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구니오 '옥상 정원'
<옥상 정원>은 빈익빈 부익부 사회를 살아가는 부부 이야기이다
성공의 가도를 달리는 여유로운 부부,
일찍이 예술의 길에 뜻을 두었으나 겨우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부부,
학창시절 친구인 두 남자는 각자의 아내와 함께
도심 어느 백화점 옥상에서 오랜만에 예기치 않은 재회를 한다.
두 사람은 오랜만의 재회를 서로 기뻐하며 근황을 이야기하게 되지만,
경제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성공한 부유한 부부와
미래의 예술가를 꿈꾸지만 현재는 일이 없어 아내의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먹고사는 가난한 부부의 대화는 점점 더 어긋나고 어색해져 가는데......
<옥상 정원>은 인간 이면의 겉치레, 허영심, 질투, 욕심, 자격지심, 비굴함 등의 심리를 묘하게 어긋나는 일상 대화 속에서 드러날 듯 드러나지 않고, 드러나지 않을 듯 드러나도록 표현한 작품이다. 물론 부자와 빈자라는 상반된 인물 설정이 주는 극적 재미도 있지만, 자칫 잘못해 이를 선과 악이라는 전형적이고 평면적인 캐릭터로 해석해 우스꽝스러운 재미를 부각한다면 관객이 그날 한 번 웃고 잊어버리는 수준의 질 낮은 코미디가 되어 버리고 말 위험성이 있다.
오랜만에 만난 학창시절 친구 둘, 오늘 처음 인사하는 둘의 아내, 옷차림에서부터 차이 나는 두 남녀, 가진 남자가 못 가진 남자에게 식사 자리를 제안한다. 선뜻 응하기도, 거절하기도 애매한, 참으로 데면데면하고 어색한 상황이다. 여성들의 묘한 경쟁심, 소리 없는 자존심 싸움이 오가는, 이 작품 전체 분위기가 반영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나미키가 백화점 층수를 세어 올라가면서 자신의 지위가 점점 더 올라가는 밝은 미래를 상상하다가 4층에서 바로 현실을 깨닫고 꿈꾸는 걸 포기하는 씁쓸한 장면도 있다.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의 내적 욕망과 이기심, 상대적 박탈감, 자기 방어적 자존감, 예술계 사람들과의 애증관계 등을 보여 주는 장면은 문학에서뿐 아니라 예술가라는 꿈을 가지고 일을 시작했고 현재도 지속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의 자존심과 냉정한 현실이 만나는 지극히 인간적인 장면이다.
1926년 5월 10일 《도쿄니치니치 신문(東京日々新聞)》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게재된다.
“마츠야 9층 망루에서 뛰어내리는 참사 행락 대낮의 번화가, 긴자 가두에서 실업청년이 아버지와 형을 원망하며 자살. 9층 옥상에서 뛰어내린 자살이라는 이유로 고층 빌딩 최초의 투신자살로 불린다.고층 빌딩 투신자살 제1호가 옥상 정원의 일시 봉쇄를 알렸다."
<옥상 정원>은 기시다 구니오 희곡 중 사회상을 반영한 몇 안 되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1920년대 초중반인 다이쇼 시대 도쿄 긴자의 마츠야(松屋) 백화점 9층 옥상이 무대다. 기사를 보고 작품을 쓰게 되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극중인물 미와(三輪)가 백화점 옥상에서 뛰어내린 사람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작품은 시작된다.
<옥상 정원>은 1926년 《연극신조》지 11월 호에 처음 발표되었다. 1927년 1월, 신고쿠게키(新国劇)이라는 극단에 의해 초연된다. 기시다 구니오는 신고쿠게키의 초연을 보고 1927년 2월 《연극신조》지에 공연이 본인 생각과 얼마나 괴리가 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게재했다.
"제가 오늘 신고쿠게키 무대를 보고 가장 먼저 느낀 건 이 극단이 아마도 어떤 변화하는 관객 취향에 대해 안타까울 정도로 신경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이러한 시선은 관객에게 어떤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겁니다. 그러나 이 동정심이야 말로 바로 관객을 예술과 절연하게 한다는 우려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작가가 연습에 참관하지 않으면 작품이 무대 위에서 얼마나 변형되는지, 이제와 처음 느낀 것도 아니지만, 그 변형이 연출자의 예술적 의식에 따른 것이 아닐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느냐 하는 겁니다. (중략) 한번 그 작품을 활자로 읽으신 분이라면, 사와다 씨(나미키 역을 맡은 배우 이름)는 작가가 고심해서 쓴 대사에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알 수 있겠죠. 둔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말입니다. 셋째, 그 연극을 보고 재미있다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요. 그렇다면 그건 확실히 사와다 씨를 비롯한 연기자 들의 천부적 매력 또는 현재까지 갈고 닦은 실력 덕인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연극을 보고 재미없다고 말할 사람들 중에는 앞으로 신고쿠게키라는 극단에 신세를 져야 할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걸 명심하고 말조심해 주셨으면 합니다." (1월 14일 밤)
기시다 구니오(岸田國士, 1890∼1954)
일본의 극작가, 연출가, 소설가, 번역가, 평론가 등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일본 연극계에서는 일본 근대극(新劇)의 창시자, 근대 희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와카야마현 사무라이 계급 후손이었던 부친 뜻에 따라 1904년 15세 나이로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1907년 육군사관학교 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장자크 루소, 샤토브리앙 등 프랑스 문학에 흥미를 느낌과 동시에 군대 생활에 대한 염증과 반발로 탈영을 시도하거나 일부러 시험에 백지를 내기도 한다. 사관학교 졸업 후 육군 소위로 임관하지만 1914년 독일전쟁 사단 동원령을 계기로 군대 생활에 더더욱 염증을 느끼게 되면서 휴직계를 제출하고 도쿄로 상경해 1917년 28세에 동경제국대학 불문과에 입학한다. 1919년 8월, 프랑스 연극에 관심을 갖고 프랑스 유학을 떠난다. 파리 주재 일본대사관, 국제연맹사무국에서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프랑스 연극사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소르본대학 르퐁 교수 소개로 자크 코포를 만나 그가 대표로 있는 뷔에콜롱비에 소극장에서 연극을 배운다.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급히 귀국한다. 프랑스 유학 시절에 썼던 〈노란 얼굴의 미소〉를 고쳐 1924년 〈낡은 장난감〉이라는 제목으로 《엔게키신쵸(演劇新潮)》지 3월호에 발표한다. 같은 해 9월에는 유럽 알프스산맥 동부 지역 티롤의 어느 호텔에서 만난 일본인과 국적 불명 외국인의 격정적 사랑 이야기인 〈티롤의 가을〉, 1925년에는 일요일 오후 신혼부부의 일상 대화로 이루어진 스케치극 〈종이풍선〉 등을 발표하면서 말의 뉘앙스를 중시했던 프랑스풍 심리극의 독특한 분위기로 연극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며 새로운 조류를 몰고 온 신진 극작가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1929년 오사나이 가오루가 죽자 그가 이끌던 일본 근대 연극의 산실 축지 소극장이 해산된다. 이때부터 기시다 구니오는 일본 근대극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한다. 《비극희극》, 《극작》 등의 연극 잡지를 펴내며 다나카 센카오(田中千禾夫), 고야마 유지(小山祐士), 모리모토 가오루(森本薫) 등 수많은 극작가를 소개하고 배출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 군부에 전선에서 공연하는 이동형 연극단을 제안, 위원회를 만들고 문화부장에 취임해 1942년까지 이동극단을 이끈다. 그것이 대정익찬회(大政翼賛会)라는 우익 단체다. 1950년 기시다 구니오는 문단과 연극계를 연결, 일체화해 새로운 문학을 만들어 내려는 문학입체화 운동을 주창하며 ‘구름의 회합’이라는 단체를 결성한다. 1954년 3월 4일, 막심 고리키의 〈밑바닥에서〉를 연출하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도쿄의대부속병원으로 옮겨졌다가 다음 날 아침 향년 63세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