극 '소프루'에서 크리스티나는 “나는 세상을 연극을 보듯 바라본다”라고 말한다. 프롬프터로서 허구와 현실 사이에 드리워진 가는 경계에 서서 무대 위에 지속되는 환상을 조심스레 지켜보는 관찰자는 환상에 빠져드는 관객들과 연기에 몰입하는 배우들 사이에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기민함을 유지한다. 그녀가 ‘극장의 기억’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작업한 모든 작품의 대사와 움직임, 공연을 위한 세세한 관련사항들이 그녀의 기억 속에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며, 사라져가는 프롬프터라는 직업이 연극이라는 예술의 위기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아주고, 시간 속에 서로를 연결하며, 죽음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 맞서 싸워나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계속 살아나가기”를 선택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오랜 시간 듣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는 시대에 연극이 공연되는 극장이 살아남아야 할 이유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보이지 않는 곳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오랜 인류의 문화와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그로 인해 우리가 서로 다 같은 인간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기 위해, 우리에게 연극이라는 예술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번역자의 작품해설
티아구 호드리게스의 《소프루》는 《소프루》의 아름다움은 연극의 본질로 돌아간 시적 언어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겠다. 연극의 언어는 '파롤parole, 말'의 형태로 존재한다. 연극이라는 행위는 내적· 정치적 선언이고(물론 연극의 본성은 정치적이지만, 그것이 언제나 정치적 행위로 해석되진 않는다), 그 선언의 도구는 파롤- 무언을 선택하는 것도 일종의 '말'이라 할 수 있다-이다. 말은 씨앗처럼 흩어지고 나그네처럼 유랑하며 공기처럼 존재하는 것. 바로 떠다니는 말에 구체적인 형체를 부여하여 발화하게 하는 것이 연극에서 작가와 연출가, 배우가 해야 하는 일이다. 티아구 호드리게스는 '말하게 하는' 연극의 본질에 충실했다. 연극의 시초부터 극장은 발언권을 주는 장소였고, 로드리게스의 극장에서는 가장 작게 말하는 사람, 프롬프터에게 그 권한이 부여됐다. 연극 <소프루>의 무대는 프롬프터의 말을 전하는 곳이다. 프롬프터의 말은 극장의 기억이고, 극장의 기억은 곧 연극이니 이 무대에서 발언하는 것은 연극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연극이 말하게 하기 위해, 연극에 발언권을 주기 위해 프롬프터의 말을 빌린 것이다. 그렇다면 왜 프롬프터였을까? 이 질문에 답을 찾는 과정이야 말로 이 작품을 즐기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포르투갈어로 소프루는 '숨'이라는 뜻이고, 프롬프터는 소프라도르, 숨을 불어넣는 사람으로 해석된다. 무대 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배우에게 대사나 동작을 일러주는 사람, 현실의 둑과 허구의 둑을 잇는 다리에서 사는 사람, 세상과 무대를 가르는 말의 유수 속에서 헤엄칠 줄 아는 사람, 속삭이는 사람, 구하는 사람, 다시 말해 살리는 사람. 《소프루》는 범람하는 현실에 천천히 침식하는 연극을 살 리고자 하는 소생의 의지가 아닐까. 이 글에서는 프롬프터의 말이 텍스트가 되고, 다시 텍스트에 프롬프터의 숨이 더해져 하나의 발언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프롬프터의 말이 속삭임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극은 오랫동안 '내지르는' 과장된 언어를 사용한다는 오해를 받아왔고, 그 지나침이 연극이 가진 시적언어의 아름다움을 해한 것 또한 사실이다. 티아구 호드리게스는 그 과장을 배제하고, 속삭임을 이용해 연극적 언어에 시적 숨을 불어넣었다. 사실상 연극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시(서사시)가 있었고, 시는 본디 말과 숨의 예술이 아니겠는가. 프롬프터가 배우의 대사에 숨을 불어넣듯 호드리게스 역시 연극에 본연의 숨을 불어넣었다.
숨,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지 《소프루》를 통해 배운다. 숨은 태어나게 하는 것, 일으키는 것, 움직이게 하는 것. 그것은 끝의 반대이고, 폐허의 희망이다. 이제는 사라진 직업, 리스본 국립극장에 마지막 남은 실제 프롬프터, 크리스티나 비달이 연극 <소프루>의 프로타 고니스트가 되어 태어나게 하는 사람이자 일으키게 하는 사람으로 폐허의 희망이 된 것만으로도 이 연극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로 충분하다. 우리는 모두 소멸의 운명을 지녔 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각과 싸우기를 원하니까. 기억하기를 희망하니까. 우리가 발견한 진실이, 우리가 만난 아름다움이 숨에서 숨으로 전해지길 원하니까. 피터 브룩은 연극의 진실이 나의 이야기라고 설득될 때, 연극과 삶은 하나가 된다고 말했다. '끝을 말하지 않기, 죽지 않기, 살아가기'를 말하는 《소프루》의 진실과 만난 순 간, 나는 빈 극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거기서부터 믿음의 방향을 다시 정할 수 있었다. 지금 나는 당신을 이 빈 극장으로 초대하고 싶다. 이곳은 시간과 기억과 끝나지 않으리라는 희망이 자라는 폐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보자. 이 숨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소프루》가 허망한 허구가 아닌, 우리를 일으키는 진실이 되리라고 믿는다.
(Tiago Rodrigues)
1977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배우, 극작가, 연출가로 활동하면서 2003년 극단 ‘문두 페르파이토’를 설립, 20여 개국에서 약 30회의 공연을 선보이며 명성을 쌓고 있다. 2015년부터 2021년까지 리스본 도나 마리아 2세 국립극장 최연소 예술감독으로 활동하였고, 2022년에는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 예술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대표작으로 〈소프루〉 〈그녀가 죽는 방식〉 〈창문이 열리려면〉 〈기억하여〉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등이 있다. 문학적 상상력과 시적 언어를 바탕으로 전 세계 관객들에게 긴 여운과 감동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