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미야모토 겐 '아름다운 자들의 전설'

clint 2023. 10. 22. 09:35

 

 

우리에겐 식민지로 기억되는 다이쇼 시대(1912~1926).

그러나 이 시기는 일본 근대사에서 빛나는 청춘시대로 비유되곤 한다.

일본제국 헌법이 공포되고 일간신문이 100만부 이상 발행되었으며,

최초로 자동차가 등장하는 등 정치와 문화의 전성기였다.

도로와 교통기관이 근대적으로 정비되면서 도쿄, 오사카, 고베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피어난 대중문화가 전국으로 파급되기 시작했으며,

마쓰이 스마코의 <카추샤의 노래>를 시작으로 대중가요가 탄생했고,

노나 가부키, 분라쿠, 신파극과 신국극 등 일본의 전통연극에 서양연극을 도입한

신극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쇼와 시대 예능계 발전의 기초가 되는

배우, 가수 등의 새로운 직업군도 탄생했다.

하지만 도시문화의 그늘인 슬럼가가 형성되었으며,

민중 소요가 자주 발생했고, 노동조합과 소작인 조합이 결성되어

노동쟁의가 격화되는 등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혁명의 시기인 메이지와 전쟁의 시대 쇼와 사이에 협곡처럼 끼어 있는

다이쇼 시대는, 마치 찻잔 속의 폭풍처럼 잔잔하면서도 격렬하게,

냉정하면서도 열정적으로, 이성적이면서도 낭만적으로 살다 간 사람들의 무대였다.

미야모토 겐의 대표작 〈아름다운 자들의 전설〉은 제목 그대로 '전설'처럼

그 시대를 살다 간, 혹은 그 시대를 지나온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작품은 1911년, 사회주의자 고토쿠 슈스이 등 12명이 메이지 전황 암살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검거되어 처형된 일명 '대역사건'이 일어난 이듬해부터 간토대지진이 발생한 1923년까지 12년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미야모토 겐이 사사했던 극작가 기노시라 준지의 말대로 이 시기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은 '겨울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시부로쿠(본명 사카이 도시히토), 크로포트킨(오스기 사카에),단손(아라하타 간손) 등 1908년 사회주의사건(일명 적기사건)으로 투옥된 인물들은 출옥 후 '바이분샤'라는 대필 전문 출판사를 만들어 숨어 지내며 다음 기회를 노린다. 부인 해방운동을 주도했던 모나리자(히라쓰카 라이초)는 세이토샤라는 여성문인 단체를 만들어 기관지 <세이토〉를 발행하는 등 활발한 활약을 펼친다. 한편 연극계에서는 선생(시마무라 호게쓰)이 <예술좌>를 만들어 연극의 대중화를 꾀하고, 러시아에서 갓 돌아와 <자유극장>을 창단한 루파시카(오사나이 가오루)는 '진정한 예술'을 주장하며 호게쓰와 맞선다. 여기에 아내가 있으면서 자유연애를 주장하는 크로포트킨은 살로메(가미치카 이치코), 노에(이토 노에)와 사각관계에 빠진다. 노에 또한 이미 유연방(쓰지 준) 사이에 두 아이를 둔 상태. 결국 이 '싸움'에서 노에가 승리하여 두 사람은 각각 아내와 남편과 이혼한 후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하지만 크로포트킨과 노에 두 사람은 간토대지진 이후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도쿄헌병대에 의해 살해된다. 이 밖에도 정치와 연극 사이에서 고뇌하는 학생(구보 사카에), 인텔리 배우 와세다(사와다 쇼지로), <카추샤의 노래>의 작곡가 음악학교(나카야마 신페이)등 개성적인 인물들의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다이쇼라는 시대의 이미지가 부조된다. 인물들의 관계와 구성이 매우 복잡해 보이지만, 이들이 소속되어 있는 네 개의 단체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그리 복잡하지 않다. 네 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인물이 살로메(가미치카 이치코)와 유연방(쓰지 준)이다. 살로메는 도쿄 니치니치 신문기자로 크로포트킨과 사각관계에 빠지며, 그의 목을 칼로 찔러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른다. 유연방은 극단적 무정부주의자로 붕소 하나를 들고 전국을 방랑하다 쓸쓸히 최후를 맞이하는 인물이다.

세이토샤와 바이분사가 정치적으로 경쟁과 갈등 관계에 있었다면, 예술좌와 자유극장은 예술적, 연극적으로 갈등 관계에 있었다. 우연적으로 보이는 이 두 그룹의 정치, 예술 단체는,'정치적 연극'을 지향하는 학생, 정치와 예술의 '상부상조'를 주장하는 단손, 여배우를 지망하는 사회주의자 노에, 아나키스트와 니힐리스트로서 정치와 예술의 극단을 추구했던 유연방 등의 인물에 의해 필연적 관계로 발전한다.

 

 

 

연극학자 스가이 유키오는 이 작품의 특징으로 고리키의 <밑바닥에서>처럼 주인공이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는 "겨울의 시대를 풍자와 해학의 자세로 살았던 사카이 도시히토의 바이분샤에 모여든 오스기 사카에, 아라하타 간손, 그리고 쓰보우치 쇼요를 떠나 오락극과 예술극이라는 두 개의 길을 걸었던 시마무라 호게쓰의 예술좌의 활동이 전면에 드러나 있다는 점”에, 그리고 “다쿠보쿠의 시에 나오는 브나로드(민중 속으로)의 정신을 지니고 살아가려 했던 인텔리겐차들이 빚어내는 에너지가 무대 위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하지만 미야모토 겐은 초연 때 작가의 말에서 두 명의 주인공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바로 마쓰이 스마코와 민중들이다. <예술좌>를 이끌며 오락극과 예술극, 두 갈래 길을 동시에 걸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작품에서 예술 논쟁의 구심점을 이루고 있는 인물은 선생(시라무라 호게쓰)이지만, 배후에서 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인물이 스마코라는 점에서 그녀는 주인공의 위상에 손색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연극(민중연극)과 정치 (브나로드) 모두 '민중'을 최고의 화두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 주인공 개념과는 다르지만 그들에게 그 만큼의 지위를 부여하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둘은 작품에 직접적으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제2막에서 마쓰이의 모습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객들이 극장에 모여들지만, 그녀의 등장은 끊임없이 유보된다. 등장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 커질수록 존재감도 따라서 커진다. 하지만 스마코는 끝내 등장하지 않은 채 그녀의 자살 소식이 음악학교에 의해 전해진다. 이 작품에는 죽음을 암시하는 오브제로 천정에 매달린 '로프'와 '빨간색 띠'가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프롤로그에서 영사막에 대역사건 피고들의 얼굴이 비춰질 때,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노에가 스마코가 자기 앞으로 남긴 유언장을 받아드는 순간에. 누군가의 죽음에서 시작해 누군가의 죽음으로, 그리고 그 죽음을 위로하는 레퀴엠으로 막을 내리는 이 작품은 노에의 마지막 대사처럼 “정말 쓸쓸하기" 짝이 없다.

미야모토 겐은 '전후3부작'과 '혁명 4부작' 시리즈-y*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사건,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을 던져주고자 했는데, 새로운 것은 현재에 대한 냉정한 성찰에서 비롯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이 그 출발점이다.

그런 까닭에 크로포트킨의

"지금 이 다이쇼 시대, 먼 훗날 모두들 그렇게 말하겠지.

"……평온한 ……조바심 날 정도로 평온한, 아름답고 좋은 시대였다고."

"……괴롭군. ……좋은 시대라니, 말도 안 돼.”

라는 마지막 대사는 마치 작가의 육성처럼 들리는 것이다.

 

 

宮本研

미야모토 겐은 구마모토 현에서 태어나 북경총영사관에서 근무하던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북경에서 생활했다. 1944년 귀국 후, 오이타 경제전문 학교에 입학, 재학 중에 학생운동에 가담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규수제국대학 경제학과에 입학, 대학 연극부에서 처음으로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오이타 상업고등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며 연극부를 만들어 1년 동안 지도한다. 그러던 중 연극의 매력에 빠져 학교를 사직하고 도쿄로 거처를 옮긴다. 이후, 10년 간 법무성에서 일하며 노동자 연극서클 '보리의 회'를 만들어 희곡을 쓰거나 연출을 하는 둥 본격적으로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직장 연극서클 내의 갈등과 희망을 그린 처녀작 <우리가 노래를 부를 때>(1957)로 주목을 받았다. 법무성에 근무하면서 알게 된 구보타 만타로도 이 작품을 격찬했다. <일본인민 공화국>, <메커니즘 작전>으로 제8회 기시다 구니오 희곡상을 수상했다. 1962년 법무성을 퇴직하고 전업 작가로서 극작에 몰두한다.

전후 3부작 <반응공정>,〈일본 인민공화국〉,〈더 파일럿>, 혁명 4부작〈메이지의 관>, <아름다운 자들의 전설>, 〈아Q외전>,〈성 그레고리의 순교〉 등 1970년대 전기까지 발표된 작품들은 대부분 혁명운동의 가운데 혁명정당, 혁명 지도자와 민중 사이의 모순을 그렸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가라유키 씨> 등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지도자와 민중의 관계에 비유하여 여성을 그린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다. 상업연극의 대본에도 손을 댔으며, 소년 시절을 중국에서 보낸 까닭에 <아으외전>, <꿈-도츄켄 구모에몬의>, <우리 집에 왜 왔니?> 등 중국과 일본을 그린 작품들도 있다. 1976년, 〈꿈-도츄켄 구모에몬의〉를 공연할 때에는 문화대혁명기의 정치적 영향으로 중국대사관으로부터 간섭을 받기도 했다. 연극뿐만 아니라 드라마나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했으며, 대역사건 후의 다이쇼 시대의 지식인들의 군상을 그린 <아름다운 자들의 전설>은 오늘날까지 여러 차례 재공연 된 바 있다.